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5화
묵용감은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바로 앞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울타리가 있었다. 반원형으로 둘러진 울타리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꼭대기 너머로 평평한 지붕이 보였다. 잠시 뒤, 눈을 뜬 영십일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노야, 방향이 틀렸습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괜찮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한번 보고 오너라.”
영십구가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울타리 한가운데에 문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졌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더 멀리에는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영십구가 다시 돌아와 묵용감에게 고했다.
“노야,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묵용감도 입구로 걸어갔다. 그들은 분명 묵용감 일행을 봤음에도 못 본 척 행동했다. 눈빛은 텅 빈 채 공허했고 머리도 덥수룩했다. 해진 옷을 입은 이들은 앉아 있거나 또 누워 있기도 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이를 잡아 주기도 했다. 잡은 이를 입에 넣고 두어 번 씹어 삼키는 걸 보니 정상은 아닌 듯했다. 묵용감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영십구가 서둘러 그를 막아섰다.
“노야, 소인이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영십구는 천천히 사람들 곁으로 갔다. 그들에게 말을 건네 보았지만 아무도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그들은 여전히 그의 말을 묵살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은 계속 넋을 놓았고, 이를 잡는 이는 계속 이만 잡았다. 영십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귀가 멀고 말을 못한다고 해도, 눈이 먼 건 아닐 텐데. 어찌 이렇게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지?”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쪼그려 있는 사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보시오. 당신들은…….”
그러자 그가 영십구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한껏 드러낸 게 도발을 당한 맹수처럼 포악했고 눈에는 광기가 번득였다. 영십구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급히 일어난 탓에 몸이 뒤로 기우뚱 쏠렸다. 다행히 이번엔 빠르게 반응해 몸을 회전하며 안정적으로 착지했지만, 품 안에 있던 걸 흘리고 말았다.
오늘 아침에 먹다 남은 전병이었다. 점심때까지 돌아오지 못할까 봐 남은 전병을 품 안에 넣어 둔 것이다. 그걸 본 사내는 그를 내팽개치더니 전병을 향해 돌진했다. 아니…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전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앞쪽에 있던 이들은 밑으로 깔리고 뒤쪽에서 달려온 이들은 겹겹이 그 위로 몸을 포갰다.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쌓인 사람들은 서로 손을 내밀며 전병을 빼앗으려 아우성을 쳤다.
그 모습에 놀란 묵용감 일행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고작 전병 반쪽을 얻자고 이렇게까지 다투다니… 다들 밥을 먹지 못한 지 오래란 말인가?
가장 위에 있던 이는 손이 닿지 않아 조급해했고 밑에 깔린 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서로 폭행하기 시작하자 산더미처럼 쌓였던 인간 탑은 산산이 무너졌고 결국 가장 밑에 깔려 있던 사람이 드러났다. 그는 전병을 힘껏 쥔 채 헐떡거렸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곧장 전병을 빼앗으려 돌진했고 전병 부스러기가 풀밭에 마구 흩어졌다. 뒤이어 무수히 많은 손이 부스러기를 줍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부스러기인데도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풀과 모래알까지 함께 쥐어 입안으로 마구 쑤셔 넣었다.
전병 절반 이상이 부스러기가 되어 떨어졌다. 그러자 가장 처음 전병을 쥔 사람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내 성이 난 모습으로 가장 가까운 사내에게 돌진했고 마치 소싸움을 하듯 서로 맞붙어 싸웠다. 손에 쥐어진 전병은 전부 다 부스러기가 되어 땅에 뿌려졌고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주먹질과 발길질로도 모자라 입을 벌려 상대를 깨물기까지 했다.
묵용감은 이런 난장판은 난생처음이었다. 저들은 마치 인간이 아니라 굶주림에 허덕이는 늑대 같았다. 영십일이 작게 속삭였다.
“노야, 저자들은 정상이 아닌 듯합니다.”
영십일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저들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만난 것이라고는 전부 좋은 것들뿐이었다. 푸른 산과 맑은 물, 예쁜 여인과 귀여운 아이들, 근면 성실한 청년들, 살갑게 대하는 방 관리, 무릉도원 같은 풍경들까지.
그런데 이곳 사람들을 보니 완벽한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보니 번지르르한 것들 아래에 이곳의 실체가 숨어 있던 것이다. 영십구가 말했다.
“노야, 아무래도 이자들은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으니 그만 가시지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들은 이미 전병 쟁탈전을 끝내고 싸움을 멈춘 상태였다. 그리곤 적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묵용감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어서 가자.”
세 사람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이 묵용감 일행을 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바보 무리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묵용감이 눈짓을 보냈다. 세 사람은 힘껏 발을 굴려 공중회전으로 문을 넘어갔다.
놀라운 점은 문 앞까지 쫓아온 이들이 다들 그 자리에 멈춰 섰다는 것이다. 분명 밖으로 나와 계속 그들을 쫓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한 사람도 감히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묵용감은 삼 척 밖에 선 채 옷깃을 털며 말했다.
“전병이 먹고 싶은 것이냐? 하면 이리 나와 보거라.”
그들은 전병이라는 말에 눈을 번득이며 갈망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문을 넘진 않았다. 영십구가 그들을 놀렸다.
“나와 봐, 나오면 전병 줄게.”
그들은 초조한지 손을 비비고 발을 굴렸지만, 제자리걸음만 하며 그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냐?”
영십구가 물었다. 그러자 누군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규율.”
영십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규율이라고?”
묵용감이 물었다.
“누가 정한 규율이냐?”
“주인, 규율.”
어젯밤 수아와 월아, 방 관리도 영십일에게 주인의 규율을 언급했다. 그리고 지금 이 바보들마저도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이곳의 모든 이들은 주인을 몹시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가 먼 곳을 내다보며 근심에 잠겼다. 그리 신비로운 주인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곳은 왜 만든 것이고? 또, 어째서 동월이 몽달을 치게 하려는 것인가? 대체 그 목적이 무엇이길래?
* * *
사흘 뒤, 만월의 밤이 되었다. 방 관리의 말처럼 영십일은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가려워서 칼로 그 부위를 잘라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디가 가려운지 꼭 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마치 수많은 개미 떼가 몸속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오장육부를 파고들고, 뼈마디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경락을 타고 이동하는 것처럼…….
그의 안색은 시뻘게졌다가 다시 창백해지길 반복했고 닭똥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참을 수 있었으나 점점 너무 간지러워서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영십일은 숨을 헐떡이며 입고 있던 옷을 모두 찢어 버렸다. 남은 속바지 한 벌도 갈기갈기 찢겨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몸 곳곳에는 피가 맺힌 손톱 자국이 남았고, 손톱 사이에는 온통 찢긴 살점이 가득했다.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영십구는 참혹한 그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묵용감이 소리치며 그를 저지했다.
“어디를 가느냐?”
영십구는 분한 듯 소리쳤다.
“소인이 방 관리에게 가서 해독제를 받아 오겠습니다.”
묵용감은 혈 자리를 짚어 영십일이 더 이상 제 몸을 긁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십일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간지러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가려움증이 죽기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묵용감에게 애원했다.
“노야, 소인이 긁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정말 가려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노야, 제발 저를 좀 풀어 주십시오! 노야!”
영십일은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엄격한 훈련을 받아서 보통 사람이 참을 수 없는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다. 잔인한 고문 앞에서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던 그였건만… 이런 기이한 가려움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했다.
묵용감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곳의 주인은 머리가 매우 비상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고, 의지를 꺾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의지가 누구보다 굳건한 사내마저 그의 앞에 이렇게 굴복했다.
영십일은 너무 괴로워서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입가를 타고 내려간 침은 명주실처럼 번들거렸고, 이따금 숨이 막혀서 눈알이 뒤집혔다.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이는 게 죽는 것보다 더 싫었지만, 그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영십일은 묵용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노야, 제발… 제발 저를…….”
묵용감은 곁을 지키는 사람을 항상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영십일의 꼴을 보고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는 눈을 감고 말했다.
“십일을 풀어 주거라.”
영십구가 재빨리 영십일의 혈 자리를 풀어 주었다. 그는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두 손으로 몸을 긁기 시작했다. 피부에 두 갈래의 깊은 상처가 생기더니, 피가 왈칵 솟구쳤다. 온통 새빨간 핏물이 너덜너덜한 살갗을 물들였다. 영십구는 깜짝 놀라 그를 붙잡았다.
“십일 형님, 좀 참아요. 이러다 죽겠어요.”
통증 때문에 가려움이 좀 가라앉았다. 영십일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을 수 없어. 난 월아를 만나러 가야 해.”
묵용감은 창가로 걸어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밝은 보름달이 하늘에 높이 걸려 있었다. 동그란 보름달은 마치 거대한 옥판처럼 밝게 빛났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십일, 조금만 참아라, 자시子時가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영십구에게 말했다.
“십일을 잘 돌봐라. 난 잠깐 나갔다 오마.”
말을 마친 묵용감은 문발을 걷어 올리고 나갔다. 영십구는 밖으로 나가는 묵용감을 바라보다가 곤란한 듯 다시 영십일을 바라보았다. 근위近衛라 함은 반드시 황제와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아야 하지만, 영십일도 옆에서 돌봐 줄 사람이……. 영십일은 제 몸을 벅벅 긁다가 그에게 호통을 쳤다.
“도대체 멍하니 서서 뭐 하는 짓이냐! 얼른 따라나서거라!”
영십구는 그를 보며 망설였다.
“십일 형님, 그럼 형님이…….”
“난 괜찮다. 얼른 따라가거라.”
영십일이 기력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비는 주인이 위험을 무릅쓰게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