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29)화 (928/1,192)

제929화

백천범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자 전하의 관심을 받다니 더할 나위 없이 영광입니다. 그런데 소인은 심성이 산만하여 한 곳에 오래 있는 게 익숙지 않아 조금…….”

“궁중에 많은 법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법도에 구애받지 말고 편히 지내게. 또 궁 안에서 답답함을 풀 수 있는 방법도 있지.”

말을 마친 그가 손뼉을 쳤다. 시종 한 명이 들어와 태자 앞에서 예를 취했다.

“가서 가무를 준비하라 이르거라. 과인이 선생과 함께 감상하고자 한다.”

“예, 전하.”

시종이 허리를 숙이고 명을 받잡았다. 백천범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선생, 함께 가시게.”

백천범은 영십삼에게 눈짓을 보내곤 아무 말 없이 태자 뒤를 따랐다. 그녀는 본래 태자의 감시망에서 묵용감만 숨긴 채 이곳을 나갈 생각이었다. 그 후 묵용감을 만나 패륜이를 떠날 방법을 궁리하려 했다. 한데 태자가 그녀를 보내 주지 않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태자는 그녀를 데리고 한 전각에 들어섰다. 탁자 위에는 간식과 술, 차 같은 주전부리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가 넓게 비워져 있는 걸로 봐선 아마 가무를 위한 공간인 듯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무희와 악사들이 줄줄이 들어와 예를 갖췄다. 태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악사들은 한쪽으로 물러나 자리를 잡고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은은한 음악 속에서 무희들은 오색 천을 휘날리며 춤사위를 뽐냈다. 백천범은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곡이 끝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공연을 보니 소인도 몸이 근질근질하네요.”

태자는 조금 뜻밖이었다.

“선생도 춤이나 악기 연주를 좋아하는가?”

백천범이 말했다.

“소인은 북 치는 걸 좋아합니다.”

태자가 곧장 손뼉을 치며 목청을 높였다.

“선생께 북을 가져다 드리거라.”

양가죽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북이 대전 중앙에 놓였다. 백천범이 손을 만지작거리며 성큼성큼 북 앞으로 걸어가 북채를 집었다. 북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태자도 기대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백천범은 한참이 지나서야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북채가 허공에서 교차되더니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 동작은 연주가 시작된다는 의미였기에 다들 기대감이 커져 갔다.

이윽고 북채가 북면에 닿아 소리를 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죄다 난잡한 소리였다. 음률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북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나라는 달라도 음률은 통하는 법인데!

백천범의 연주는 그야말로 북을 마구잡이로 두드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태자의 귀한 손님을 비웃어선 안 될 일이다. 다들 속으로 웃음을 삼키느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태자 역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자는 처음에 놀란 듯하더니 입꼬리를 쭉 올려 보였다. 그래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백천범의 연주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웃으며 물었다.

“선생이 연주한 곡은 무엇인가?”

북을 다 치고 난 백천범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소인이 직접 만든 가락입니다. 나름 괜찮지요?”

태자는 눈썹을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하하, 괜찮네.”

백천범이 말했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니, 앞으로 소인이 매일 북을 쳐서 전하께 들려 드리겠습니다.”

“…….”

“전하, 속담에도 보검은 영웅에게 선물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인이 북을 잘 치니 이 북을 소인에게 주시는 건 어떠신지요?”

“…….”

북을 잘 친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날 때마다 북을 치며 마음을 달래고 싶습니다. 그럼 궁에서 좀 더 지내도 괜찮을 듯합니다.”

태자가 말했다.

“좋네. 하면 이 북을 선생에게 하사하겠네.”

백천범은 곧장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태자는 북 하나로 전 선생이 이렇게 기뻐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백천범은 매 시간 북을 치기 시작했다.

동궁은 매우 컸지만 태자는 왕래가 수월하도록 백천범을 자신의 침전과 가까운 곳에 두었다. 그 결과, 그는 늘 난잡한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백천범은 낮은 물론이거니와 밤에도 쿵쿵쿵 북을 두드렸다. 백천범에게 북을 준 게 후회될 정도였지만 이제 와서 다시 빼앗을 순 없지 않은가.

묵용감은 이틀을 기다린 뒤에야 마침내 동쪽에서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성 동쪽에 거처를 사들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저택은 황성 옆에 있었고 게다가 동궁과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 당장은 백천범을 만날 수 없으니 다른 방도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은 길고 무료한 궁 안에서 고어鼓語를 발명해 냈다. 글자 그대로 북을 쳐서 하는 말이란 뜻이었다. 백천범이 고어를 만든 것은 순전히 궁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만약 묵용감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을 땐 백천범은 고어로 의사를 표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어는 점점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대화를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고어는 그와 그녀만이 아는 비밀 언어가 되었다. 물론 이렇게 쓸모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매일 묵용감과 북을 두드리며 소식을 전했다. 그러다 흥이 돋으면 처소 안에서도 북을 치며 소란을 피웠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아랫사람들이 얼굴을 붉히고 쩔쩔맬 정도였다.

고어로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복잡한 사건을 전달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백천범은 속으로 북을 몇 번 쳐야 하는지 수를 세면서 말을 만들었다. 북을 칠 때마다 잘못 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었고 그럴 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묵용감 또한 백천범의 말을 알아듣는 게 쉽지 않았다. 종종 많은 양의 고어가 들려 올 때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뒤이어 잘못 전달했다는 북소리와 함께 처음부터 고어가 시작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귀를 쫑긋 세우고 북소리를 유심히 들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녀가 전해 오는 고어를 종이에 차분히 적어 냈다. 그는 종이 위에 써진 글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백천범이 그에게 전한 소식은 이러했다.

“태자의 서열은 다섯째. 네 명의 형이 있지만, 형과 그들의 모친은 모두 사망함.”

그는 곧장 도원곡 주인이 연상되었다. 이미 죽었다던 네 황자 중 하나가 도원곡 주인은 아닐까? 묵용감 역시 황가 출신이라 형제간의 알력 관계를 너무 잘 알았다. 몸소 두 번이나 궁정의 정변을 겪지 않았던가. 황권 아래에서는 부자와 형제지간 사이에 육친의 정은 없었다. 오로지 이해관계로만 얽혀져 있을 뿐.

그는 가만히 앉아 도원곡 주인과 만났던 일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그 까닭 없는 친숙함이 무엇인지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건 태생적인 고귀한 분위기였다. 오직 황가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갖는 고귀하고 도도한 분위기.

그는 남은 내용을 진지하게 읽었다. 백천범은 자신이 이미 태자의 시선을 교란하여 그를 잠시 수사망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자신의 부인이었다. 그를 이렇게 보호해 주다니!

묵용감은 고개를 들고 창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층 부드러워진 눈빛을 하고선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두 시위에게 말했다.

“궁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그 말에 놀란 영십구는 제 귀를 의심했다.

“노야, 어딜 가신다고요?”

“몽달의 황궁.”

묵용감이 말했다.

“너희 마마를 만나러 가야겠다.”

영십구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노야, 몽달 황궁은 그리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희를 이렇게 감시하는데…….”

영십일이 그의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거라. 노야께서 분부하시면 우린 따르면 그만이다.”

묵용감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나지막이 읊조린 그의 말에 영십구는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이었고, 영십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영십일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묵용감의 옷으로 바꿔 입었다.

영십일은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의 월아가 벽 너머에 있다면 그 또한 어떻게든 벽을 넘을 것일 테다. 사랑이란 감정을 알았기에 영십일은 황상의 말에 더욱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이 궁에 들어간 후, 영십오와 영십육은 그들을 찾아와 궁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했다. 궁내 순찰 시간이라든가 경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의 지원으로 묵용감은 어둠을 뚫고 황궁에 잠입할 수 있었고 제법 순조롭게 동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커다란 동궁 안. 그의 범아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묵용감은 지붕 위에 올라 고민에 빠졌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가볍고 느리게 ‘둥둥’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기쁜 마음에 황급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전설 속의 대붕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묵용감의 귓가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선생, 시간이 이리 늦었는데 아직 주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나와 걷고 있었어요.”

그녀가 북채를 내려놓고 말했다.

“정말 고요한 밤이군요. 가볍게 쳤을 뿐인데도 이렇게 소리가 울리다니. 태자 전하께서 듣지 못하셨으면 좋겠네요. 안 그럼 내일 또 제가 숙면을 방해했다고 말씀하실 테니까요.”

시종이 웃으며 대꾸했다.

“선생께서 가볍게 치셨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시종은 커다란 북 앞에 선 백천범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이리 북을 좋아하십니까?”

“왜냐면.”

백천범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북을 치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분과 함께 북을 치며 어찌나 행복했는지요.”

시종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북을 보며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신 거였군요. 분명 당대 제일의 가인이시겠지요.”

백천범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 당대 제일의 가인입니다. 제 눈엔 그 여인만큼 아름다운 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옥척에 서 있던 당대 제일의 가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그럼 분명 경국지색의 용모이겠군요.”

백천범은 조용히 탄식을 내뱉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하늘에 걸린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이지 그가 보고 싶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분명 같은 성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만날 수 없다니! 부디 하늘이 이 모습을 가엽게 여기어 그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면 좋으련만.

시선을 거두던 그녀는 곁눈으로 지붕 위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그자가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음은 하늘에 뜬 달보다 더 맑았고 그의 몸에서 나는 빛은 그녀를 따뜻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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