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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21)화 (920/1,192)

제921화

배 위에는 뱃사공이 없었다. 방 관리의 지휘 아래 영십일과 영십구가 노를 잡았다. 두 사람은 무공이 출중해서 노를 젓는 속도도 매우 빨랐다.

묵용감은 하천에도 지류가 많다는 걸 알아차렸다. 동쪽에도 하천이 흐르고 서쪽에도 흘러 동굴 내부에서 서로 종횡으로 교차했다. 더욱이 불빛이 너무 흐려서 배가 이리저리 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도무지 방향을 분별할 수 없었다.

마침내 콸콸 소리와 함께 강물이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물이 쏟아지지는 않았고 그런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드문드문 물방울이 얼굴에 튀었지만,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얼굴을 옷깃으로 닦고 고개를 들자 높고 아득한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은으로 된 못을 촘촘히 박은 것처럼 별들이 하늘에 빽빽했다. 어두운 곳에서만 지내다 다시 하늘을 만난 것처럼 놀랍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묵용감이 먼저 배에서 뛰어내린 후, 영십일과 영십구가 배에서 내렸다. 방 관리가 배 안에 그대로 선 채 그들에게 공수한 손을 들어 올렸다.

“천 리까지 배웅하더라도 끝내 작별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면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마차를 타면 쉽게 입성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보니,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었다. 묵용감도 손을 들어 예를 취했다.

“그럼, 여기서 작별이겠군.”

방 관리는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만나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더니 배를 저어 되돌아갔다. 배는 폭포 너머로 사라졌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주 포근한 달빛이 언덕에서 내려오는 세 사람과 산비탈에 서 있는 마차를 비추었다.

마차 끌채에 앉아 있는 마부는 대략 오십 세쯤 되어 보였는데, 두꺼운 오자를 입고 있었다. 인상이 굉장히 충직해 보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공수한 손을 흔들었다.

“황 노야이시죠? 소인은 성이 제이고, 이름은 삼피三皮라고 합니다. 방 관리께서 저에게 황 노야와 두 형제분을 맞이해서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수고가 많군.”

“황 노야, 마차에 오르시지요. 산 아래는 춥습니다. 마차 안에 오자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노야와 두 형제께서는 옷을 바꿔 입으십시오.”

영십일은 발을 걷고 묵용감을 마차에 태웠다. 마차의 찻간은 매우 넓어서 두 개의 긴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고, 한쪽에는 개어 놓은 세 벌의 옷이 놓여 있었다.

한 벌은 복자 무늬가 은은하게 새겨진 검은 장포였다. 옷깃과 소매 둘레에 짧은 백색 옷깃을 덧대어서 간소하지만, 품위 있는 의복이었다. 분명 묵용감을 위해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두 벌의 의상은 호청湖青색 면오자로 영십일과 영십구를 위한 것처럼 보였다.

골짜기는 봄처럼 따뜻했지만 산 아래는 오히려 섣달 겨울처럼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동굴에서 나왔을 때, 세 사람은 건장한데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더니 과연 훨씬 따뜻했다. 제삼피가 다가와 문발을 젖히곤 웃으며 물었다.

“옷은 잘 맞습니까?”

묵용감이 소매를 털며 대답했다.

“그래, 이리 세심히 챙겨 줘서 고맙네.”

제삼피가 말했다.

“소인에게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소인은 방 관리께서 시키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방 관리께 하시면 됩니다.”

묵용감은 살짝 마음이 움직였다.

“방 관리가 준비하라 명한 것인가? 정말 세심한 사람이군.”

“그렇습니다.”

제삼피가 덧붙였다.

“방 관리께서는 소인이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세심한 사람입니다.”

묵용감이 마차에 기대에 탐색하듯 물었다.

“방 관리가 관리를 맡은 지 오래되었는가? 무슨 일이든 오래 하면 자연히 섬세해지기 마련이지.”

제삼피는 마차를 끌며 대답했다.

“아주 오래되었죠.”

하지만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전혀 말해 주지 않았다. 묵용감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강한 장수 밑에 약한 병사는 없는 법이다. 도원곡 주인부터 방 관리, 그리고 마부조차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방 관리는 골짜기를 나가지도 않고 외부로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다. 짐작건대, 아마도 외부와 소통하는 다른 경로가 있을 것이다.

마차가 흔들거리며 산림을 빠져나가 관도에 이르렀다. 길 위에 있는 나무들은 잎사귀가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내보이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보니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먹잇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길가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묵용감은 앞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떤 것일지, 또한 마차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더는 알아보기 귀찮아서 문발을 내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영십일이 귓가에 속삭였다.

“노야, 성에 들어왔습니다.”

묵용감이 발을 걷어 올리고 밖을 살폈다. 밖은 이미 한밤중이었고,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제삼피는 성문 경비병들과 낮은 목소리로 교섭 중이었다. 잠시 후, 성문이 열리고 마차는 순조롭게 지나갈 수 있었다.

묵용감은 달빛의 도움으로 성문에 적힌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이곳은 패륜이였다. 그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몽달의 도성 패륜이에 도착하다니… 게다가 마부의 몇 마디 말로 성문 경비병이 성문을 열게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보니, 이미 패륜이에 도원곡 주인의 세력이 적지 않게 침투해 있는 것 같았다.

사방이 조용히 말발굽 소리만 텅 빈 거리에 울려 퍼졌다. 모퉁이를 두세 번 돌고 난 뒤, 마차는 어떤 저택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진작에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차가 멈추자 곧 누군가가 문발을 걷어 올렸다.

영십구가 먼저 뛰어내려서 문발을 걷은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사십 대로 보이는 남자로 몸집이 매우 크고 입술이 두꺼운 게 몽달인의 특징이 뚜렷했다. 그는 어수룩한 미소를 지으며 묵용감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하려 했다.

“노야, 소인은 사광후謝光厚라고 합니다. 노야의 관리를 맡았습니다.”

묵용감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택에 관리까지… 그를 이곳에 살게 할 작정이란 말인가?

그는 관리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홀로 기민하게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아무 표정도 없이 짤막하게 대꾸한 묵용감은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속속 안으로 들어왔다. 사 관리는 묵용감에게 일꾼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여자 관리인 한 명, 어여쁜 여종 두 명, 요리사 한 명, 마부 한 명 그리고 관리인 자신까지 모두 여섯 명의 하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게다가 묵용감과 두 명의 호위까지 모두 아홉 명. 한 저택을 꾸려나가기에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인원이었다.

하인들은 모두 묵용감에게 절을 하며 노야라고 불렀다.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은 그들의 태도를 보니 마치 먼 길 다녀온 자신의 주인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비록 밤이 깊었지만, 묵용감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을 고려해 사 관리는 일찌감치 요리사를 시켜 뜨끈한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묵용감은 사양치 않고 두 명의 시위와 함께 앉아서 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다 하자 두 여종이 이부자리를 깔고 주인의 잠자리 시중을 들려고 했다. 도원곡에서의 경험이 있었던 묵용감은 여종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곧바로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한기를 가득 띤 눈빛으로 그녀들을 쏘아보았고, 두 여종은 다리가 굳어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음식을 방금 먹어서 아직 잠이 오지 않는다. 마당에 나가서 소화를 좀 시킬 것이다.”

두 여종은 시선을 내리고 응대하며 조용히 물러났다. 영십구가 조용히 웃었다.

“노야, 방 관리가 또 미인계를 쓸까 봐 그러십니까?”

묵용감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미인계를 쓴다면 이번엔 네가 나서야지. 나는 그딴 짓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

뒷짐을 지고 문을 나선 묵용감은 안뜰에 서서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조금 우울해졌다.

“부인이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으냐?”

영십일이 좌우를 살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성白城에 계실 겁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녀 성격에 백성에서 가만히 기다릴 것 같으냐?”

영십일은 황후를 걱정하는 그를 위로했다.

“노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삼이 곁을 지키고 있으니 부인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묵용감은 여전히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그녀가 잘 있을 거라는 건 안다. 단지… 그녀가 보고 싶구나.”

어쩌면 허공에 뜬 달이 너무 밝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리움이 차고 넘쳤기 때문일까? 평소 위엄을 잃지 않던 황제는 모처럼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감정을 드러냈다.

영십일도 가슴이 아려왔다. 말없이 그도 달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때로는 화내고, 때로는 냉랭해지던 그녀. 그도 역시 월아가 그리웠다.

* * *

그때, 백천범도 하늘에 높이 뜬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밤중에서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자신이 할 일을 찾아내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멈춰 서면 텅 빈 마음에 외로움이 몰려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묵용감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영십삼 앞에서는 애써 침착하게 행동했지만, 밤이 깊어지면 우울한 감정을 가눌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부군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녀는 밝은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묵용감, 대체 당신은 어디 있어요? 제가 패륜이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거 알아요? 왜 아직도 이곳으로 오지 않는 거예요?”

* * *

곤청락은 처음 전범을 만났을 때,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진정으로 흥미를 느낀 것은 그자의 곁을 지키는 매서운 눈매를 가진 뛰어난 수행원이었다. 전범은 생긴 것도 문약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술을 마실 줄도 몰랐기 때문에 그의 비위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자 전범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자는 정말 괜찮은 인물이었다.

술은 마실 줄 모르나 술 빚는 법은 알고, 찻잎은 잘 모르지만, 다도 예법에는 정통했다. 아가씨들이 수를 놓을 때 쓰는 바늘이 몇 가지인지도 알고 있으며 남자들이 쓰는 완도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좋은 말을 고르는 법도 알고, 견직물의 품질을 판별할 수 있었다. 목기를 보면 목기에 대해 논할 수 있고 대나무 조각을 보면 대나무 조각을 평가했다. 심지어 파사 고양이를 온순하게 만들 줄도 알았다.

호랑이와 표범의 성품을 이해하고 있었고, 등롱을 어떻게 만드는 줄도 알았다. 양가죽을 무두질하는 방법도 알고, 향을 맡으면 향의 출처를 알아맞히며 옥을 보면 옥의 산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두 마리 토끼를 보고 암수를 한눈에 구별하며, 탁자 위에 있는 조각을 보더니 어떤 조각법을 활용했는지도 알아냈다.

요컨대, 그자의 해박함은 기이한 경지이었다. 비록 자신은 몽달의 육황자이지만, 견식으로 따지자면 그자보다 훨씬 못했다. 더욱더 불가사의한 것은, 전범이 마치 신분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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