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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26)화 (925/1,192)

제926화

태자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부황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재 몽달은 국태민안國泰民安합니다.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데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황제의 웃음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비록 구중궁궐에 오래 머물렀지만, 밖에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백성이 편안히 살기는커녕 황제를 욕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난비의 부형이 백성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멋대로 행세하는 걸 알고 있지만, 수습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는 눈감아 주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은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법이었다. 아무리 고귀한 군주라도 후회와 아쉬움이 없을 수 없었다. 난비는 그가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었다. 이제는 늙어서 사내로서의 야망은 모두 내려놓았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한번 살아 보고 싶었다. 황제는 눈썹을 비비더니 조금 피곤한 듯 말했다.

“짐은 이제 늙어서 참견하기 싫을 때가 많구나. 이제 양위할 때가…….”

태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서둘러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부황의 천추는 절정이신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부황께서는 몽달의 군주이십니다. 만백성이 사랑으로 받들고, 소자들은 부황을 하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부황께서는 소자의 구심점이십니다. 또한…….”

황제는 당황한 그의 안색을 보고 웃음기를 띠었다.

“일어나거라. 짐은 너희들이 효심이 깊다는 걸 잘 안단다.”

황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귀궁할 때, 락이와 말다툼을 했다면서?”

태자는 바로 앉으며 생각했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어떤 것도 황제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태자는 시선을 내리깔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여섯째 아우가 오늘 친구를 데려와 소자에게도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소자가 보기에 말하는 것이 범상치 않아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회가 끝난 후 만나기로 했습니다.

사냥터에서 일이 벌어지고 난 후, 그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소자가 마차에 태워 함께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여섯째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계속 쫓아와서는 아직도 동궁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황제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말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 설마 여자인 것이냐?”

태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입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자로 견식이 넓기에 소자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초청했습니다. 소자는 여섯째가 왜 저리 긴장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여섯째의 저택에는 방문객이 삼천 명이나 있는데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긴장하는 건 처음입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락이가 황당한 짓을 저질렀구나. 또 문객들도 점점 많아지는구나. 그렇게 많이 모이면 화양부에 다 지낼 수도 없을 텐데. 사실 이미 혼사를 치를 나이가 지났는데도 장가를 갈 생각이 없으니. 짐이 그동안은 내버려 뒀는데, 이제는……. 넌 신경 쓰지 말거라. 짐이 사람을 보내게 돌아가라고 할 것이니.”

황제는 오특민에게 턱을 치켜세웠다.

“네가 직접 가서 육황자를 데려오너라.”

오특민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서 명을 받고 물러갔다.

* * *

사광후는 문발 밖을 힐끔 살펴보다가 영십일과 영십구가 마차의 끌채에 없는 걸 보고 묵용감에게 물었다.

“노야, 십일과 십구는 무엇을 하러 갔습니까?”

마차에 기대고 있던 묵용감은 눈꺼풀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고기와 술을 사 오라고 했네. 오늘 임무를 무사히 마친 걸 축하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광후는 비꼬듯 말했다.

“노야께서는 첫 임무를 성공했다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제야 눈을 뜬 묵용감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광후는 입가를 한번 핥았다.

“노야,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자네는 그 쪽지에 적힌 동쪽에 있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는가?”

사광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은 화가 나서 발길질로 그의 명치를 찼다. 그는 명치에 꽂아 둔 발끝을 거두지 않고 더 세게 압박했다.

“제대로 설명해라! 이미 목표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즐겼단 말이냐?”

사광후는 묵용감의 압박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노야께서 그 쪽지를 보시고 소인에게 자세한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노야께서 이미 타산이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럴 줄 누가 알…….”

묵용감은 발끝에 더욱 힘을 주고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이구나! 내가 쪽지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그랬단 말이냐? 내가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느냐? 자신은 쪽지 배달만 할 뿐 다른 건 하나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사광후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묵용감은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고, 자신도 그렇게 대답했었다. 가슴을 누르는 발이 천근처럼 무거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묵용감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방 관리에게 전하게. 말한 것은 지키라고! 한 가지 임무를 완수했으니, 해독제 한 알을 가져오라고. 이번 일은 내 탓이 아니니 해독제는 반드시 이곳에 도착해야 하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

* * *

방 안에 앉은 백천범은 밖에서 떠들어대는 곤청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황자가 귀한 신분이긴 하지만, 동궁 사람들은 태자의 명만 받들었다. 곤청락이 아무리 위협해도 그들은 문 앞을 꽉 틀어막았다. 영십삼은 사방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지막하게 백천범에게 말했다.

“선생, 태자가 당신에게 호의를 품은 것 같지 않습니다. 육황자가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서 차라리 단숨에 도망가는 게 어떻습니까?”

백천범이 물었다.

“그가 내 신분을 알아챈 것 같아요?”

영십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백천범은 그의 뜻을 이해하고 피식 웃었다.

“괜한 걱정이에요. 난 지금 남자예요.”

영십삼이 중얼거렸다.

“세상엔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태자보다 나이가 많아요.”

“그래도 훨씬 어려 보이십니다.”

백천범이 빙그레 웃었다.

“십삼, 정말 괜한 생각이에요. 난 아이도 있어요. 우리가 여기서 도망가면 육황자에게 의지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럼 그건 신세를 지는 거예요. 나중에 어떤 요구를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조급해하지 말고 상황을 좀 더 지켜봐요.”

영십삼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일부러 그쪽으로 생각한 게 아니었다. 마마께서는 비록 처녀는 아니지만, 여전히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남자로 분장을 해도 그녀는 항상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자신이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시 후, 밖이 조용해졌다. 육황자가 누군가에게 설득당해서 가 버린 것 같았다. 영십삼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선생, 나갈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노야께서 이미 패륜이성에 도착하셨으니 어서 노야와 합류해야 합니다.”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께 말씀드리고 그의 의견이 어떤지 들어볼게요.”

육황자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태자가 들어와 공수한 손을 들어 올리며 사과했다.

“오늘 선생을 놀라게 했군. 정말 미안하네.”

백천범은 답례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재미있는 양 잡기 대회가 무산되어서 무척 아쉽네요. 전하, 소인이 할 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리 정성껏 초청해 주시니 소인, 영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궁녀가 차를 올리자, 태자는 장포를 걷어 올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벌어져서 본궁도 많이 놀랐지만, 배후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네. 범인을 잡으면 백성들 앞에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네.”

백천범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십사황자를 다치게 한 건 분명 영십일, 만약 그가 붙잡히면 묵용감의 정체가 금방 드러날 텐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벌써 단서를 찾았습니까?”

“울타리는 나중에 끊어졌네. 열넷째 아우를 다치게 한 건 관람석에 있던 사람이네. 본궁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놈이 온 방향은 관람석 오른쪽이었고, 관람석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건 명첩이 있었다는 뜻이지. 명첩만 다 조사하면 십중팔구 찾을 수 있을 것이네. 본궁의 수하들은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니, 오늘 밤이면 거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네.”

백천범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감탄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정말 거침없으실 뿐만 아니라 세심하고 빈틈이 없으시네요. 소인은 정말 탄복할 뿐입니다.”

태자는 그녀를 보고 입가를 살짝 끌어올렸다.

“아까 선생이 할 말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백천범은 짧게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저를 데리고 입궁하실 줄은 정말 몰라서 당황했습니다. 제가 황궁에 온 건 처음입니다. 황궁은 역시 대범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다만 너무 당황해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어요.”

태자는 하하 웃었다.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겠나. 선생께서 동궁에 며칠만 더 묵는다면, 본궁이 선생에게 주변을 다 구경시켜 주겠네. 몽달은 지역이 넓고 목초지와 사막도 많지. 동월만큼 수려하지 못하나 궁전의 경치는 그런대로 견줄 만하네.”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드립니다, 태자 전하.”

태자는 몇 마디 잡담을 나누더니 가 버렸다. 그가 가자마자 영십삼이 물었다.

“선생, 왜 궁을 나가겠다고 말하지 않으십니까?”

“태자가 오늘 일을 조사하는데, 혹시라도 노야가 들킬까 봐 걱정이에요. 잠시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낫겠어요. 무슨 소식이 있으면 즉시 노야께 알릴 수 있잖아요.”

영십삼은 어안이 벙벙했다.

“선생, 노야를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만나고 싶어요.”

백천범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노야께 문제가 생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가야 해요.”

* * *

날이 저물자 영십일과 영십구가 돌아왔다. 한 사람은 술을 들고 다른 한 사람은 안주 한 바구니를 들고 왔다. 묵용감은 방 안에서 시중을 들던 하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세 사람이서 술을 마셨다. 반 정도 먹었을 때 영십구가 밖으로 나갔다. 영십일은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노야, 소인이 십오, 십육과 접선했습니다. 마마께서는 지금 패륜이성에 계십니다. 그동안 계속 이곳에서 지내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몽달의 육황자와 가까이 지내신다고 합니다. 오늘도 육황자가 마마를 모시고 사냥터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마를 모시고 나간 사람은 육황자가 아니라 몽달의 태자라고 합니다.”

묵용감은 육황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눈살을 찌푸렸지만, 태자라는 말에 미간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지난 며칠 동안 어떤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영십일은 황제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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