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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09)화 (908/1,192)

제909화

허대륜은 부정할 수 없었다. 분명 그녀가 이겼기 때문이다. 그는 전 부참장이 어떤 사람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성격이 온화해 보였지만, 위세를 부릴 땐 황제의 금패를 이용할 만큼 교만한 기색도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한 분석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전범의 주장은 기상천외하게 들리기도 하나, 자세히 곱씹어 보면 아예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고 작은 체구에 실력도 보잘것없을 것 같은데 직접 패륜이에 들어가겠다니… 그건 가히 칭찬할 만한 용기였다.

용감하기만 한 게 아니라 지략도 제법이었다. 조금 전 나무에 오르는 대결을 하자는 것만 봐도 잔꾀를 잘 부리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전범을 패륜이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황상을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한들 그저 보잘것없는 총신에 불과하니 별 상관이 없었다. 황상께서 궁에 돌아가시면 전범을 기억이나 하실까. 생각이 여기에 미친 허대륜이 전범에게 물었다.

“전 부참장은 언제 패륜이로 떠날 생각인가?”

백천범이 말했다.

“그건 장군께서 보내신 사람이 얼마나 빨리 일을 처리하느냐에 달렸지요. 와도성에서 소식이 전해지면 곧장 떠날 겁니다.”

허대륜은 전범이 자신에게 반격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하늘빛을 살폈다.

“조금만 더 기다리게. 첫 번째 소식이 곧 도달할 테니.”

백천범은 그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장군, 와도성에 우리 쪽 첩자가 많은가요?”

“피차일반이지. 우리가 와도성에 첩자를 보내듯 저들도 백성에 첩자를 두고 있네. 하지만, 황상께서 실종된 일에 대해 아는 이가 많지 않으니 저들은 아무 소식도 접하지 못했을 걸세.”

“그럼 패륜이에는요? 우리 쪽 인력이 얼마나 되나요?”

허대륜은 전범을 빤히 바라보았다. 별안간 머릿속에 가소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전범이 몽달에서 심어 둔 첩자는 아니겠지? 전범이 황상 곁을 지키자마자 황상이 납치를 당했고, 지금은 첩자에 관한 일을 캐묻다니. 그가 담담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있긴 하지만, 많지 않네. 패륜이는 몽달의 도성이니 침입하기가 쉽진 않지. 한데 그건 어찌 묻는가?”

“하면 그들의 명단과 암구호를 제게 알려 주십시오. 패륜이에 가면 쓸모가 있을 겁니다.”

허대륜이 농담을 건넸다.

“어제 전 부참장이 탁자를 내리칠 때 기세가 아주 대단해 보여서 패륜이에 혼자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지?”

백천범이 말했다.

“일을 해결하러 가는 것이지, 잘난 체하려는 건 아니니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지요. 아, 가능하면 패륜이의 지도 하나만 구해 주십시오.”

허대륜이 말했다.

“전 부참장, 보아하니 이쪽으로 제법 경험이 있는 듯한데… 예전에도 이런 일을 해 보았는가?”

“아뇨.”

백천범이 말했다.

“모든 일은 처음이 있는 법이잖아요.”

“또 뭐가 더 필요할 것 같은가?”

백천범이 고민하다 말했다.

“이 두 가지면 될 것 같아요. 다른 건 조 장군님께서 준비해 주실 거예요.”

지금 전범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인가? 허대륜은 속으로 생각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와도성에서 첫 번째 소식이 전해졌다. 최근 들어 와도성에서 군대를 파견한 적도 없었고, 성에 돌아온 군대도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동월 백성을 잡아간 일은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와도성의 주둔군은 매우 많았기에 파벌도 다양했다. 첫 번째 소식이 반드시 정확한 것만은 아니었기에 다들 인내심을 갖고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백천범은 영십삼을 보내 조천명을 데려왔다.

“조 장군님, 도성에서 데려온 일만 정예병 중에서 오백 명을 골라 각각 이백 명과 삼백 명씩 두 조로 나눠 주세요. 방법을 고안해 병사 이백을 데리고 패륜이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만약 무슨 소식이든 접하게 되면 일손이 필요하니까요.

나머지 삼백 명이 있는 조는 패륜이의 모든 성문을 나누어 지키라고 분부해 주세요. 뭐든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거든 제게 곧장 보고할 수 있도록요.”

조천명은 그녀가 이런 분부를 내릴 줄은 몰랐다. 그가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마마, 이런 것도 아셨습니까?”

백천범이 가볍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황상께서는 군신인데, 황후라는 사람이 너무 약하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

“예, 신이 오백의 뛰어난 정예병들을 추려내겠습니다. 그들이 마마 곁을 지킨다면 신도 마음이 조금은 놓일 것입니다.”

“그리고.”

백천범이 말했다.

“비수와 암기暗器같이 몸에 숨길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해 주세요. 상처에 바르는 금창약도 병사들이 하나씩 가질 수 있게 준비해 주시고요.”

조천명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마마, 신이 함께 패륜이에 가는 건 어떻습니까? 상의하실 일이 생길 때 제가 곁에 있으면 더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백천범이 말했다.

“사람이 적을수록 눈에 덜 띌 테니까요. 전 십삼과 동행할 거고 십오와 십육은 암위로 지낼 거예요. 제 안위는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장군은 이곳을 지키세요. 만약 와도성에서 소식이 전해지거든 제게 빨리 전해 주시고요.”

조천명은 그녀가 자신만의 확고한 계획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 * *

땅거미가 질 무렵. 영십일의 심장이 별안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탁자 앞에 앉아 찻잔을 들고 천천히 들이켰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찻잔 표면을 긁고 있었다.

어젯밤엔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다. 다시 돌이켜 봐도 온통 흐릿하고 자잘한 장면만 떠올랐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라고는 월아의 얼굴뿐이었다.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맑고 차디찬 눈으로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는 순간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 두려움은 진정한 공포심과는 달랐다. 훌륭한 사내대장부는 여인과 다투지 않는다고 했으니 일종의 무력감 같은 것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찻잔 안에 찻물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밖은 이미 어두운 밤이 되었다. 그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렇게 늦었으니 아마 월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잇달아 사흘이나 탁자 옆에 앉아 기다렸다. 바람이 문발을 스치면 심장이 빠르게 뛸 만큼 간절히 바랐는데… 월아는 오지 않았다. 그는 그날 밤 일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춘몽은 흔적도 없다던데… 정말 그런 것이란 말인가?

조금 서글프긴 해도 더 기대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내대장부라면 사소한 것에 마음을 두어선 안 되었다. 기대를 접으려던 그때. 월아가 찾아왔다. 반쯤 젖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그녀는 손가락을 다 가릴 만큼 긴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엔 여전히 싸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영십일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심장은 날뛰는 말처럼 요동쳤다. 월아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며칠 못 봤다고 잊으신 겁니까?”

“어찌…….”

영십일은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옅은 향기가 코를 찌르자 그가 우물거리며 물었다.

“어찌 온 것이오?”

“같이 자려고요.”

월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장포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 이내 침대에 앉고는 십일을 올려다보았다.

“이리 와요!”

영십일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날과는 조금 달랐다. 그날은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했기에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했다. 부끄러움과 함께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고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무섭기도 했다.

지금도 복잡한 심경이지만, 비장한 마음은 없었고 오히려 까닭 없이 기뻤다. 그땐 그 일을 배척하려 했다면, 지금은… 갈망했다. 다만 부끄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기에 다 알면서도 굳이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리 가면 무얼 할려고?”

그녀는 언짢은 기색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몰라서 물어요?”

영십일은 천천히 탁자 옆 의자에 앉아 가볍게 말했다.

“아직 이르니 얘기 좀 나누는 게 좋겠소.”

“그날 다 얘기했잖아요.”

월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전 월아라고 하고 동월 사람이에요. 다른 건 저도 몰라요.”

영십일은 물을 한 잔 따라 탁자 끝에 놓았다.

“물 좀 드시오.”

월아가 찻잔을 힐끗 쳐다보며 대꾸했다.

“안 마셔요.”

영십일은 잠시 침묵을 삼키다 질문을 건넸다.

“몇 살이오?”

“열여덟이요.”

“난 스물여덟이니 당신보다 열 살이 더 많소.”

월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늙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스물여덟은 아직 젊고 창창한 나이 아닌가! 하지만 여인에게 무시를 당하자 영십일은 부끄러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내가 늙어서 싫소?”

“상관없어요.”

월아가 말했다.

“부군을 찾는 것도 아니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영십일은 그녀의 말에 칼끝으로 가슴을 긁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뒤로 침묵이 한참이나 지속되었고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 뒤, 영십일이 물었다.

“이곳에 온 지는 몇 년이나 되었소?”

월아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영십일이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 단념한 순간, 그녀가 서늘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오 년.”

영십일의 눈망울이 번득였다. 오 년이나 되었다니… 그럼 열세 살에 이곳에 왔단 말인가? 그가 떠보듯 물었다.

“당신 혼자 왔소? 아니면 부모님과 함께 왔소?”

“혼자요.”

“돌아가고 싶소?”

월아는 또다시 침묵에 잠기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아니요.”

영십일은 그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어째서?”

아직 어린 여인인데, 부모와 떨어져 지내도 좋다고?

“그냥요.”

월아가 담담히 대꾸했다.

“여기가 이젠 더 익숙해요.”

영십일은 오히려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 당신을 반드시 데려가겠소.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보내 주겠소.”

그의 말에 월아는 갑자기 성을 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가기 싫다고 하잖아요. 게다가 당신이 뭔데 절 좌지우지하려는 거예요?”

“…….”

“나랑 잔다고 해서 날 어찌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한텐 당신 말고도 사내는 많을 테니까.”

영십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과 잘 수 있다는 건 다른 사내들과 잘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영십일은 가슴에 불길이 이는 기분이었다.

“지난번엔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게 뭐 어쨌다고요. 당신과 자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랑 잤을 거예요.”

영십일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찻잔을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월아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웠고 눈빛에는 포악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늘 성실하기만 하던 사람이 화를 내자 정말 무서웠다. 월아가 몸을 뒤로 웅크리며 물었다.

“왜 그래요?”

“왜 그럴 것 같소?”

영십일은 쌀쌀맞게 대꾸하고는 요대를 풀고 장포를 걸상에 내던진 뒤 장막을 내렸다. 탁자에 놓인 촛불은 희미하게 타올라 흔들리는 침대를 비추었다. 물결이 일듯, 얇은 장막이 떨리자 촛불도 자꾸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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