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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28)화 (927/1,192)

제928화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태자는 이번 사건 조사에 백천범이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하여 백천범은 태자와 함께 의심스러운 명첩을 선별할 수 있었다.

오른쪽 관중석에 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백천범은 금세 묵용감의 명첩을 찾아냈다. 그는 황씨 성으로 신분을 위장했고 두 수행원을 대동했다. 상인 신분이라 다른 이들의 명첩과 섞여 있어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살피는 척하다가 태자의 눈을 피해 그의 명첩을 한쪽으로 빼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따로 빼 둔 명첩 수도 제법 많아졌다. 태자가 다가와 한 장을 집어 들며 물었다.

“선생은 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백천범이 말했다.

“아니요. 이들은 셋 이상인 걸로 봐서 경기를 보러 온 가족일 확률이 높아요. 실제 범인은 큰일을 벌이러 온 자들이니 머릿수가 많지 않을 거예요.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한 명이나 많아야 둘이서 움직였겠죠. 울타리가 끊어진 것은 바깥쪽에서 손을 썼을 확률이 높고요.”

태자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생은 식견이 넓어! 추리하는 능력이 관청에서 일하는 자 못지않군.”

백천범이 겸손한 자세로 말했다.

“전하, 과찬이십니다. 저도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걸요. 좀 더 조사해 봐야 해요.”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자객이 오른쪽 관중석에서 나타났다고 한들 꼭 우측에 앉아 있던 사람이란 법이 있을까요? 어쩌면 다른 곳에 앉아 있다가 오른쪽으로 들어온 걸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자객은 일찍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오른쪽 관중석에만 집중하게 되면 자객이 부린 술수에 넘어갈지도 몰라요.”

태자가 물었다.

“하면 선생의 말은…….”

백천범이 탁자 위에 쌓인 명첩을 탁탁 치며 말했다.

“모든 관중석을 전부 다 조사해야 해요.’

“모든 관중석을 조사한다면 아마 시간이…….”

“그럼 혼자나 혹은 둘이서 온 사람들부터 조사하는 게 어때요?”

백천범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객은 십중팔구 그 안에 있어요.”

태자는 침묵에 잠겼다.

“좋소. 울타리 조사를 나간 이들에게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지. 선생 말처럼 외부에서 손을 댄 거라면… 선생 말에 따르지.”

백천범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자그마한 환약이 묵용감의 손에 쥐어졌다. 환약과 함께 온 쪽지에는 다음 임무가 적혀 있었다. 이번에도 알 듯 말 듯한 내용이 한 줄 적혀 있었다.

「열여드레, 제사를 지내기에 적당함, 환한 불빛이 하늘에 비춘다.」

묵용감이 사광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그는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묵용감이 사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잘못 짚는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네.”

사광후가 웃으며 말했다.

“노야께선 총명한 분이시니 분명 알아내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직 시간도 충분치 않습니까?”

묵용감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묵용감은 쪽지의 내용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도원곡 주인은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임무를 주면서 명확히 밝히질 않다니. 날 시험하려는 것인가?”

영십구가 말했다.

“노야, 잘못 짚어도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확실히 말해 두었으니 이번에도 해독제를 가지고 와야 할 겁니다.”

영십일이 쪽지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열여드레는 분명 날짜를 말하는 것일 테지요. 아직 보름이나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될 듯합니다.”

“제사를 올리기 적당하고 환한 불빛이 하늘에 비춘다.”

잠시 고민하던 영십구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날 불을 지르라는 걸까요?”

묵용감이 물었다.

“어디에 불을 지른단 말이냐?”

묵용감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영십구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장소는 안 적혀 있는 걸 보니 아무 데나 불을 질러 성을 혼란스럽게 만들라는 것 같습니다.”

영십일이 그를 흘겼다. 그의 눈빛은 분명했다. 말하나 마나인 소리를 했다는 뜻이었다. 영십구도 제가 괜한 말을 했다는 걸 알고 멋쩍게 웃었다.

“노야, 사 관리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하시지요.”

묵용감은 의자에 앉아 차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그가 도원곡 주인의 일을 돕는 이유는 그의 속내를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도원곡 주인의 진짜 정체를 알아야 일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보름. 보름이 남았으니 그는 그동안 반드시 일을 해결하고 그의 범아를 데리고 와야 했다.

도원곡 주인은 참 기이한 자였다. 패륜이에서 본 그의 숨은 세력들은 몽달에 매우 익숙한 자들이었다. 묵용감은 도원곡 주인이 분명 몽달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몽달의 황제와 겨룰 만한 신분을 가진 자 혹은 능력 있는 귀족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몽달의 고관이나 귀인과 접점이 없었다. 지금 백천범이 태자 곁에 있으니 조금은 알아볼 수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그들 부부가 만날 방법이 없었다. 설령 백천범이 소식을 얻는다고 해도 그에게 알려줄 길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천천히 서성였다. 영십일과 영십구는 한쪽에 서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참 뒤, 자리에 멈춰 선 묵용감이 영십구에게 말했다.

“사 관리를 불러오너라.”

금세 사광후가 들어왔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노야, 절 찾으셨습니까?”

묵용감이 물었다.

“내 신분이 상인이라 했는가?”

“예, 노야.”

“무슨 장사를 하는가?”

“노야께서는 포목점을 하십니다. 금수포목이라고 성 안에만 다섯 개의 점포가 있습니다.”

“위치는 어찌 되는가?”

사광후가 말했다.

“한 곳은 성 동쪽에, 나머지 네 곳은 성 서쪽과 남쪽에 각각 두 곳씩 있습니다.”

“장사는 잘되는가?”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사광후가 말했다.

“가게를 돌보는 관리인이 따로 있어 단골손님이 꽤 많은 편입니다.”

“내가 번 은전은 어디에 두는가?”

“숭광崇光 표호票號(옛날 상업 금융 기관)에 맡깁니다. 은표와 도장을 가져가시면 돈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하면 은표와 도장을 가져다주게.”

“…노야, 돈을 찾으실 생각입니까? 얼마나 찾으실 것인지요?”

묵용감이 방 안을 훑으며 말했다.

“이런 집을 사려면 얼마나 필요한가?”

“오천 마은馬銀(말굽 모양으로 주조한 은괴) 정도 입니다.”

묵용감이 눈썹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하면 오천 마은을 찾도록 하지.”

사광후가 말을 더듬거렸다.

“노야, 그렇게 큰돈을… 어, 어디에 쓰시려고요?”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내가 돈을 어디에 쓰든 자네가 무슨 상관인가?”

사광후가 급히 대꾸했다.

“아, 아닙니다. 그저 너무 큰돈이라…….”

묵용감이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이 집의 주인이고 포목점도 내 명의니 오천 마은은 물론, 모든 자산이 내 것이지.”

“…….”

이자가 정녕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 맞단 말인가? 설마 돈을 챙겨 도망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가 혼란스러워하자 묵용감이 재촉했다.

“어찌 그리 멍하니 서 있는 건가? 어서 가져오지 않고. 이 노야의 말을 거역할 셈인가?”

사광후는 서둘러 대꾸하고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분명 황 노야는 이곳의 임시 주인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의 면전에 서면 자꾸 겁이 났고 그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밤사이 방 관리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니 주거라. 그깟 재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은 이렇게 해도 그 또한 묵용감이 왜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한지 궁금했다. 묵용감은 그들에게 금방 답을 알려 주었다. 돈을 찾은 그는 성 동쪽에 대저택을 산 뒤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광후가 고민 끝에 그에게 물었다.

“노야, 어찌 거처를 옮기신 것입니까?”

묵용감이 말했다.

“이전의 집은 풍수가 좋지 않아서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았지. 임무조차 잘못 해석하지 않았는가? 이제 풍수가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앞으로 일을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네.”

“…….”

사광후는 묵용감이 박수무당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것을 풍수지리 탓으로 몰아가다니. 풍수지리가 좋은 저택으로 옮겼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아니었다.

그 후로도 이해하지 못할 일만 잔뜩 벌였다. 양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북을 사서 복도 아래에 두라고 분부하질 않나. 낮에는 진짜 포목점 주인장이라도 된 듯 굴며 패륜이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밤이 되면 북을 치기 시작했다.

깊은 밤까지 북을 치는 탓에 이웃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항의하러 온 이들 모두 영십일과 영십구의 서늘한 표정을 보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에 작게 투덜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한밤중에 어찌 북을 친답니까. 조용히 좀 합시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사광후는 북소리를 유심히 들어도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묵용감에게 슬쩍 물었다.

“노야, 노야께선 북 연주를 좋아하십니까?”

“그렇네.”

묵용감이 북채를 손에 들고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내 취미라네.”

“노야께서 치시는 건 어느 곡조입니까?”

묵용감이 그를 한번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북채를 힘껏 내리쳤다. 쿵! 소리와 함께 북이 진동했다. 사광후는 질문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았지만 시끄러운 북소리 때문에 입조차 뗄 수 없었다.

* * *

한밤중에 목이 말랐던 백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신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바로 잠이 오진 않았다.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무의식적으로 북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별안간 몸을 일으켜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더니 이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이튿날 오후, 태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선생의 예상이 맞았네. 그날 누군가가 울타리에 손을 써 두었더군. 자객은 혼자가 아니었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추려 놓은 자들을 조사하라고 분부해 주세요. 어쩌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태자가 말했다.

“과인이 이미 분부해 두었네. 선생께서 골라낸 자들을 샅샅이 조사하면 분명 자객을 가려낼 수 있을 걸세.”

백천범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들이 묵용감을 조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젯밤 북소리를 떠올린 그녀가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날마다 정사를 돌보시느라 바쁘시니 소인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이만 출궁하겠습니다.”

태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인이 선생을 부른 것은 선생께 바깥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네. 그간 사건 때문에 바빠 시간을 내지 못하였지만, 사건의 가닥만 얼추 잡히면 선생과 좀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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