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9화
백천범이 대답하기도 전에 영십삼이 나서서 대답했다.
“저희 선생은 술을 드시지 않습니다.”
북방에 있는 몽달은 기온이 낮아 남녀노소 모두 술을 즐겼다. 그런 술을 즐기지 않는다고 하니 곤청락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 내가 선생에게 밥을 사 주겠네.”
백천범이 대답을 망설이는데, 도둑을 잡으러 갔던 수행원 두 명이 돌아왔다. 곤청락은 두 사람이 빈손으로 오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둑놈은? 못 잡았느냐?”
두 수행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 도둑놈 실력이 보통이 아니어서 도무지 잡을 수 없었습니다.”
곤청락은 차갑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본 전하의 체면을 아주 잘 세워 주는구나!”
잠시 말없이 서 있던 곤청락은 시선을 영십삼에게 돌린 뒤 물었다.
“그 도둑을 왜 붙잡지 않았지?”
영십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자는 몸놀림이 재빨랐습니다. 전 선생이 걱정되어서 그와 더 겨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물건을 되돌려 받았는데 뭐 하러 끝까지 쫓아가겠습니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곤청락은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내가 선생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네. 만약 선생이 나를 친구로 여긴다면 거절하지 마시게.”
곤청락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백천범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원래는 더 큰 것을 위해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너무 지나치게 밀어내는 것도 좋지 않았다. 기회가 왔을 때 움켜쥐는 것이 더 나았다.
“전하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소인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따르겠어요.”
“그러면 어서 가세.”
곤청락이 청하는 손짓을 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바로 패륜이에서 유명한 동래순東來順이 있네. 내가 양 통구이를 대접하겠네.”
동래순에는 곤청락의 전용 별실이 있었다. 육황자 전하가 오시는 것을 보고 주인이 직접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손님들을 별실로 안내했다.
곤청락의 별실에 있으면 은은한 자단목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바닥은 사람이 비칠 정도로 깨끗했고 탁자 위에는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점원은 어깨 위에 놓인 새하얀 수건으로 탁자 위를 꼼꼼히 닦았다. 백천범이 영십삼에게 말했다.
“너도 같이 앉아.”
영십삼은 그녀의 말대로 탁자 앞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무표정을 한 그는 꼭 말뚝 같았다.
몽달은 신분 등급 제도가 엄격하여 종과 상전이 한자리에 앉지 않았다. 곤청락은 비록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그 역시 여러 친구를 사귀길 좋아했고 때론 규율을 따지지 않았다. 이 선생이란 자도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분명 상투적인 규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일 터.
양 통구이가 바로 올라왔다. 뜻밖에도 어린 양이었다. 작은 양 한 마리가 커다란 접시에 놓여 있었다. 온몸에 기름기가 반지르르했다. 어린 양은 눈을 감고 있어 꼭 잠이 든 것 같았다. 백천범은 보기만 해도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점원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고기를 발라냈다. 어느새 매미 날개처럼 얇은 양고기 한 조각이 쟁반에 올려졌다. 마치 목수가 대패질로 목화木花를 만들어 내듯 반투명하고 돌돌 말린 양고기가 하얀 접시에 올려졌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먹음직했다.
점원은 솜씨가 능숙했다. 그는 잽싸게 양고기를 발라냈고 마지막에 남은 양 뼈를 바구니에 담아 나갔다. 계속해서 다른 점원들이 신선한 야채 잎, 당근 채, 각종 간장 그릇, 볶은 쌀, 밀가루, 다진 땅콩, 기름떡, 과일 튀김, 생과일을 내어 왔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차 한 주전자도 빠지지 않았다.
패륜이에 온 지 며칠 되었지만 이렇게 성대한 식사는 처음이었다. 곤청락은 얇은 밀가루 피를 손에 받쳐 들고 야채 잎, 당근 채를 깔더니 땅콩 부스러기와 볶은 쌀, 튀긴 과일을 올렸다. 이내 양념과 구운 양고기 몇 조각을 넣고 손가락 두 개로 내용물을 말았다. 그리곤 그것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백천범은 먹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대범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그를 따라서 밀가루 피 안에 각종 야채와 양고기를 넣고 잘 싸서 한 입 베어 물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맛있지는 않았다. 곤청락는 그녀가 눈살을 약간 찌푸리자 웃으며 말했다.
“선생, 양념장 넣는 것을 잊었네.”
백천범은 그제야 곤청락이 밀가루 피 안에 시커먼 양념을 넣었다는 걸 떠올렸다. 이번엔 양념을 듬뿍 넣어 먹으니 더없이 맛있었다. 과연 범상치 않은 맛이었다.
* * *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영십일은 그전에 월아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그가 지붕 위에서 기와를 뜯자 월아가 곧장 고개를 들었다.
“문이 있는데도 기어이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무슨 도둑놈이에요?”
영십일은 뛰어내린 후 헤헤 웃었다.
“저들에게 들킬까 봐 그런 거 아니오?”
“지붕 위로 다니면 그들이 당신을 못 볼 줄 알아요?”
월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마치 그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째서 또 왔어요? 규율은 다 잊어버렸어요?”
영십일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난 그런 엉터리 규율은 모르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해서 당신을 만나러 왔소.”
그는 마른 입술을 핥은 뒤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아이도.”
그제야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본 월아는 그가 한 번 고생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괜한 고생이에요.”
영십일은 쪼그려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과 아이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오. 내 비록 이곳을 나가지만, 꼭 데리러 올 테니 날 기다리시오.”
월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를 약간 떨었다. 순간 반짝이는 두 방울이 영십일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는 벌에 쏘인 듯 몸을 움찔하더니 월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이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은 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목이 메여 쉰 목소리로 말했다.
“꼭 날 기다려 주시오.”
그가 월아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걸 영십일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오래 있는데도 방 관리가 찾아와 그를 내쫓지 않았다. 원래 그는 몇 마디 말만 하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를 품에 안고 있으니 가기 싫은 생각이 들었다. 월아가 웃으며 그를 놀렸다.
“난 당신이 대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쩜 이렇게 수다스럽고 걱정이 많아요?”
영십일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혈기 왕성한 사내로 월아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으니 체면이 영 서질 않았다. 그는 온종일 그녀 생각뿐인데, 그녀는 오히려 대범했다. 그는 도통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늦었으니 얼른 쉬시오. 난 이제 가겠소.”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누군가 뒤에서 끌어당겼다. 뒤돌아 보니 월아가 그의 허리띠를 붙잡고 미소 짓고 있었다.
“화났어요?”
“아니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소?”
월아는 피식 웃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의 허리띠 매듭을 풀어헤쳤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무얼 하는 건지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뭐 하는 거요?”
월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쉬어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옷 갈아입는 걸 시중들게요.”
영십일은 억울했던 마음이 풀려 버렸다.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이 요물!”
요물이 그를 보며 눈웃음을 쳤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눈썹을 덧그렸다.
“내가 당신을 잡아먹을까 봐 두렵지 않아요?”
“이미 내 목숨은 당신 것이요. 먹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월아는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십일 나리의 입에 이리 꿀이 발려 있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영십일은 이제 저도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달콤한 건 먹어 봐야 안다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월아가 아프지 않게 그의 등을 한 번 때렸다.
“내가 놀리는 걸 좋아하면 어떡해요? 체면도 없이!”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서로를 갈망했지만, 아이를 생각해서 감히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영십일은 월아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만나지 못한 사이에 그녀의 어깨가 둥글어진 듯하여 그가 살짝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살이 좀 쪘군.”
월아는 성질을 부렸다.
“매일 몸을 보양하는 탕약을 마시는데 살이 안 찔 수 있겠어요?”
영십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저들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제 보니 저들도 아이를 소중히 여기어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는구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저들이 왜 우리 아이를 이렇게 중요시하는 거요?”
월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는 장차 큰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영십일은 의아했다.
“아직 낳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큰일을 할지 알 수 있소?”
“상갑 등급의 아이는 주인이 직접 가르치고 다 크면 이곳을 나가요.”
“이곳을 나가서 무엇을 하오?”
“임무를 수행해요.”
“무슨 임무?”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아이들이 돌아오기는 하오?”
월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우리가 알 수 없어요.”
“그래도 우리 아이인데… 당신은 걱정되지도 않소?”
“아이가 크면 어미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게 당연해요. 주인께서 잘 돌봐 주실 거예요.”
영십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주인이란 말이오! 당신한테 이런 짓을 하는데도 주인을 믿소?”
월아가 눈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봤다.
“주인에게 불경하게 굴지 말아요.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어요. 다 내가 원한 거예요. 주인께서는 큰일을 하시고 계세요. 우리는 그저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거예요.”
“그가 대체 무슨 큰일을 한다는 거요?”
월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주인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여기에서는 모두 그를 존경해요.”
영십일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당신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다는 거요?”
“지난번에 나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죠? 내가 나가기 싫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 이곳을 나가기 싫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