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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14)화 (913/1,192)

제914화

약을 두고 다투던 두 사람은 그의 말에 곧장 동작을 멈추었다. 방 관리가 영십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월아에게 진심이십니까?”

“그렇소.”

“알겠습니다.”

방 관리가 말했다.

“그럼 저 약을 월아 대신 드시지요.”

“안 됩니다.”

월아가 반대했다. 방 관리는 그녀에게 서늘한 눈빛을 보내며 위엄 있게 명령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물러나거라.”

월아는 눈꺼풀을 드리운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영십일이 물었다.

“이 약을 먹으면… 월아와 혼인을 할 수 있소?”

“안 됩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에는 월아를 만나러 올 수 있게 해드리지요.”

영십일은 환약을 손에 쥔 채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곁눈으로 망설이는 듯한 월아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 또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죽거나 독에 중독되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그는 황실의 시위로서 그의 목숨은 오로지 묵용감 것이었기에 자신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먹으면 월아는 처벌을 면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가 먹지 않으면 월아가 먹어야 했다. 두 위험 중 덜 위험한 것을 골라야 했기에 영십일은 곧장 환약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월아는 영십일이 정말 약을 먹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곧장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붙잡았다. 그녀가 붉게 물든 눈으로 소리쳤다.

“미쳤어! 어서 뱉어요, 어서 뱉으라고요!”

영십일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그윽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아이를 낳으면 내가 데리러 오겠소. 당신을 다른 사내에게 보내지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월아는 입을 가린 채 목놓아 울었다. 영십일이 그녀를 품에 안고 가볍게 등을 쓸어내렸다.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우시오?”

영십일은 하늘이 두 쪽 난다고 해도 월아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 아니던가. 혼인은 치르지 않았더라도 그는 이미 월아를 자신의 아내라 여겼다. 남편 된 자가 어찌 아이를 가진 여인을 이 기이한 곳에 홀로 지내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방 관리에게 이끌려 다시 돌아가야 했다. 월아가 그에게 간절히 애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부드러운 말을 늘어놓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고집은 그만 부리고 먼저 돌아가요. 아이를 낳고 나면 당신이 오길 기다릴게요.”

영십일은 월아의 말이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애처로운 눈을 보니 가슴이 시큰거렸다.

영십일은 사랑하는 이로 인해 가슴이 아픈 게 어떤 기분인지 난생처음 깨달았다. 예전의 그는 강철 같고 무정한 시위들처럼 홀로 늙어갈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런 그에게 마음이 유약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또 한 여인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날 밤, 그는 벅찬 감동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방 관리가 월아의 아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니 그녀를 해치진 않을 것이다.

그가 할 일은 서둘러 황상을 도와 이곳의 비밀을 푸는 것이었다. 그 후에 이곳에 잡혀온 이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자신은 월아와 아이를 데리고 임안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가 방 관리에게 물었다.

“그 환약을 먹으면 어찌 되는 것이오?”

방 관리가 그를 흘깃거리며 물었다.

“무섭습니까? 드실 때 보니까 아주 용감하시던 걸요.”

“무서운 게 아니오.”

영십일이 말했다.

“그저 월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오.”

방 관리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나리의 체격이라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기껏해야 쓴맛을 조금 보시겠지요.”

“쓴맛이라니?”

방 관리가 얼렁뚱땅 대꾸했다.

“보름날 밤이 될 때마다 몸이 몹시 가려울 겁니다. 그때만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영십일은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게 다요?”

“예.”

방 관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답니다.”

영십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슴에서 또다시 불길이 일었다. 그가 별안간 방 관리의 팔을 낚아챘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강제로 약을 먹이려 하다니! 대체 무슨 수작이요?”

그는 방 관리의 팔을 잡고 꽉 쥐었다. 방 관리는 고스란히 통증을 느꼈지만, 용서를 빌진 않았다. 그가 담담히 대꾸했다.

“아이의 안위는 마음 놓으십시오. 이곳의 모든 아이는 매우 건강하고 안전하게 태어나며 지극 정성으로 돌보니까요.”

영십일은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내게 사실만 얘기하는 게 좋을 거요. 만약 내 여인과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거든 반드시 이곳을 없애 버릴 테니까.”

방 관리는 팔을 풀며 말했다.

“가서 전하십시오. 나리께서 새로운 여인을 받지 않으시겠다면, 다른 두 분 중 한 분이 반드시 여인을 받아야 한다고요.”

영십일은 아무 말 없이 길을 걷다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강제로 우리에게 여인을 보내는 이유가 아이를 갖게 하려는 것이오?”

방 관리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 * *

이튿날 아침, 영십일은 묵용감의 방으로 들어가 곧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노야, 소인이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묵용감은 태연하게 차를 들이켜며 곁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말해 보거라. 무슨 죄를 지었길래?”

“소인이 영 대인 댁에 들어간 이후로 소인의 목숨은 줄곧 노야의 것이었습니다. 한데 소인이 어젯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 여인 때문에 목숨을 버린 일을 말하려니 정말 난감했다.

“어젯밤 어쨌단 것이냐?”

묵용감이 물었다. 영십일은 이를 악물고 어젯밤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영십구는 묵용감 옆에 서서 놀란 눈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묵용감은 찻잔을 쥔 채 손가락으로 잔 표면을 쓸어내렸다.

“방 관리의 환약을 먹었단 말이냐? 한데 보름밤이 되어야 반응이 온다고?”

“예, 그렇습니다.”

“목숨을 잃는 건 아니겠지?”

“방 관리 말로는 목숨을 잃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그 방에 묵는 여인들을 보았느냐?”

영십일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곳에 묵는 여인이 아주 많은 듯했습니다.”

“그자들이 월아의 아이를 중시하는 것 같았느냐?”

“예.”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지난번 우리를 공격한 아이들의 숫자가 어찌 그리 많은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인 듯하구나. 저들이 밖에서 잡아 온 사내들에게 여인을 보내는 건 아이를 낳기 위해서였어. 한데 저리 많은 아이를 낳아 어찌하려고?”

탁자 주변을 한 바퀴 서성이던 그는 영십일이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자 발로 그를 가볍게 찼다.

“은애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나였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사내대장부로서 처자식도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넌 죄가 없으니 그만 일어나거라.”

영십일은 너무 부끄러워 꾸물대며 일어났다.

“소인의 목숨은 여전히 노야의 것입니다.”

묵용감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깊은 감명을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마음은 나도 다 안다. 그래도 네 목숨은 네 처자식을 위해 쓰거라.”

영십일은 밀려오는 감동에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더니 그에게 세 번 절을 올렸다. 영십구가 놀리며 말했다.

“십일 형, 따지고 보면 노야께서 형님의 인연을 맺어 준 것이니 도성에 돌아가면 중매에 감사 인사를 드리십시오.”

묵용감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면 이 노야도 감사주를 마실 날만 기다리고 있겠다.”

영십일은 두 사람의 농담에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이번 출전으로 부인과 아이까지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영십구가 제안했다.

“노야, 십일 형 말로는 발이 묶인 게 진법의 속임수라고 하니, 오늘 직접 가서 허실을 조사해 보는 게 어떠신지요?”

묵용감이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세 사람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굽은 회랑을 지날 때, 묵용감은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이곳은 정말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연 경관을 이용해 진을 친 걸 보면 절대 일반인이 한 짓은 아니었다.

“십일, 어젯밤에 갔던 길을 기억하느냐?”

영십일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젯밤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아가 든 희미한 불빛만 따라갔었다. 형체 없는 그림자가 줄곧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대낮인 지금… 집과 굽은 회랑, 풀과 나무의 형상만 보였기에 좀처럼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 영십구가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여길 다 망가뜨리는 게 어떠신지요. 그리하면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영십일을 바라보았다. 영십일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자신의 방 앞 계단 아래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묵용감과 영십구는 따라가지 않고 멀리서 그를 지켜만 보았다.

한참 뒤, 영십일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기에 속도는 느렸지만, 발걸음은 매우 확신에 차 있었다. 영십일이 커다란 나무를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자 영십구는 곧장 그를 불러 세우려 했다. 그런데 묵용감이 손을 들어 영십일을 제지했다. 이윽고, 영십일은 나무 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영십구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묵용감은 그를 당겼다.

“어서 가자.”

영십구는 서둘러 묵용감 뒤를 따랐다. 나무 앞에 선 그는 눈을 힘껏 깜빡였다. 믿기지 않은 광경이지 않은가? 분명 진짜 나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앞서가던 묵용감은 나무 안으로 발을 집어넣고 있었다. 진짜 나무가 아니라 속임수였다.

나무를 꿇고 나간 묵용감은 안쪽 풍경이 그들이 밖에서 보는 모습과 대체로 비슷하다는 걸 발견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보이긴 했지만 그건 영십일이 나아가는 방향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태연히 앞으로 걸어갔다. 벽을 뚫고 나가기도 하고, 한 무더기의 대나무를 뚫고 가기도 하고, 또 작은 개울을 건너기도 했다.

묵용감과 영십구는 그 뒤를 따르며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주변 풍경은 이제 매우 낯설었다. 그들이 지금껏 한 번도 온 적 없는 곳이었다.

그때, 영십일이 별안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몸을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다시 왼쪽으로 돌리길 세 차례나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오른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다시 앞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멈춰 서더니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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