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2화
전범은 고상한 양춘백설뿐만 아니라 토속적인 하리파인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던 최하층 계급에 관한 이야기도 그자의 입에서 나오면 즐거움과 재미가 충만했다.
그자는 말하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눈썹이 춤을 추고, 표정이 매우 풍부해서 어떤 이야기든 그자의 입에서 나오면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슬쩍 그자를 훑어봤다. 짙은 두 눈썹과 보기 싫은 검은 점만 없었다면 그자의 용모는 눈을 즐겁게 할 정도였을 것이다.
다만, 그자의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가 에둘러서 물으니 전범은 솔직하게 이립而立이 넘었다고 말했다.
곤청락은 정말 그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서른이 넘었다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저보다 몇 살이나 더 많았지만 얼굴로 봐선 훨씬 어려 보였다. 표정도 항상 생글생글 웃고 있어 세상 근심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의 저택에는 문객이 삼천이나 되지만, 전범처럼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전범이 바깥에서 쌓은 견문을 듣는 걸 좋아했다. 그자가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아무리 답답한 마음도 어느새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그가 전범에게 거처를 화양부로 옮기라고 했지만, 전범은 완곡히 거절했다. 그도 그자의 의사를 존중해 자신의 요패를 주었고, 매일 사람을 보내 그자를 자신의 저택으로 청해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츰 왕래가 계속되면서 전범은 곤청락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날 백천범은 전범이라는 가명으로 곤청락과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랫사람이 방금 만든 의복을 가져와 곤청락에게 보였다. 백천범은 그 의복의 양식이 좀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 궁금해서 물었다.
“이것은 명절에 입는 의복인가요?”
모처럼 상대가 모르는 것이 나오자 곤청락은 의기양양해서 대답했다.
“선생은 몽달에서 해마다 하는 양 잡기 대회를 아시는가?”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금 듣긴 했습니다.”
곤청락은 조끼를 들어 올린 채 흔들었다.
“이게 바로 양 잡기 대회에 참가할 때 의복이네. 선생도 한번 보겠나? 자, 어때? 괜찮은가?”
그는 겸손하게 말한 것이었다. 정교하고 세심하게 만든 의복이 어찌 괜찮기만 하겠는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백천범이 옷을 받아 자세히 살폈다. 조끼는 가슴 중앙에서 단추를 여미는 양식이었다. 황색 천에 옥처럼 하얀 진주가 가득 박혀 있고, 옷깃에는 손가락 굵기의 금테가 두 줄이나 둘러져 있었다. 어깨에는 머리를 든 채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독수리가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가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예쁘네요.”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 건넨 칭찬 한마디에 곤청락은 속으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시 허리띠를 건네주었다.
“선생, 이것도 좀 봐 주시게. 허리띠를 수놓는 데만 딱 석 달이 걸렸네.”
백천범은 조끼를 내려놓고 허리띠를 받아 들었다. 허리띠는 그녀의 손바닥보다 더 넓었고, 그 위에는 갖가지 번잡한 꽃들이 수놓아져 있어서 다소 현란해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꽃과 가지가 엉키고, 잎과 줄기가 분명하게 구분되며, 색깔도 잘 어우러졌다. 녹하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솜씨였다.
조끼와 허리띠 외에도 의복은 하의와 각반脚絆, 무릎 보호대, 사슴 가죽 장갑, 소가죽 장화까지 모두 다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백천범은 이미 다루에서 양 잡기 대회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과 기대감을 보았다. 패륜이 성내 곳곳에서는 탁자를 놓고 내기 돈을 거는 전장도 많았다. 이런 의복까지 입는 걸 보니 그녀는 양 잡기 시합의 근사한 정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물었다.
“전하, 그날 대회에 저도 구경하러 갈 수 있나요?”
“당연히 갈 수 있네.”
곤청락는 기뻐하며 말했다.
“선생은 본 전하의 친구이니, 당연히 대회를 관전할 수 있다네.”
백천범은 그가 관전觀戰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양 잡기 대회의 격렬함이 벌써 예상되었다. 그녀는 누군가 몽달을 수렁에 빠뜨리려 한다면, 분명 양 잡기 대회에서 손을 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회는 몽달 황실에 통쾌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 *
묵용감은 작은 대나무 통에서 쪽지를 꺼내 천천히 펼쳤다.
「초사흘, 동쪽에 있는 자에게 상처만 입히고 죽이지는 말아라.」
묵용감은 고개를 들어 사광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사광후는 허리를 굽히고 공손하게 답했다.
“소인은 쪽지를 배달만 할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묵용감은 좀 우스웠다. 자신에게 임무를 줬으면서 자세히 설명은 하지 않는다. 이건 마치 수수께끼를 맞히는 것 같다. 이게 대체 무슨 임무란 말인가? 사광후가 물러나자 묵용감은 책상 위에 쪽지를 던지고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렸다.
“너희들 생각에는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으냐?”
영십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야, 몽달에서 해마다 열리는 양 잡기 대회가 마로 다음 달 초사흘에 열립니다. 그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묵용감은 칭찬하듯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바로 그날을 이르는 것이다. 도원곡주가 몽달 황제의 속을 뒤집고 싶은 모양인데… 그날보다 더 적당한 기회는 없지.”
영십일이 말했다.
“상처만 입히고 죽이지는 말라는 건 이해하기 쉽지만, 동쪽에 있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영십구가 끼어들었다.
“이름에 동녘 동이 들어간 사람 아닐까요?”
묵용감은 오히려 다른 걸 물었다.
“손을 쓴다면 왜 상처만 입히고 죽이지는 말라고 했을까?”
두 시위는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묵용감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노야.”
영십일이 말했다.
“소인이 듣기로는 양 잡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황실의 친인척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에 동東자가 들어 있는지 알아보면 목표를 확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묵용감이 영십구에게 명했다.
“사광후를 들어오라고 해라.”
명을 받은 영십구가 재빨리 사광후를 데리고 왔다. 묵용감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몽달 황실의 명부가 필요하다.”
사광후는 그의 요구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미리 준비한 것처럼 품에서 명부를 꺼내 공손하게 건넸다.
“이게 바로 몽달 황실의 명부입니다.”
묵용감은 명부를 손에 들고 뒤적거리다가 정말로 이름에 동자가 들어 있는 황자를 찾아냈다. 곤청동昆清東이라는 이름을 가진 몽달의 십사황자였다. 올해 나이 열여덟.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묵용감은 어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광후가 아직도 앞에 서 있었다. 묵용감은 손을 내저으며 나가라고 명했다. 사광후가 방을 나가자, 영십일이 물었다.
“노야, 곤청동이 정말 우리의 목표입니까?”
묵용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표가 곤청동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몽달 황실의 명부를 가지고 있는 도원곡주의 세력이 정말 만만치 않구나. 도원곡 주인이 상대하려는 게 몽달인지 아니면 몽달 황실인지 모르겠으니, 이 문제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
* * *
만민이 고대하던 그날이 마침내 밝았다. 하늘도 은혜를 베풀어 밝은 태양이 높이 뜬 상쾌한 날씨를 선사했다. 하늘은 온통 푸르고 초원에 모여 있는 양 떼들처럼 흰 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붉은 해가 하늘 높이 걸려서 드넓은 대지를 금빛으로 뒤덮었다. 사람들이 모두 희색이 만면했다.
육황자인 곤청락의 귀한 손님인 백천범은 입장 명첩을 받곤 곤청락을 따라 사냥터 안으로 들어갔다. 사냥터에는 화려한 궁장宮賬이 쳐져 있는데, 몽달인들은 한아타라고 불렀다.
한아타는 매우 아름다웠다. 융단이 노란 비단으로 덮여 있고, 뾰족한 금천장이 세워져 햇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꼭대기에는 황색, 녹색 그리고 홍색의 술들이 달려 있어 매우 화려했다. 그 안에 있으면 마치 황금으로 꾸민 전당에 있는 것과 같았다.
백천범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풍경에 감탄했다. 곤청락은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자못 의기양양해했다.
“선생, 안에 들어가 보고 싶은가?”
백천범은 눈을 반짝였다.
“네, 들어가 보고 싶어요.”
“…….”
곤청락은 그저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다. 한아타는 황제가 외출했을 때 쓰는 임시 처소라 일반인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한 말이었는데 진담으로 받다니!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선생, 나를 따라오시게.”
때는 아직 일렀다. 황제는 보통 늦게 도착하니 지금은 들어가 봐도 상관없을 것이다.
곤청락은 백천범을 데리고 한아타에 들어갔다. 햇빛이 두루 비치는 바깥보다는 좀 서늘했지만, 휘황찬란한 내부엔 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안에는 천장을 받치는 큰 기둥들이 있는데, 위쪽에는 구름 문양이, 아래에는 용과 봉황 그리고 매가 날아오르는 용봉비응龍鳳飛鷹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바닥에 꽃을 수놓은 담요가 깔려 있어서 발을 디디면 푹신푹신했다. 왕좌에는 호피가 깔려 있고 알록달록한 색채로 꾸며져 있었다.
의자 앞에는 꽃무늬를 새긴 서안이 놓여 있었으며, 서안 위에는 금은으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었다. 왕좌 양옆에도 의자와 서안이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황제의 친인척들을 위한 것이리라. 백천범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하자 곤청락은 더욱더 의기양양해졌다.
“이곳은 황제의 임시 처소이니 가볍게 여기면 안 되네. 이런 한아타를 만드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지. 만약 선생이 흥미가 있다면 나중에 공방을 구경시켜 주겠네.”
백천범이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들어와 냉랭하게 말했다.
“여섯째 아우, 이곳은 폐하의 임소臨所인데 어찌 잡인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는가?”
백천범이 고개를 돌리니 키 큰 남자가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곤청락는 그에게 대충 예를 취하며 점잖게 말했다.
“전 선생은 잡인이 아니고 나의 귀한 손님입니다.”
그는 백천범에게 그 남자를 소개했다.
“전 선생, 이분이 태자 전하이시네.”
백천범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공수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소인 전범,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곤청각昆清玨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간을 더욱더 찡그렸다. 그는 잠시 후에 물었다.
“전 선생은 어디 사람이신가?”
백천범이 말했다.
“소인은 동월인입니다.”
곤청각의 시선이 줄곧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얼굴이 의미심장해지자 영십삼은 말없이 그녀의 앞에 섰다. 곤청각은 그의 행동을 알아차리고는 이번에는 영십삼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분은?”
“전하께서는 개의치 마십시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소인의 수행원입니다.”
조금 어두웠던 궁장 안. 그녀가 웃자 마치 등불이 밝아진 것처럼 반짝였다. 곤청각의 표정이 웬일인지 누그러지며 자리를 청했다.
“선생, 앉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