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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11)화 (910/1,192)

제911화

두 사람은 몇 차례나 관계를 가졌지만,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매번 일이 끝난 뒤엔 각자 잠을 청했고, 날이 밝으면 그는 늘 혼자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영십일의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자꾸만 커졌다. 날이 갈수록 조금씩 쌓이던 마음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오늘 폭발했다.

그는 한참 동안 맨발로 차디찬 바닥에 서 있었다. 가슴속 불길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이성은 빠르게 돌아왔다. 그는 영구가 직접 키운 인재였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평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늘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데, 방금은 너무 충동적이었다.

영십일은 긴 한숨을 내쉬곤 탁자 옆으로 다가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가슴 속 거대한 불길을 잠재우진 못했다. 잔을 내려놓은 뒤, 그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마지막에 월아가 그를 밀쳐내긴 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보드라웠던 그 감촉이 아직 그의 입술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미 그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나눈 두 사람이었지만, 조금 전처럼 그렇게 화들짝 놀라진 않았다. 한창 넋을 놓고 있는데 밖에서 영십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십일 형!”

그가 문 앞으로 다가가 발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냐?”

“지금이 몇 시진인데 아직도…….”

영십구가 말을 멈추더니 의아하다는 얼굴로 영십일을 바라보았다.

“십일 형,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왜 신발을 안 신고 계세요. 그리고.”

그가 영십일의 얼굴을 가리켰다.

“얼굴은 왜 그래요?”

영십일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조금 전에 난 코피가 얼굴 위에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어서 나오세요.”

영십구가 왼쪽을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방 관리가 밖을 산책해도 좋대요.”

방 관리는 약속을 지켰다. 영십일이 월아를 받아들였으니 묵용감 일행에게 조금의 자유를 준 것이다.

드넓은 공간으로 나온 그들은 마침내 다른 이들과 만났다. 이곳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밭에서 일했고 어떤 이들은 물가에서 고기를 잡았다. 또 어떤 이는 나무를 베었고, 어떤 이들은 소와 양을 산으로 몰았다.

아이들도 정말 많았다. 어른들 몇이서 수십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멀리서 놀다가도 우각만 불면 우르르 달려왔다. 묵용감은 비탈길에 서서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림 같은 풍경에 활기가 넘쳐흐르자 더욱더 무릉도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 뒤, 그가 두 시위에게 물었다.

“특별한 점이라도 찾아냈느냐?”

영십구가 말했다.

“아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희를 공격했던 아이들도 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 같습니다.”

“그리고?”

영십일이 말했다.

“모든 이들이 즐거워 보입니다. 아무래도 이곳 생활에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십일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곳은 매우 거대한 마을 같습니다. 다들 분업을 하고 있고, 자급자족하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묵용감이 그들에게 실마리를 일러주었다.

“사람들을 보거라.”

영십구가 별안간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남자뿐입니다. 여인이 없습니다.”

영십일도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나 전부 사내들뿐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 전부 사내아이였다.

“영십구의 말이 맞는구나. 전부 사내들뿐이다.”

묵용감이 말했다.

“게다가 젊고 건장한 사내와 어린아이들뿐이다. 노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영십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노인과 여인은 없는 걸까요?”

묵용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고 싶구나.”

그가 뒷짐을 진 채 말을 이었다.

“가서 산을 좀 거닐자꾸나.”

두 시위는 곧장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높은 곳에 서면 더 멀리 볼 수 있는 법이었다. 또한 사전에 길을 알아 둔다면 이곳을 나갈 때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들이 산을 오르는 동안, 산 밑에서는 방 관리와 한 사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가 말했다.

“보아하니 여전히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방 관리가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다. 내버려 두거라. 다 본 뒤에는 마음을 접을 테니.”

사내가 물었다.

“저들의 신분은 확실히 알아내신 겁니까?”

방 관리가 고개를 저었다.

“동월에는 유명한 거물이 너무 많아 찾는 게 쉽지 않다.”

“상관없습니다.”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저자가 누구든 분명 고분고분해질 겁니다.”

방 관리가 사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가자, 우리 대신 저들을 감시하는 자가 또 있으니.”

두 시위를 데리고 산을 오르던 묵용감은 금세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고개를 돌리니 아무도 따라오는 이가 없었다. 그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들이 도망칠까 봐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산은 높고 험준했다. 셋 다 무예를 익힌 비범한 고수였지만, 두 시진 만에 겨우 정상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 오른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명 안쪽은 녹음이 우거진 숲인데, 다른 쪽은 하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이한 광경에 묵용감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많은 산이 겹겹이 둘러싸여 움푹 파인 저지대. 이런 특이한 산세가 특수한 지리적 환경을 형성한 것이다. 아득한 설산에 이런 지역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눈 봉우리를 걷다 보면 눈사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묵용감도 젊은 시절 북쪽 국경 지역에서 눈사태를 만난 적 있었는데, 대지가 포효하듯 거대한 소리가 나면서 눈덩이가 순식간에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는 그제야 왜 아무도 따라붙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으니 그들을 감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두 시위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간 위험한 상황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이렇게 기이한 장면은 처음이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정말 한없이 작아졌다. 한참 뒤, 영십구가 말했다.

“노야, 이곳에서 나가긴 어려울 듯합니다.”

영십일이 싸늘한 눈빛으로 저 멀리 설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왔으면 나갈 방법도 있습니다. 출구는 분명 은밀한 곳에 있을 겁니다.”

묵용감은 뒷짐을 지었던 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십일 말이 옳다. 들어온 곳이 있으면 나갈 곳도 있다. 이곳을 조사하며 출구를 찾아야만 한다. 두 가지 모두 늦어져선 안 돼.”

산에서 내려오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사방에 낀 회색 안개가 천지를 가렸다. 묵용감은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가려 했지만, 한참을 걸어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뿐이었다

여기저기에서 흩어져 일하던 청년들이 둥지로 돌아간 새처럼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숲속에 분명 많은 집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숲에 들어가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평탄에 보여도 겹겹이 이어진 산자락과 나무, 호수 등을 이용해 교묘한 진법을 만들어 놓았다. 길을 걷다 보면 꼭 귀신이 쌓은 담처럼 순식간에 길이 막혔다. 진법을 깨지 못하면 이곳을 나가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묵용감은 그 자리에 서서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런 곳을 발견하여 빈틈없이 꾸며 놓은 걸 보면 보통 평범한 이들은 아닌 듯싶었다. 영십구가 말했다.

“노야, 진법을 깰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찌 깬단 말이냐?”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 쉽게 깨질 진법이었다면 이곳은 진즉 발견됐을 것이다.”

묵용감이 다시금 뒷짐을 지었다.

“기다리거라.”

그리곤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 우리를 데리러 올 테니.”

잠시 이곳에 서 있자 역시나 누군가 안개를 뚫고 다가왔다. 방 관리였다. 그는 그들을 보고 공수를 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혹 길을 잃으신 겁니까?”

영십구가 냉소를 지었다.

“뻔히 알면서도 묻는군.”

방 관리는 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영십구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더니 영십일에게 눈짓을 주었다. 영십일은 곧장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묵용감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노야, 저 방 씨란 자를 제압해 비밀을 실토하게 하는 건 어떠십니까?”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건 저들도 생각할 수 있다. 설령 제압한다고 해도 출구의 비밀은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 일로 영십일도 이곳의 주인이 매우 치밀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 그 어떤 기회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방 관리는 그들을 호숫가 옆 작은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조용히 예를 갖춘 뒤 자리를 떠났다.

굽은 회랑에는 등잔불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그 희미한 빛 속에서 방 관리의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하더니 결국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꼭 공중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묵용감은 담담히 시선을 거두었다. 이곳에 비밀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는 결국 이곳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 것이다.

* * *

산속에서의 삶은 유유자적했다. 시간이 멈춘 듯 사람들 역시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유일한 변화는 월아와 영십일의 사이였다. 둘 사이가 조금 미묘해졌다.

월아는 여전히 사나운 태도였지만, 한밤이 되어도 영십일의 방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영십일의 팔 안쪽에서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잠들어 있다가 아침이 된 뒤에야 방을 나섰다.

영십일도 부끄러워하던 처음의 모습과 달리 자꾸만 더 월아를 탐하려 했다. 한밤중에도 그는 종종 그녀를 깨웠고 월아도 성을 내지 않고 조용히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었다. 영십일의 입맞춤도 피하지 않고 조용히 그와 뒤엉켰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몸으로 솔직한 마음을 나누었다.

밤엔 사랑을 나누다가도 아침만 되면 두 사람은 또다시 낯선 사람처럼 굴었다. 월아는 얼굴을 굳힌 채 방을 나섰고, 그럴 때마다 영십일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뒷모습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월아는 두 번 다시 그의 방을 찾지 않았다. 대신 다른 여인이 그를 찾아왔다. 월아처럼 까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예쁜 얼굴과 어여쁜 자태를 가진 여인이었다. 차가운 표정까지 똑같았지만, 그녀는 월아가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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