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5화
황제는 줄곧 한아타를 나가지 않고 있다가 바로 호송되어 후문으로 나갔다. 창백한 얼굴의 십사황자도 손으로 가슴을 붙잡은 채 호위들에 둘러싸여 후문으로 향했다.
점점 더 많은 호위병이 사냥터로 몰려들었고, 양 떼는 우왕좌왕하며 달아났다. 용사들은 혼란스러운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들 한아타로 달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떠올린 건 황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파가 밀려올 때, 백천범은 사람들에게 밀려서 다치지 않도록 기민하게 가장자리에 있는 큰 기둥 앞에 붙어 섰다. 영십삼은 얼른 몸으로 그녀를 보호하며 사람들을 막아섰다.
흥미로운 양 잡기 대회가 엉망이 되자 백성들이 분노했다. 부자가 될 거라는 꿈이 깨진 것이다. 어떤 이는 막무가내로 사냥터로 뛰어들어 양을 잡기도 했다. 어차피 이렇게 난리가 났으니 양이라도 잡아가서 보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앞장서니, 더 많은 사람이 사냥터로 뛰어들었다.
영십일을 포위했던 호위병들도 인파에 휩쓸려 전부 흩어져 버렸다. 그는 기회를 틈타 군중 속에 섞여 도망갔다. 그는 쓰고 있던 복면을 벗어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멀리서 그를 바라보던 영십삼은 그가 복면을 벗자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영십삼은 뒤에 있던 백천범에게 속삭였다.
“노야께서 여기 계십니다.”
백천범은 기뻐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바글거리는 인파에 누가 묵용감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영십삼은 그녀를 위로했다.
“제가 십오와 십육에게 암호를 더 많이 남기라고 하겠습니다. 노야가 성안에 계신다면 분명 연락이 닿을 겁니다.”
백천범은 격동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도처에 몽달 병사들이 있어서 묵용감에게는 매우 위험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더욱더 조심하는 것이었다. 절대 허점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우리도 사람들을 따라 도망가요. 일단 나가서 다시 이야기해요.”
고개를 끄덕인 영십삼이 그녀를 감싼 채 관람석 아래로 뛰어내려 가려고 했다. 막 몇 걸음 내디뎠는데 호위병 몇 명이 달려와 그들을 에워쌌다. 백천범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십삼은 손을 소매 안으로 움츠려 비도飛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무언가 행동을 취하려는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오히려 선생을 놀라게 했군.”
백천범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태자 곤청각이었다.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그녀 앞에 이르렀다. 핏빛처럼 새빨간 조끼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영십삼은 여전히 비도를 꽉 움켜쥐고 경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객이 있었네.”
태자가 짧게 설명했다.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선생을 후송하라고 사람을 보내겠네.”
백천범이 말했다.
“아뇨, 저도 수행원이 있어요. 이자가 얼마든지 저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선생, 사양하지 마시게. 당신은 여섯째 아우의 귀한 손님이자 나의 귀한 손님이네. 선생에게 만약에 사고라도 난다면 나 역시 괴로울 것이네. 마차가 바로 아래에 있으니, 얼른 따라오시게.”
태자가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고, 몇 명의 호위병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천범은 수가 더 많아지는 호위병을 바라보고는 강경책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영십삼에게 조금하게 굴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뭐든 일단 밖에 나가서 다시 말하자는 뜻이었다.
* * *
양을 훔치던 백성은 호위의 창에 찔려 쓰러졌고, 선홍빛 피는 광기에 빠진 백성들을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혼란한 국면은 그렇게 서서히 통제되었다.
묵용감은 자신의 마차로 향하다가 뒤에서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길을 터주는 호위병이 고함을 질렀다.
“비켜라! 저리 비켜라. 죽고 싶은 것이냐? 어서 저리 비키거라.”
군중들이 비켜서서 그 마차에게 길을 양보했다. 마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묵용감은 끌채에 서 있던 사람의 옆모습이 매우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무의식적으로 뒤쫓아 가려고 하는데, 관리 사광후가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노야, 이쪽입니다.”
묵용감은 발걸음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사광후는 웃으며 물었다.
“노야, 어찌 저리로 뛰어가십니까?”
묵용감은 장포를 걷어 올리고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 마차를 잘못 봤네.”
이때, 영십일과 영십구까지 마차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마차 끌채에 앉아서 방금 그들 곁을 지나간 마차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육황자는 울화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뭐라? 태자가 전 선생을 모셔 갔다? 그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전 선생은 내 손님인데 도대체 뭘 어찌하려고?”
그의 측근이 말했다.
“전하, 아니면 지금 가서 전 선생을 다시 뺏어올까요?”
육황자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거라. 태자가 백주 대낮에 내 친우를 데려갔으니 설령 황상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그리하여 또 한 대의 마차가 전광석화처럼 뛰어나갔다. 말채찍을 요란스럽게 휘두르자 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문발을 걷고 밖을 내다본 사광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놈의 귀인들은 백성의 목숨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죠. 그들의 눈에 백성은 땅강아지와 개미처럼 하찮은 미물일 뿐… 백성의 목숨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묵용감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저들을 싫어하는가?”
사광후는 태연하게 말했다.
“당연히 싫어하죠. 몽달의 백성들은 전부 저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임무가 필요한 건가?”
사광후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태자의 마차 안은 굉장히 넓었다. 구석에는 목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천범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시선을 내렸고, 영십삼은 그녀 곁에 앉아 눈을 반짝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그는 원래 끌채에 앉아 있었으나 나중엔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비록 백천범과 나란히 앉은 건 불경을 범하는 것이지만, 비상시에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후 마마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맞은편에는 태자가 사색에 빠진 채 눈썹을 비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마차 안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시종 한 명이 머리를 내밀고 들어와 태자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는 냉랭하게 명했다.
“빨리 가자.”
마부는 말채찍으로 말 등을 더 세게 후려쳤고, 입으로 고함을 질렀다. 말은 고통 속에서 더욱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네.”
태자는 빙긋 웃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금은 빨리 가지 못하네. 좀 더 앞으로 가면 괜찮아질 거네.”
이리하여, 사냥터에서 성으로 돌아가는 관도 위에서 두 대의 마차가 시합을 하듯 앞뒤로 달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앞에 가는 마차가 더 빨리 달렸지만 뒤따라가는 마차도 기세를 줄이지 않았다. 행인들과 다른 마차들은 다급하게 길을 비킨 채 그들이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 * *
대대적인 인마가 황제를 궁으로 호송했다. 궁중에서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비는 눈시울을 붉히며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안쪽에서 손이 나오자 그녀는 그를 얼른 부축했다.
“부처님이 보우하셨습니다, 폐하. 신첩 소식을 듣고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황제는 받침대를 밟고 내려온 뒤,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며 말했다.
“작은 일에도 이렇게 놀라다니! 평소에 짐에게 행패를 부리던 배짱은 어디 갔소?”
난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폐하, 이번엔 정말 놀라 죽을 뻔했습니다. 신첩을 놀리지 마십시오.”
“알겠소. 알겠소.”
황제는 그녀를 위로했다.
“짐의 애비愛妃가 많이 놀랐구나. 나중에 상을 내려서 그 놀란 마음을 위로해 주겠소.”
난비는 더욱 심드렁해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신첩이 상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신첩은 정말 걱정했습니다.”
황제는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를 끌어안고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난비는 직접 차를 올렸다. 거기다 궁녀가 가져온 소나酥那를 한 숟가락 떠서 황제의 입가에 가져갔다. 황제는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매우 기뻐하며 즐기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의관이 밖에서 알현을 청했다. 황제가 빙글 웃으며 난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눈치가 빠른 난비는 얼른 그릇을 내려놓고 뒷전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나가자 황제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의관은 무릎을 꿇고 십사황자의 상황을 자세히 아뢰었다.
“폐하, 십사 전하께서는 장부에 전해진 강한 충격으로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십사 전하의 맥은 비록 약하지만 매우 평온한 상태인지라 목숨엔 지장이 없으실 것입니다. 신이 이미 약을 처방하였으니 몸조리만 잘하시고 좀 쉬시면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다.”
그는 어전총관인 오특민烏特敏에게 물었다.
“태자는 돌아왔느냐?”
오특민이 대답했다.
“방금 돌아오셨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폐하를 찾아뵙겠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월백색 장포를 입고 겉에 황색으로 테를 두른 조끼를 입었다. 머리에는 관도 쓰지 않은 채 굵은 변발을 머리 뒤로 늘어뜨린 상태였다. 그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오늘 부황을 놀라게 했으니, 소자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제는 친히 그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앉아서 이야기하거라. 오늘 일을 넌 어떻게 보느냐?”
두 주먹을 무릎에 올린 채 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자, 이미 사람을 시켜 이번 일을 조사하라 시켰습니다. 그자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바로 열넷째였습니다. 어쩌면 열넷째가 궁 밖에서 원수지간을 맺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감히 황자와 원한을 맺다니, 담이 큰 놈이군. 그런데 백성들은 어떻게 울타리 안으로 뛰어든 것이냐?”
“아마도 관전하는 백성이 너무 많아서 울타리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냥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 같습니다. 다만…….”
잠시 머뭇거린 태자는 말을 이었다.
“이건 소자의 추정일 뿐, 정확한 것은 조사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황제는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직하게 말했다.
“각아, 어쩐지 짐의 마음이 편치 않구나.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