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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13)화 (912/1,192)

제913화

영십일은 그녀가 곧장 그를 쫓아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뜨거운 열정을 품고 힘겹게 찾아왔는데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그런데 엄청난 기쁨 덕에 이러한 것들은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월아를 유심히 살피던 그의 시선이 그녀의 배에 머물렀다. 월아는 본능적으로 배를 가리고는 경계심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뭘 그리 보는 거예요?”

십일이 웅얼거리며 대꾸했다.

“듣자니 내 아, 아이를… 가졌다던데.”

월아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제 배에 있으니 당신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하지만… 난 아이의 아비가 아니오?”

월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중요치 않아요.”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가요.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큰일이라고요.”

“난 안 갈 것이오.”

영십일이 말했다.

“이 얘길 해 주러 왔소.”

그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늘어뜨린 두 손에서는 땀이 흥건했다. 그는 월아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당신에게 장가갈 것이오.”

그 말에 월아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들썩일 정도로 웃는 그녀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영십일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대체 뭐가 그리 웃긴단 말인가? 이번 생에 부인을 맞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지만, 그녀가 그의 아이를 가졌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 했다.

월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멈추었다. 웃음기가 서린 어여쁜 얼굴과 반짝이는 눈망울에 영십일은 마음이 요동쳤고 덥석 그녀를 품에 안았다. 월아는 곧장 발버둥 치며 낮게 호통쳤다.

“뭐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영십일은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차 월아가 그의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피가 새어 나와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영십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힘껏 입을 맞췄다. 월아도 조금씩 발버둥을 멈추었다. 그녀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미쳤어…….”

“맞소, 난 미쳤소.”

영십일이 순순히 인정했다.

“당신 때문에 미쳤소.”

월아는 천천히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가 망설이며 말했다.

“당신…….”

“난 그대가 좋소.”

월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영십일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이번엔 월아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다른 공간에서 입을 맞추는 순간이었다. 이 입맞춤은 욕정과는 무관했다. 영십일은 말솜씨가 좋지 못했기에 자신의 모든 진심을 입맞춤에 담았다. 월아도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서로의 입술이 떨어진 뒤, 영십일은 자신 때문에 붉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아는 그의 눈빛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녀에게서 어린 여인 같은 모습을 보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영십일은 순간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는 또다시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월아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서 가요. 들키면 정말 끝장이에요.”

영십일이 말했다.

“들키면 더 좋은 것 아니오. 어차피 당신에게 장가를 들 것인데.”

월아가 고개를 젓더니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요. 당신은 저한테 장가 못 와요.”

“어째서?”

영십일이 물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날 좋아하는데… 어째서 혼인하지 못한단 말이오?”

월아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그런 규율은 없어요.”

“무슨 규율?”

영십일이 성을 냈다.

“그런 규율을 누가 정했단 말이오?”

“주인이 정한 규율이요.”

영십일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주인이 누구요? 내가 좀 만나 봐야겠소.”

월아는 또다시 서늘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어서 가요. 어서 당신 방으로 돌아가란 말이에요!”

“안 가오.”

영십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함께 가지 않는 이상, 가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한참 두 사람은 대치를 벌였다. 그때 별안간 문발이 걷히더니 누군가 들어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나리께서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안으로 들어온 자는 영십일도 알고 있는 방 관리였다. 그가 먼저 입을 열려는데 월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몽유병인 듯합니다.”

방 관리는 영십일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몽유병인 듯하군. 놀라게 하지 말거라. 내가 데려다드릴 테니.”

월아가 가볍게 예를 갖췄다.

“관리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영십일은 서로 말을 맞추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가소로웠다. 그가 어찌 몽유병일 수 있겠는가?

“방 관리.”

그가 입을 열자 월아가 또다시 기침을 했다. 그녀는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슬쩍 눈짓을 보냈다. 영십일은 그녀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에겐 필요 없었다.

“방 관리, 부탁할 일이 하나 있소.”

방 관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몽유 중인 자가 부탁도 한단 말입니까?”

그가 월아에게 말했다.

“아이를 가졌으니 오래 서 있지 말고 앉아 있거라.”

월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에 앉았다.

“부탁하실 거 없습니다.”

방 관리가 말했다.

“뭐든 요구 사항이 있으시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영십일이 월아를 가리켰다.

“저 여인이 가진 아이가 내 아이 맞소?”

“예, 맞습니다.”

“하면 저 여인에게 장가를 가겠소.”

“…….”

“안 되오?”

“그것이.”

방 관리가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껏 그랬던 적이 없어서 조금 곤란하군요.”

영십일이 말했다.

“저 여인과 부부의 결실을 맺고 내 아이까지 가졌으니 장가를 가는 건 마땅한 일이오. 안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아마 이곳에 처음 오시어 아직 모르는 게 많으실 겁니다.”

“내가 모르는 게 있거든 알려 주면 될 것 아니오.”

“그것이.”

면전에서 캐물으니 조금 난처해하는 듯했지만, 방 관리는 예의를 잃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제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용서하시지요.”

“왜 알려 주지 못한단 말이오?”

영십일이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

“천하에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고?”

“규율에 따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날 밤에만 세 사람이 영십일에게 규율을 언급했다. 그는 성이 나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누가 정한 규율이오?”

“주인이 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당신들의 주인을 만나 봐야겠소.”

“인연이 닿는다면 만나 보시겠지요.”

수아부터 방 관리까지 다들 똑같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주인은 신비로운 자인 듯 그에 관해선 말을 아꼈다. 영십일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나도 내 규율이라는 게 있소. 내 여인은 내 곁에 두겠소.”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방 관리가 말했다.

“월아는 지금 아이를 가진 몸입니다. 태아를 위해 심신을 안정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하면 내가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 월아를 돌보겠소.”

“사내는 이곳에 묵을 수 없습니다. 그런 규율은 없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를 가진 여인은 저희가 아주 잘 돌봐 주니까요.”

“하면 내가 월아를 보러 오는 건 괜찮소?”

“아마… 힘들 듯합니다.”

영십일은 그의 요구가 전부 다 묵살 당하자 기분이 나빴다.

“아이를 낳은 후엔? 그땐 월아를 보러 와도 좋소?”

“그것이…….”

방 관리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만약 계속 이곳에 계신다면, 대략 삼 년에서 오 년쯤 뒤엔 다시 월아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면 그 삼 년에서 오 년 안에 월아에게 다른 사내가 배정되는 것이오?”

방 관리가 웃으며 말했다.

“예.”

영십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는 단번에 방 관리의 멱살을 잡아 제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월아가 놀라 소리쳤다.

“멈추세요!”

영십일은 오히려 더 세게 쥐었다. 목이 점점 더 조여왔지만 방 관리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영십일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월아가 영십일의 손가락을 펼치려 애썼지만, 오히려 방 관리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아이가 더 중요하니 물러나거라.”

월아는 한쪽으로 물러나 원망 섞인 눈빛으로 영십일을 바라보았다. 영십일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 관리는 월아의 아이를 유독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는 그의 아이가 아니던가. 방 관리가 말했다.

“이거 놓으시지요.”

영십일은 미동도 하지 않고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날 이곳 주인에게 안내하시오.”

방 관리가 고개를 저었다.

“나리께선 주인을 만날 자격이 없습니다.”

잠시 뒤, 그가 무언가를 깨달은 눈빛으로 물었다.

“월아를 좋아하십니까?”

월아는 안색이 급변하더니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영십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난 월아를 좋아하오. 그러니 장가를 가겠단 것이오.”

방 관리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월아에게 말했다.

“네게 마음을 갖게 하다니… 규율을 어긴 것이란 말이냐?”

“아닙니다. 저, 저는…….”

월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영십일은 쩔쩔매는 월아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가 손에 힘을 더 실으며 말했다.

“월아에게 겁주지 마시오.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 월아는 상관없소.”

방 관리는 멱살이 잡힌 채로 품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더니 탁자에 던졌다.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월아에게 말했다.

“먹거라.”

창백해진 월아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새까만 환약이 들어 있었다. 한 알을 집어 든 그녀의 눈가에 뿌옇게 눈물이 고였다. 영십일은 빠르게 팔을 날려 환약을 낚아챘다. 그가 성을 내며 방 관리에게 물었다.

“지금 무얼 먹이는 것이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 관리가 말했다.

“아이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으니까요.”

“저 약을 먹으면 어찌 되는데?”

“그저 작은 벌일 뿐입니다.”

영십일은 환약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하면 당신이 직접 먹어 보시오.”

방 관리는 전혀 겁내지 않았다.

“제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약입니다.”

영십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에게 약을 먹이려 했지만, 월아가 약을 빼앗아 가더니 입에 가져갔다. 영십일은 재빨리 손을 뻗어 약을 다시 빼앗았다.

“미쳤소?”

“당신이 미친 거죠!”

월아는 물러서지 않고 그에게서 약을 빼앗으려 했다. 방 관리는 한쪽에 서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만하거라. 아이에게 무리가 가지 않게 조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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