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8화
며칠째 묵용감의 소식은 하나도 들을 수 없었지만, 백천범은 분명히 묵용감이 패륜이에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드넓은 몽달을 어찌 그녀가 다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녀는 패륜이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백천범은 영십삼에게 말했다.
“듣자니 육황자가 문객을 많이 받는다고 해요. 저도 한번 가 보고 싶어요. 만약 문객들 속에 섞여 들어간다면 다른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영십삼은 미간을 찌푸렸다.
“선생,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육황자는 호탕하고 사교적인 사람인 것 같지만, 제 발로 찾아온 낯선 이는 반드시 철저하게 조사한답니다.”
백천범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말도 일리는 있네요.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방문하지 말고, 그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칼을 빼 들고 도와주는 것이 어때요?”
“그러니까 선생의 말씀은……?”
백천범은 자신이 생각해 낸 계획을 쭉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영십삼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그렇게 하려면 저와 십오 모두 곁을 비우고 십육만 멀리서 선생을 호위해야 하는데, 소인은 혹시라도…….”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요. 호위하는 건 십육 한 명이면 충분해요. 게다가 십삼은 금방 돌아올 거잖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영십삼은 말없이 잠시 침묵했다. 그는 황실의 근위로서 황후를 지키는 것이 그의 책무였다. 그는 황후에게 약간의 위험도 무릅쓰게 할 수 없었다. 백천범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십삼은 저를 잘 모르죠? 저는 사전에 방비를 철저하게 하는 사람이에요.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건 제 자신을 지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젊었을 때, 먼 길을 떠났던 경험도 있어요. 게다가 지금은 십삼과 십오 그리고 십육이 곁에 있으니 두려울 게 없어요.
자기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아야 백전백승할 수 있어요. 비록 상대의 의도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무엇이라도 알아 두면 좀 낫지 않을까요? 어때요?”
그녀는 허세가 없는 황후로 여태껏 누구에게도 고압적인 태도를 취한 적 없었다. 그녀는 말할 때도 항상 의논하는 어투를 사용했다. 영십삼은 그녀의 곁을 자주 지키진 않았지만, 그녀에 대해 들은 바는 많았다. 그녀는 연못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며, 종종 황제를 따라 임안성 시내를 거닐었다. 이번 행군을 따라와서도 여태껏 힘들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존귀한 신분인 황후이기에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황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몽달의 권력자와 관계를 맺어 두는 건 분명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한참 침묵하던 그는 백천범이 아직도 그의 동의를 바라고 있는 걸 보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선생의 말씀대로 해 봅시다.”
다음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붉은 태양이 하늘에 높이 걸려 있어 여전히 추위는 가시지 않았지만 햇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한 날이었다.
백천범은 두툼한 오자襖子(안을 덧댄 중국식 상의)를 입고 긴 의자에 앉아서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곤 길 건너편에 있는 보석 가게를 응시했다. 몽달의 육황자 곤청락昆清珞이 그곳으로 들어간 지 한참 지났으니 이제 나올 때가 되었다.
과연, 시종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먼저 나오자 곤청락이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수행원을 네 명이나 데리고 다녔다. 그중 한 명은 물건을 한 보따리나 들고 있었다. 분명 그가 방금 산 보석 장신구일 것이다.
백성들이 보기에 육황자 곤청락은 성격이 호탕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에 문객이 삼천 명이나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지만, 곤청락은 능력이 있는 자라면 그들에게 예를 갖췄다.
조정에도 그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태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약관의 나이를 넘긴 황자는 왕에 봉하고 저택을 하사받아 관아를 관장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육황자도 일찍이 저택을 하사받았지만, 왕으로 봉해지진 않았다. 황제가 하사한 저택의 이름은 화양부華陽府였다. 사람들은 사석에서 장래에 육황자가 받을 봉호가 ‘화양왕’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지만 그건 정말 추측일 뿐이었다. 몽달의 규율에 따라 왕에 봉해진 황자는 황위에 오를 자격을 잃는다. 육황자가 왕에 봉해지지 않고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앞으로 몽달의 천하를 누가 가질지 알 수 없었다.
태자 곤청각昆清玨은 계후繼后(본래 황후의 뒤를 이은 황후)가 낳은 아들이다. 원후元后(황제의 본래 황후)도 아들을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네 살이 되었을 때 병으로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도 병사하고 말았다. 그 후, 황제는 계후를 맞이했고 곤청각을 낳았다. 이상하게도 계후는 곤청각이 두 살 때 죽고 말았다.
황제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세 살에 태자로 세웠다. 몽달은 적자를 매우 중시하기에 모후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태자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태자는 능력이 출중했다. 형제 중에서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황제의 정무를 곁에서 도왔다. 조정에는 그를 옹호하는 관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 육황자는 왜 태자와 관계가 좋지 않을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육황자는 용상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연히 태자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그는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파벌을 만들어 몰래 태자와 대립했다.
황제도 그의 행태를 눈감아 주는 것을 보면 그에게 동조하는 것 같지만, 태자는 동궁을 지켜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기에 조정에 기반이 탄탄했다. 태자를 폐위하는 건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 부자의 관계는 미묘했지만 겉으론 화기애애해 보이니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백천범은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천자의 가문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력이 하늘에 닿을 만큼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암투가 끊이질 않고 책략이 난무했다. 묵용감은 그녀 한 명만을 아내로 맞이했기에 후궁의 암투가 없었고, 두 아들만 두었기 때문에 부자간에 얽히고설킨 권력 싸움이나 형제의 상잔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백천범이 찻값을 놓고 영십삼과 일어나 걸어가는데, 마침 곤청락이 가마 앞에 이르렀다. 시종이 가마 발을 걷자 곤청락은 허리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 사람이 튀어나와 시종이 들고 있던 보따리를 빼앗아 달아났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곤청락의 수행원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순간 영십삼은 그 도둑을 뒤쫓았고, 그제야 곤청락의 수행원 두 명도 그 뒤를 쫓아갔다. 곤청락이 안색을 붉히며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눈먼 놈이 본 전하本殿下의 물건을 빼앗아 간 것이냐!”
백천범은 즉시 길가로 물러섰다. 그녀가 움직이자 곤청락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방금 제일 먼저 도둑을 쫓은 자가 저자의 수행인 걸 떠올리고, 그는 곁에 있던 수행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백천범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도와줘서 고맙네. 귀하의 성명이 어떻게 되는가?”
백천범은 얼른 공수한 손을 들어 올렸다.
“저의 성씨는 전… 전범이라고 합니다. 저에게 예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제 수행원은 좀도둑을 아주 싫어해서 눈에 띄면 꼭 이렇게 혼쭐을 내야 하죠. 전하께서 괜한 참견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어찌 괜한 참견이라 생각하겠는가? 나쁜 일을 겪은 사람을 만난다면 칼을 빼 들고 돕는 것이 영웅의 본성이네. 본 전하가 평생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영웅이라네.”
잠시 머뭇거린 육황자는 그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대는 본 전하를 아는가?”
백천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전하를 오늘 처음 뵈어요. 제가 어찌 전하를 알겠어요? 다만, 방금 전하라 자칭하시니…….”
곤청락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방금 자신을 전하라 자칭한 건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사방팔방에서 사람들과 교류를 하니 그를 알아봐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화하던 중, 영십삼이 돌아왔다. 그의 손엔 빼앗겼던 보따리가 있었다. 아무 표정 없이 그는 곤청락의 수행원에게 보따리를 던지며 말했다.
“없어진 건 없나 살펴보시오.”
영십삼은 곧장 백천범 곁에 섰다.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은 수행원은 자세히 살핀 후 말했다.
“없어진 건 없습니다.”
그런 후에 보따리를 잘 묶어서 손에 들었다. 영십삼은 백천범을 돌아보고 말했다.
“가시지요.”
백천범은 곤청락을 향해 공수했다.
“아무 문제 없다니… 저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그녀가 영십삼을 데리고 걸어가는데 곤청락이 뒤에서 그녀를 불러세웠다. 백천범은 영십삼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곤청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하, 더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곤청락는 영십삼을 훑어봤다.
“아직 어린 형제와 대화를 나누지 못했는데…….”
영십삼은 냉담한 표정을 하고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곤청락의 수행원이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이분은 육황자 전하이시다!”
백천범이 다급하게 예를 취했다.
“육황자 전하이셨습니까? 소인이 패륜이에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육황자 전하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곤청락이 여전히 영십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급히 말했다.
“이자의 이름은 십삼입니다.”
곤청락이 미간을 찌푸렸다.
“성은 무엇인가?”
“저의 집안 노비이니 당연히 성씨는 전입니다. 전십삼입니다.”
군청락이 짧게 소리를 내며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선생의 말투를 들어보니 몽달인이 아니군.”
백천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동월에서 왔습니다.”
“몽달에 온 이유는?”
“소인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의 풍습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합니다. 몽달에 오기 전에는 남원에 다녀왔죠.”
곤청락의 눈이 반짝였다.
“신비한 나라 남원 말인가?”
“네, 맞습니다.”
곤청락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선생, 나에게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는가?”
곤청락은 대로에 서서 말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곧장 말을 이었다.
“내가 술을 한 잔 사겠네.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