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20)화 (919/1,192)

제920화

월아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은 원래 북쪽 국경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어요. 당신이 그곳에서 왔다면 알 거예요. 그곳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지……. 일 년 내내 먹고사는 문제로 늘 고생해야 한다고요. 여기에 몽달군이 시시때때로 와서 소란을 피우니 집안 살림까지 궁핍해졌죠.

집안에 남동생이 둘이나 더 있었는데, 그 애들을 먹이는 것도 힘겨웠어요. 그땐 차라리 부잣집에 계집종으로 팔려 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다른 건 몰라도, 밥 먹는 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요. 그래서 여기로 오게 된 거예요.

이곳에선 천대받지 않고 힘든 일을 하지도 않아요.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예쁜 옷도 입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가장 좋은 건 여기의 기후예요. 따뜻해서 공이 될 정도로 껴입을 필요도 없잖아요.

전 손에 동상이 잘 걸려서 겨울만 되면 두 손이 엉망이 되곤 했어요. 그 손으로 빨래도 하고 밥도 하며 차가운 물에 수시로 손을 담갔어요. 여기 와서는 동상에 걸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긴 정말 좋아요. 곡식도 빨리 자라고, 차나무와 목화까지 심어서 자급자족이 가능해요. 전 여자고, 다른 재주도 없지만, 공짜 밥은 먹기 싫어서…….”

“그래서 남자랑 잠을 잔단 말이오?”

영십일은 으르렁거렸다.

“그나마 나를 만났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인생 망쳤을 거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요. 상갑 등급의 남자는 많지 않거든요. 전 잘 먹고 잘 입으며 지내다가 오 년 만에 당신을 만난 거예요.”

월아가 뭐라고 말해도 영십일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여인이 혹시라도 다른 남자와 잠을 잔다는 상상을 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아래에 깔고 호되게 혼을 내주고 싶었지만,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 참았다.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면 왜 당신에게 약을 먹으라고 강요했겠소?”

“규율이 없으면 일을 해낼 수 없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을 관리하려면 그런 수단이 없으면 안 돼요. 다들 규율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기에 이걸 어기는 사람은 없어요. 만약 당신이 천방지축으로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방 관리도 나한테 약을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영십일은 성이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그들에게 완전히 세뇌를 당한 것 같소.”

“이곳에서 오 년이나 살았어요. 시시비비는 가릴 줄 알아요.”

영십일은 적의를 품고 말했지만 월아는 오히려 이곳에 감사하고 있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면 서로 기분이 상한 채 헤어지게 될 것이다. 영십일은 잠시 감정을 삼키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법을 아시오?”

“모르겠어요.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었어요.”

“이곳이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는지는 아시오?”

월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주 오래됐어요. 한 이십 년에서 삼십 년은 되었을 거예요.”

영십일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랜 시간 존재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들킨 적이 없다니! 이건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아까 어떤 사람들은 주인의 명령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고 하지 않았소? 최근에도 나갔소?”

월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랬을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그를 껴안았다.

“그렇게 많이 묻지 말아요. 너무 많이 아는 건 당신에게 좋지 않아요.”

영십일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요? 나도 곧 임무를 하러 나갈 텐데… 많이 알아 두는 게 더 낫소.”

월아가 그의 품을 파고들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

“그러겠소.”

영십일이 말했다.

“노야께서 허락하셨으니, 앞으로 내 목숨은 두 모자의 것이오.”

월아는 그의 말에 보송보송한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영십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투덜거렸다.

“아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잖소.”

월아는 힐끔 곁눈질했다.

“바보. 당신 입술이 얼마나 달달한지 확인한 것뿐이에요.”

잠시 후에 그녀는 또 험상궂게 말했다.

“밖에 나가서 다른 여자한테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돼요! 알았어요?”

영십일은 오랜만에 그녀가 발톱을 세우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깊게 입을 맞췄다.

* * *

이 신비로운 곳의 이름은 도원곡. 묵용감도 처음 듣는 이야기었다. 이건 영십일이 월아에게 들은 말이었다. 월아가 한 말들은 사적인 이야기를 제외하고 그대로 묵용감의 귀에 전해졌다.

월아가 세뇌를 당한 건 아닐까? 이곳의 주인은 선일까? 아니면 악일까? 그는 큰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 아직은 이런 문제들을 판단할 수 없었다. 묵용감은 그날 도원곡의 주인을 만났을 때, 아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을 알아본 건 아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숙함을 느꼈다.

그가 방 관리와 함께 그곳에 갔을 때, 방 관리가 고한 뒤에도 그 사람은 아무 소리 없었다. 그 사람이 뱉은 첫 마디는 바로 이거였다.

“앉으시지요.”

그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았지만, 방 관리는 적잖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늘 평온한 표정을 짓는 방 관리의 표정 변화는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그 사람의 첫 마디 ‘앉으시지요.’라는 게 평범하지 않다는 걸 예리하게 깨달았다. 아마 발 뒤에 있는 그 사람이 그렇게 예의를 갖춰 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그의 신분을 아는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그는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말이 별로 없었지만 내뱉는 말속에서 마치 어떤 현묘함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은 대세를 장악할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동월의 황제라는 것을 알고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세상의 권세가를 무시할 만큼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떠날 때는 온전히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심지어 까만 천으로 눈을 가리지도 않았고 방 관리가 직접 배웅했다. 묵용감은 의아했다. 이렇게 큰 비밀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다니… 벌써 그들이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차는 평온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왠지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서 묵용감은 문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방 관리는 졸면서 그들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묵용감은 마차가 좁은 통로를 통과하고 있는 걸 보았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통로였다. 마차는 통로를 가득 메우며 그곳을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주 드문드문 작은 등잔불이 하나씩 나타났지만, 그 등잔불도 그리 밝지 않았다.

말은 마차를 이끌고 어둠 속을 유유히 지나가고 있는데 그게 퍽 익숙해 보였다. 이미 통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반대편에 앉은 영십일도 발을 들추더니 무언가를 본 것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묵용감은 그에게 눈짓을 했고, 두 사람은 아주 조용히 자리를 바꾸었다.

방 관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 같았지만, 묵용감은 그가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짐작할 것이라 여겼다. 방 관리가 반응하지 않는 건 일종의 묵인이었다.

마차의 반대쪽은 정말 상황이 달랐다. 지하 하천을 접하고 있었고 옅은 불빛에 의지하여 칠흑 같은 수면에 이따금 물결이 스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마차 지붕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묵용감은 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길이 너무 좁아서 마차 외에는 한 사람도 더 수용할 수 없었다. 그가 영십구에게 지붕에 올라가 보라고 암시를 보내는데, 방 관리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석회 동굴이어서 간혹 물방울이 떨어지곤 합니다.”

묵용감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석회 동굴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건 매우 기이한 자연 경관이었다. 그러나 석회 동굴은 일반적으로 남쪽 지방에 나타난다. 북쪽 지방에는 극히 드물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땅 밑에 이런 진기한 풍경이 숨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통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등잔불만 하나둘 눈앞에 번쩍이고 지나갔다. 묵용감은 의아했다. 석회 동굴은 원래 지형이 기이한 동굴인데, 어째서 이곳은 곧은 통로로 이어지는 걸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제야 이해되었다. 이 통로는 도원곡 주인이 출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과연 벽 위에는 형상이 제각각인 굴문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가 짐작하기론 이곳은 미궁처럼 되어 있고 이 통로만이 유일하게 도원곡을 드나드는 방법 같아 보였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들은 많은 모퉁이를 돌았다는 것이다. 모퉁이를 돌던 곳에 표시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온다면 길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그는 비로소 왜 방 관리가 그들이 내내 두리번거려도 모른 척 내버려 뒀는지 알 수 있었다. 본다 한들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길을 완전히 기억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주인이 여기에 진법을 설치해 놓았을 수도 있다. 그러면 동굴에 들어와도 도원곡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마차가 한참을 더 나아갔지만, 동굴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방 관리는 아예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약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말 잠이 든 것 같았다. 이런 태도는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그들이 무엇을 하든 이곳에선 소용없다는 것. 둘째,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잠을 자서 체력을 안배하는 것.

묵용감도 그를 힐끔 쳐다본 뒤, 눈꺼풀을 닫고 휴식을 취했다. 영십일과 영십구는 다른 한 사람이 눈을 감고 휴식하면 다른 한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경계했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다시 역할을 바꾸어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달그락, 달그락. 일정한 말발굽 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정말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살짝 뜬 그는 방 관리가 곤히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예 잠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나니 마차는 멈춰 있었고 영십구만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묵용감이 눈빛을 보내자 영십구가 대답했다.

“방 관리와 영십일은 배를 찾으러 갔습니다.”

배를 찾는다고? 묵용감은 서둘러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길이 너무 좁아서 자칫하면 깊은 강물에 빠질 뻔했다. 옆구리 방향에서 한 손이 나타나 그를 부축했다.

“황 노야, 조심하십시오.”

어둠 속에서 방 관리가 나타나더니 묵용감를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깨셨습니까?”

묵용감이 몸을 단단히 세우며 말했다.

“고맙소.”

방 관리가 말했다.

“배가 준비되었으니 황 노야께서는 배에 오르십시오.”

묵용감은 그제야 칠흑 같은 강물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폭은 매우 좁지만 길이가 길어서 네 사람이 모두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마부는 방 관리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더니 마차를 몰고 돌아갔다.

이제 보니 마차는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석회 동굴을 오가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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