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2화
영십일은 순간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그가 낯선 여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월아는? 어째서 월아는 오지 않는 것이오?”
“월아는 오지 않을 겁니다.”
연인이 담담히 대꾸했다.
“앞으로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월아는 어디에 갔길래?”
“…….”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이오?”
“…….”
“알려 주시오. 월아는 어찌 되었소?”
그가 무얼 묻든 여인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침묵만 지켰다. 영십일이 안정을 되찾은 듯 보이자 그녀가 다가와 그의 요대를 풀었다. 하지만 영십일이 곧장 그녀의 손목을 꺾었다. 그가 그녀를 노려보며 잇새에서 새어 나오듯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알려 주시오. 월아는 어찌 되었소?”
여인은 엄청난 통증에 손을 빼내려 발버둥 쳤다.
“아파요. 왜 이러십니까? 놓아주세요!”
영십일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온정은 전부 월아에게 주었기에 죽을 때까지 월아만이 그의 유일한 여인이었다. 그에게 다른 여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는 더더욱 손을 놔줄 수 없었다. 여인은 심해지는 고통에 입술이 일그러졌다.
시종일관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던 여인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눈앞의 냉담한 사내가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부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연약한 뼈마디가 두둑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말할게요, 놔주세요.”
영십일은 손에 힘을 풀고 낮게 호통쳤다.
“빨리 말하시오.”
여인은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며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겼습니다.”
영십일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겼다니?”
여인은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월아에게 아이가 생겼다고요.”
영십일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뭐라 하였소. 월아가 내 아이를 가졌다고?”
“네. 당신 아이를 가져서 이제 더는 사내와 잠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안 좋으니까요.”
영십일은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지금 그가 느끼는 심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비가 온 뒤, 진흙밭처럼 자꾸만 거품이 일고 푹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흑설탕을 탄 물을 한 대접 마신 것처럼 달아서 느끼할 정도였다. 그는 그 자세로 가만히 서 있다가 여인에게 물었다.
“월아는 지금 어디 있소? 보러 가야겠으니 날 좀 데려가 주오.”
“안 돼요.”
“어째서 안 된단 말이오? 월아가 내 아이를 가졌는데 가서 보는 것도 안 되오?”
“규율을 깰 수 없어요.”
“대체 누가 만든 규율이란 말이오?”
그가 황당하다는 듯 재빨리 물었다.
“이곳 주인이 만든 규율이오?”
하지만 여전히 여인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주인은 대체 누구요?”
그 말에 여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주인은 주인이지요.”
영십일의 눈동자에 매서운 빛이 번득였다.
“말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여 버릴 것이오.”
여인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당신 손에 죽는 게 처벌을 받는 것보단 나아요.”
영십일은 조금 뜻밖이었다.
“처벌이 죽음보다 더 무섭단 말이오?”
“네.”
여인이 냉소를 지었다.
“처벌이 죽음보다 더 무섭습니다.”
영십일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잡고 다섯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실었다. 그의 커다란 손안에서 그녀의 가느다란 목은 형편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여인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또 얼굴엔 피가 쏠려 새빨개지다 못해 자줏빛이 되었다. 여인의 입은 쩍 벌어졌고, 두 눈은 불룩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얼굴을 흉악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마치 뭍으로 밀려난 물고기가 절망감에 빠져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영십일은 궁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고한 백성을 죽이진 않았다. 그는 결국 손을 놓고는 두 발짝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오.”
“전 못 갑니다.”
여인이 말했다.
“당신은 상갑 등급의 사내라 제가 모셔야 합니다. 월아가 해 드렸던 건 저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영십일이 고개를 들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쪽은 본인을 뭐라 여기는 것이오? 기루 여인? 안타깝지만, 난 그쪽의 손님이 아니오.”
여인은 성이 났는지 그를 비난했다.
“월아는 뭐 대단한 줄 아십니까? 아이만 낳으면 곧 두 번째 사내에게 갈 테고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녀가 수를 셀 때마다 영십일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고통이 가셨는지 그녀는 한층 온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선 잠시 부부의 정을 나누었다고 해도 진짜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나리, 우리 한번 같이 잘 지내봐요.”
말을 마친 그녀는 천천히 그의 팔을 어루만졌다. 그의 팔은 탄탄한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단단함에 그녀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상갑 등급다운 몸이군요. 나중에…….”
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힘껏 그녀를 밀쳤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부딪쳤다. 등에 퍼진 통증에 버럭 화를 내려는데 그의 서늘한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또 내게 손을 댔다간 그땐 손을 부러뜨릴 것이오.”
여인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피식 코웃음을 터뜨렸다.
“월아는 참 복도 많습니다. 정말로 나리 눈에 들다니.”
이 철옹성 같은 사내가 자신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더는 그를 귀찮게 굴지 않기로 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실 수 있지요. 하지만, 내일 밤엔 또 다른 여인이 올 겁니다. 만약 정말 월아를 위해 지조를 지키시는 거라면 나머지 두 친구분께서 이곳의 여인 한 명을 받아 주셔야 합니다. 다들 상갑 등급의 사내들이니 주인께서 쉽게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땐…….”
그녀는 자신이 너무 많은 걸 털어놓았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을 멈췄다. 그녀가 문 앞으로 향하자 영십일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
영십일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여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받아 주시지도 않을 거면서 이름은 어찌 물으십니까?”
“나중에 이곳을 나가게 되어 당신 부모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려고 그러오.”
여인은 어둠을 가득 품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다 입술을 들썩였다. 한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곳을 나가지 못합니다. 이곳을 나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거든요.”
다시 문 앞을 향하던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조용히 읊조렸다.
“수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내 문발을 걷고 밖으로 향했다.
이젠 이곳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영십일은 자신을 감시하는 자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의 실력으로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귀신처럼 수아의 뒤를 밟았다.
수아가 들고 있는 등롱의 노란빛이 주변을 미약하게 비추었다. 멀리서 보면 꼭 불빛만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아 섬뜩해 보이기도 했다.
영십일은 수아만 빤히 바라보며 불빛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지만, 자꾸만 무언가 흐릿한 그림자가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망설이는데 앞서가던 빛이 곧장 그의 시선을 벗어났다. 깜짝 놀란 그는 흐릿한 그림자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불빛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기를 몇 차례… 그는 마침내 흐릿한 그림자가 이곳에 쳐진 진법의 속임수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수아만 따라가면 계속 앞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고 돌던 그는 별안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 수많은 등불 빛이 나타난 것이다. 두꺼운 창호지 때문에 불빛이 그리 밝진 않았지만, 그 수가 매우 많아서 어렴풋이 집의 윤곽이 보였다. 불빛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영십일은 수많은 불빛의 등장에 수아의 뒤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어두운 곳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주변을 가만히 살폈다. 얼마 뒤, 사라졌던 수아의 등불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불빛은 다 정지되어 있는데 수아의 불빛만 움직였다. 그는 그 불빛만 빤히 바라보았다. 불빛은 어느 집 앞에서 사라졌다. 아마 저곳이 수아가 묵는 방일 것이다.
거대한 집은 꼭 성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안에서 월아가 있는 곳을 어찌 찾아야 한단 말인가. 일일이 확인해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아가 월아 대신 왔으니 분명 서로 멀지 않은 방에 묵을 것이다. 그는 어둠을 틈타 조심스럽게 수아의 방 근처로 향했다. 옆집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간 그는 조심스럽게 기와 한 장을 살짝 들어 안을 내려다보았다. 한 여인이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월아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집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이번에는 목욕 중인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눈을 감은 채 욕통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두 손으로 통 가장자리를 힘껏 쥐고 있는 게 어딘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영십일은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서둘러 기왓장을 덮었다. 다른 집으로 넘어가 기와를 열어보니 한 여인이 탁자 앞에 앉아 탕을 마시고 있었다. 탕 맛이 별로인지 한 모금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영십일은 머릿속이 진공 상태가 되는 듯 윙윙거렸다. 모든 피가 다 머리로 솟는 기분이었다. 손가락은 조금씩 떨렸지만, 호흡은 최대한 침착하게 유지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기왓장을 하나하나 열어 조심스레 안으로 뛰어 내려갔다.
탕을 마시고 있던 월아는 웬 사내가 위에서 뛰어 내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두 눈에 한 줄기 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다른 이의 눈에는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착지한 영십일이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안색은 여느 때처럼 차가웠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쳤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그녀를 마주하자 영십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신을 보러 왔소.”
“전 잘 지내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마음 쓸 거 없으니 어서 돌아가요. 여긴 당신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