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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16)화 (915/1,192)

제916화

영십구가 서둘러 묵용감을 쫓아 나왔다. 묵용감은 지붕 위에서 커다란 유리 등불을 바닥에 던져 깨뜨리고 있었다.

몇 차례 와장창 하고 큰소리가 나더니 땅바닥은 온통 유리 파편으로 반짝였다. 밖으로 나온 영십구를 발견한 묵용감은 손가락으로 안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뭐 하러 따라 나온 것이냐! 어서 들어가서 지키고 있거라.”

묵용감이 멀리 가지 않은 것을 확인한 영십구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입 주변이 피범벅이 되어 있는 영십일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혈도를 짚었을 때 가려움을 견디기 위해 입술과 혀를 깨물었던 것이다. 영십구는 얼른 소매를 걷어 올리고 영십일에게 팔뚝을 내밀었다.

“십일 형님, 아프면 차라리 나를 물어요.”

한편 묵용감이 밖에서 등불을 다 때려 부수자 방 관리가 얼른 찾아왔다. 그는 지붕 위에서 노기등등한 남자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황 노야, 왜 이러십니까? 지붕 위 등불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묵용감이 고압적인 태도로 냉랭하게 말했다.

“등불에는 문제가 없네, 날 거슬리게 한 건 바로 방 관리… 당신이지.”

방 관리가 담담하게 웃었다.

“저는 관리자로서 여러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안 드셨는지요. 황 노야께서 정확하게 알려 주시겠습니까?”

묵용감이 몸을 날려 그의 앞에 내려선 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해독제를 내놓게.”

방 관리는 불을 밝힌 방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십일 나리의 일 때문이군요.”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약은 그가 스스로 빼앗아 먹은 것입니다. 저는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월아를 대신해 벌을 받겠다고 한 이상,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여인을 위해 행동한 건 잘못한 게 아니지.”

묵용감이 말을 이었다.

“잘못한 건 자네일세. 이렇게 위험한 약을 임신한 여인에게 먹이려고 하다니. 너무 비겁한 처사가 아닌가?”

“그 약은 매우 신통합니다.”

방 관리가 설명했다.

“강한 사람이 먹으면 약효가 강해지고, 약한 사람이 먹게 되면 약효가 약해집니다. 만약 월아가 먹었다면 이렇게 고통이 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연히 아이를 다치게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겁니다.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묵용감은 그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약효가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한 약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신비스러운 약제였다. 아니, 신비스러운 게 약제뿐일까. 이곳엔 그런 것들이 가득했다. 그는 신비로운 이곳의 주인을 떠올렸다.

“이곳의 주인을 만나고 싶네.”

방 관리는 그의 요구를 생각도 않고 일축해 버렸다.

“그 요구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지?”

“주인께서는 외부인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방 관리는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간이 지났으니 십일 나리의 고통도 끝났을 겁니다.”

그는 품 안에서 작은 사기병을 꺼내 묵용감에게 건넸다.

“이건 상처에 특효가 있는 약입니다. 상처에 바르면 빨리 나을 겁니다.”

묵용감은 작은 사기병을 받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방 관리를 보며 그가 툭 던지듯 말을 뱉었다.

“자네들이 몽달을 상대하는 것을 내가 도울 수도 있네.”

방 관리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네들이 오랫동안 동월의 백성들을 납치한 이유는… 동월이 몽달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길 바라는 것 아닌가?”

방 관리는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느릿느릿 다가왔다.

“왜 우리를 도와주려는 겁니까?”

“이유는 세 가지네. 하나, 나는 해독제를 원하네. 둘, 자네의 주인을 만나고 싶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몽달은 항상 북쪽 국경에 사는 백성을 괴롭히니 저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고 싶었네만.”

세 가지 이유가 상당히 그럴듯했다. 방 관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주인께 일단 황 노야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만약 주인께서 노야를 만나길 원하시면 내일 와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와 보니 이미 잠잠해진 상황이었다. 영십일은 축 늘어진 채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영십구은 손수건으로 등에 가득한 핏자국을 닦아 주고 있었다. 묵용감은 약병을 던지며 말했다.

“방 관리가 준 약이다. 네가 대신 발라 주거라.”

영십구는 방 관리가 줬다는 말에 의심부터 들었다.

“노야, 이 약은…….”

“발라 주거라.”

묵용감이 말했다.

“영십일이 죽으면 그에게도 좋을 게 없다.”

* * *

다음날 오전, 방 관리는 묵용감을 데리고 주인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묵용감은 이곳 주인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방 안 가운데에 두꺼운 발이 드리워져서 발 뒤에 있는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목소리만으로는 발 뒤에 있는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젊은 사람인지 노인인지 전혀 판단할 수 없었다.

단지 남자인 건 분명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금석처럼 단단했고 기력이 충만한 것이 낭랑하고 맑은 음성이었다.

“나를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무슨 일이죠?”

묵용감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 시종을 위한 해독제를 원하오. 방 관리가 주지를 않으니 그의 주인을 직접 찾을 수밖에.”

발 뒤의 남자는 잠시 침묵한 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해독제를 원한다면 대신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해독제를 원합니까?”

“말해 보시오. 해야 할 일이 무엇이오?”

그 남자는 또 잠시 침묵에 빠졌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일단 돌아가 있으십시오. 때가 되면… 자연히 누군가가 할 일을 알려 줄 것입니다.”

방 관리가 다가와 묵용감에게 자신을 따라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묵용감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맹렬하게 팔을 들어 올리며 발을 힘껏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두꺼운 문발이 통째로 떨어졌고, 발 뒤에 있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남자는 커다란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다리에는 두꺼운 담요를 덮고 있었고 검은 장포를 입고 있었다. 양손도 모두 옷소매 안에 넣어서 온몸이 꽁꽁 싸여 있었다. 머리에는 흑요석으로 장식한 관을 둘렀고 얼굴에는 금빛 가면을 쓰고 있었다.

묵용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그 남자는 별 반응 없이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었다. 금색 가면에 뚫린 구멍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만 쏘아져 나올 뿐이었다.

묵용감은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네 명이 남자의 앞을 막고 칼을 뽑더니 곧장 그에게 겨누었다. 그들은 몸 전체에서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네 사람 모두 무공이 범상치 않아서 혼자 넷을 상대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게다가 어두운 곳에 이런 자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방 관리는 그의 무례함에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다시 한번 나가자고 청하는 손짓을 했다. 묵용감은 주인이라는 그 남자를 힐끗 쳐다본 뒤, 몸을 돌려 방 관리를 따라 나갔다.

방 관리는 다른 사람을 붙여 묵용감을 숙소까지 안내하라고 명했다. 그리곤 그는 다시 주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 안에는 남자 혼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방 관리는 소리 없이 예를 취한 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자를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는 천선지인天選之人이구나.”

방 관리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하늘이 선택한 자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천선지인에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방 관리는 침묵에 잠겼다가 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이 가능한 빨리 저들을 이곳에서 내보내겠습니다.”

* * *

세 명의 시위를 데리고 패륜이로 들어간 백천범은 한 객잔에 방을 잡았다. 남자 네 명… 게다가 그중에 두 명은 똑같이 생겼기에 너무 눈에 띄었다. 영십삼은 안전을 위해 십오와 십육을 암위로 바꿨다.

패륜이는 몽달의 도성이었다. 당연히 백천범이 이제까지 지나온 성읍보다 훨씬 번화한 도성으로 건축물은 모두 네모반듯하고 예스러우면서도 대범한 기개가 느껴졌다. 유일하게 사찰만이 다채로운 색채로 장식되어 있었고 화려한 조각과 기둥이 우뚝 서 있었다.

산 위에 지어진 사찰이라니. 백천범은 처음 보는 광경에 너무도 신기해 몇 번이나 둘러보았다. 마침 몇 명의 승려들이 사찰에서 나왔다. 그들은 머리를 빡빡 깎지 않고 반 치 정도 되는 머리카락을 남겨 두었다. 그들은 안에는 백색 장포를 입고, 겉에는 붉은색 단포短袍를 걸쳤다. 어깨 반쪽을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 홍백의 대비가 잘 어우러져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성안 도처에서는 말과 양 그리고 낙타가 걸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낙타의 방울 소리가 여유롭게 들리다가도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어우러졌다.

백천범은 소문을 알아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는 얼른 객잔에 짐을 풀고 영십삼을 데리고 다루茶樓로 갔다.

몽달에는 사람만큼 소와 양이 많아서 항상 우유차를 마셨다. 점원은 커다란 쇠 주전자를 들고 다녔다. 그 쇠 주전자에는 가늘고 뾰족한 입이 달려 있어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정확하게 찻잔을 채울 수 있었다. 새하얀 찻물이 허공에 호를 그리며 날아갔고 백천범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우유차는 걸쭉했다. 아주 달콤한 향기가 났으며 맛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백천범은 두 모금을 마시고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단숨에 찻잔을 비웠다.

찻집 안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시끌벅적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지막하게 속삭였고, 어떤 사람들은 목청을 높여 큰소리로 논쟁했다. 점원들이 찻주전자를 들고 식탁 사이를 오가자 떠들썩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때 한 점원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양 잡기 대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객관 여러분께서는 내기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참여하시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백천범이 들어보니 옆 탁자에서도 논쟁을 하고 있었다.

“올해 양 잡기 대회는 정말 볼 만하대. 태자께서 직접 참여해 양을 잡는다지? 황상께서도 오실 거야.”

다른 사람이 이어 말했다.

“태자 전하도 대단하지만, 지금까지 육황자께서 해마다 우승하지 않았는가? 최후에 누가 깃발을 차지할지는 알 수 없지.”

“그러니 올해 양 잡기 대회가 정말 볼 만할 거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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