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0화
이튿날 아침, 영십구는 연신 영십일의 안색을 살폈다. 참다못한 그가 영십일에게 물었다.
“십일 형,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없다.”
영십일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영십일이 코웃음을 쳤다.
“제가 모를 줄 알고요?”
그가 팔로 영십일을 치며 눈을 찡긋거렸다.
“어젯밤 그 여인이 또 형님 방에 찾아갔죠?”
영십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말 좀 해 봐요.”
영십구가 조급해하며 물었다.
“월아랑 관련된 일이죠?”
그런 영십구가 성가셨던 영십일이 쌀쌀맞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묵용감이 뒷짐을 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영십구는 더는 입을 열지 못하고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묵용감이 영십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것이냐?”
“…….”
어찌 황상마저도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근심이 있다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 잘 보인단 말인가? 영십구가 몰래 키득거렸다.
“노야, 어젯밤 십일 형의 짝이 찾아왔습니다. 한데 말다툼이라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영십일은 그의 장난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야, 월아 아가씨는 올해 열여덟이고, 오 년 전에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묵용감이 멀리 떨어져 있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 년이라니… 그리 짧진 않구나.”
그가 고개를 돌리며 영십일을 바라보았다.
“만약 네가 그 여인을 데리고 가겠다면… 나도 반대하지 않으마.”
영십일이 두 눈을 낮게 드리운 채 대꾸했다.
“여길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영십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면 얼마나 좋아요?”
“이젠 여기가 익숙하다며 돌아가지 않겠다더구나.”
영십구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래서 형님 기분이 그렇게 안 좋으셨던 거군요. 이 일 때문이었어요!”
묵용감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오늘 말이 너무 많구나.”
영십구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이 영십일에게 물었다.
“또 무얼 더 알아냈느냐?”
영십일이 잠시 망설이다 대꾸했다.
“저 말고도 나중에 다른 사내들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십구가 놀란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십일 형의 기분이 그렇게 안 좋았던 거구나! 묵용감이 몸을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 년 전 이곳에 들어와 열여덟이 될 때까지 길러 주었다……. 아마 그사이에 잡혀 온 사내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한데 지금껏 한 번도 경험이 없었다는 것은 그 여인의 첫 상대를 매우 중시했다는 뜻이지. 즉, 상갑 등급의 사내는 많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를 쉽게 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영십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가 나가겠다는데 누가 감히 막겠습니까?”
“그 여인은 오 년이나 이곳에 있었다. 그러니 분명 이곳은 그전부터 존재해겠지. 우리가 아는 거라곤 매우 많은 이들이 이곳에 잡혀 들어왔다는 것뿐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갔는지는 알지 못하지.”
묵용감이 이어 말했다.
“마을을 조사했을 때, 다들 곰이 사람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 잡아먹었다고 했다. 이 말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 아마 지금껏 이곳을 떠난 사람이 없거나 혹 떠난 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걸 의미한다.”
영십일과 영십구는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 영십일이 물었다.
“노야, 떠나실 생각입니까?”
묵용감은 대답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기도… 떠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떠나고 싶은 이유는 백천범이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백천범은 백성에 있겠지? 성에 있다면 행군 때보다 환경이 좀 더 나을 테고, 영십삼 무리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백천범도 분명 안전할 것이다. 그가 걱정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향낭을 남겨 그녀에게 암시를 주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부인의 성격을 잘 알았다. 지금은 백천범이 백성에 머물러 그를 기다리겠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그녀는 분명 그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곳의 기괴한 내막을 알아내야 할 텐데. 아무런 진척도 없이 나간다면 괜히 헛수고를 한 게 아니던가. 도중에 일을 그만두는 건 그의 성격과도 맞지 않았다. 이게 그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 * *
월아는 사흘에 한 번씩 영십일의 방을 찾았다. 일을 마친 뒤에는 잠시 누워 있다가 영십일이 잠이 들면 방을 나섰다. 그런데 이날 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딜 가는 것이오?”
“돌아가야죠.”
“밖은 너무 어두우니 가지 마시오. 날이 밝으면 돌아가시오.”
“밖에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묵소?”
“향 하나가 다 탈 때쯤이면 도착합니다.”
“걸어서 가오, 아니면 가마를 타고 가오?”
어둠 속에서 월아가 조용히 피식거렸다.
“천금 같은 아가씨도 아닌데 가마라니요.”
“밤엔 바람이 많이 부니.”
영십일이 그녀의 팔을 계속 붙잡은 채 말했다.
“이곳에서 자고 가시오.”
월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나와 함께 밤을 보내면 안 되오? 그런 규율이라도 있소?”
“…아니요.”
“그럼, 여기서 주무시오.”
“…….”
잠시 뒤, 월아가 말했다.
“손 좀 놓으시겠어요?”
영십일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붉혔다. 이 여인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자신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째서 사흘에 한 번씩 오는 것이오?”
월아가 답했다.
“규율입니다.”
“하면 언젠가는…….”
영십일이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오… 오지 않는 것이오?”
“때가 되면 오지 않습니다.”
“때가 되었다는 건 어찌 계산하오?”
월아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만 좀 하세요. 잠도 못 자게 할 셈입니까?”
그녀가 성을 내자 영십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만 주무시오.”
푹 자고 일어난 영십일은 눈을 뜨고 옆에서 깊게 잠든 월아를 바라보았다. 월아가 아침이 되고도 떠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젯밤 잠이 들 때만 해도 두 사람은 분명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아침이 되니 한데 붙어 있었다. 그의 팔에 떡하니 붙은 그녀의 얼굴. 그 얼굴 옆으로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영십일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월아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잠기운이 역력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본 순간, 검은 눈동자가 빤히 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꼭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침에 만난 적이 없었기에 조금 민망한 감정이 들었다. 영십일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월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그의 몸을 넘어 침대 가에 앉았다. 그리곤 신발을 신고 장포를 대충 걸치더니 나갈 채비를 했다. 영십일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보시오, 이리 가는 것이오?”
월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영십일은 몸을 일으켜 앉은 뒤,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이내 다시 벽에 놓인 궤를 가리켰다.
“저 안에 빗이 있소.”
월아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더니 잠시 망설였다. 조금 주저하던 월아는 조심스레 궤짝으로 다가가 빗을 꺼냈다. 그리고 창가 앞에서 천천히 머리를 빗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스며들어 월아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두꺼운 겹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를 숨길 수 없었다.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돌린 그녀는 섬섬옥수로 빗을 든 채 비단 같이 고운 머리를 빗어 내렸다. 꼼꼼히 빗질을 하고 나니 바람에 머리카락이 곱게 흩날렸다. 머리를 빗던 월아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피가 나요!”
영십일이 넋을 놓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코에서 피가 나요.”
영십일은 흠칫 놀랐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치자 따뜻한 점액질이 묻어났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는 피를 보자마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 침착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그녀를 등진 채 몸을 웅크려 장막을 찢어 피를 닦기 시작했다.
월아는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옥구슬처럼 맑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유난히 밝게 울려 퍼졌다.
영십일은 더욱 쩔쩔맸다. 자신이 생각해도 침대에 숨은 건 정말 우스웠기에 서둘러 침대 밖으로 내려왔다. 월아는 허리를 숙인 채 입을 가리고 꺄르르 웃었다. 그녀의 두 눈은 평소의 차디찬 눈빛과는 달리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영십일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렸고 피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역동적인 감정이 다시 밀려왔다. 월아는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 영십일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넋을 놓은 그의 모습은 조금 바보스럽기도, 모든 걸 다 태울 듯 뜨겁기도 했다.
그녀는 서둘러 빗을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가 문턱을 넘기 전,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사내가 힘을 써서 끌어당기니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당신…….”
평소 사납기만 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영십일이 그녀를 끌어당긴 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월아를 품에 안았지만, 뒤이어 무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그는 그저 품에 안긴 그녀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월아는 긴장되어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새하얀 이가 새빨간 입술을 깨물자 붉은색과 하얀색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순간 영십일은 머릿속이 펑 하고 터지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월아는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바라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태울 듯이 뜨거운 호흡이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그제야 문득 상황을 깨닫고 그를 힘껏 밀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영십일은 그녀가 밀치자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는 문발이 젖혔다 내려오며 그녀가 사라지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