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8화
허대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범의 신분이 존귀하다는 조천명의 말에 그는 전범이 황실 종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 부참장의 설명은 전혀 달랐다. 조천명과 포 부참장 중 누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조 장군은 전범이 존귀한 신분이라고…….”
“암요, 존귀하고말고요.”
포 부참장이 입을 삐죽거렸다.
“황상 곁에서 총애를 받는 자가 아닙니까.”
“그자 곁에 황궁 시위도 붙어 있다.”
“황상께서 붙이신 겁니다. 금 요패까지 하사하셨고요.”
허대륜은 믿을 수 없었다.
“전범의 신분이 정말 존귀할 수도 있지. 내 보기에 조 장군도 매우 정중히 예를 갖추던데.”
“아니에요.”
포 부참장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황상께서 전범에게 얼마나 잘해 주셨는지 장군께서 못 보셔서 그래요. 황상처럼 존귀하신 분이 직접 웅크려 앉아 전범에게 대추를 까주셨다니까요. 또 황상께서 왜 아침 일찍 마을에 가셨는지 아십니까?”
“왜?”
“전범에게 따뜻한 찐빵을 사다 줘야 한다면서 새벽에 찐빵을 사러 가신 겁니다. 찐빵만 아니었어도 이런 사달은 나지 않았을 겁니다.”
포 부참장이 씩씩대며 말했다.
“만약 그자가 여인이었다면,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을 겁니다!”
허대륜은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사적인 자리에서 황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좋지 않은 행위였지만, 이건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황상께서는 애처가로 소문이 자자하신 분인데. 백 장군도 황상께서 마마께 어찌나 잘해 주는지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그건 궁 안이었으니까요. 바깥에선 마마와 함께하실 수도 없고 군대에 여인을 데려올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누군가 황상의 외로움을 달래 줘야겠지요.”
포 부참장이 허대륜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다 사내들뿐인데… 딱 보면 모르겠습니까?”
잠시 뒤, 그가 허대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누가 그러는데… 밤에 황상께서 전범을 안고 입을 맞추는 걸 봤다고 합니다.”
허대륜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아연실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요.”
* * *
허대륜은 이미 백성에서 가장 높은 총수였지만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병장을 거닐었다. 그는 병사들이 활기차게 훈련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의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큰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았다.
천천히 병영을 걷는데 마른 체구의 어떤 이가 훈련 중인 병사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검은 찬 세 명의 시위가 부채꼴 진영으로 그자를 지키고 있었다. 허대륜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그자를 유심히 살폈다.
사실 그는 어젯밤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포 부참장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속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진 것 같아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생각해 본 결과 그는 왜 조천명이 그리 행동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전범의 신분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은 황제와의 민망한 관계 때문일 것이었다. 전쟁터에 총신을 데려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황제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그는 한참 동안 전범을 지켜봤지만 딱히 괜찮은 것 같진 않았다. 두껍고 짙은 두 눈썹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고, 입가의 점까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듣자니 황후 마마께서는 선녀가 따로 없다는데……. 저런 얼굴로 황후의 신발 시중도 못 들 것이다. 그는 황상의 미적 기준이 진심으로 의심스러웠다.
전범의 신분에 확신이 서자 허대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또 동시에 그에 대한 적의도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전범은 황제의 총신이지만, 너무 보잘것없는 소인배라 굳이 각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가 느긋하게 물었다.
“전 부참장.”
백천범이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허 장군님.”
허대륜은 전범에게도 장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바로 뒤끝이 없는 것이었다. 분명 그에게 모질 게 굴었어도 그는 모두 잊은 듯 진실된 웃음을 보여 주었다.
“무얼 보고 있는가?”
“훈련이요.”
“처음 보나?”
백천범이 대답했다.
“처음 봅니다.”
깊은 못처럼 고요한 궁에서 어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듣자니 전 부참장이 가동 대인과 동문이라던데?”
백천범은 흠칫 놀라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
“본 장군도 가 대인의 뛰어난 무술 실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네. 인연이 닿지 않아 아쉽게도 직접 본 적은 없지. 전 부참장도 가 대인과 동문이라고 하니 분명 실력이 뛰어날 터. 무리한 청이지만 전 부참장과 한번 겨뤄 보고 싶은데… 전 부참장의 생각은 어떠한가?”
백천범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영십삼이 다가와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 부참장님은 아무 때나 겨루지 않으십니다. 허 장군께서 원하신다면 저 십삼이 함께해 드리지요.”
허대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십삼이 황궁의 근위이긴 하나 그는 이곳 백성의 최고 통솔자였다. 이건 그를 너무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허대륜이 얼굴을 굳히고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시위 대인, 이곳은 임안성이 아니라 백성이네. 본 장군은 전 부참장과 이야기하는 중인데, 시위 대인이 어찌 끼어드는가? 저리 비키게!”
하지만 영십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집에 손을 올린 채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대륜이 앞으로 한 발짝만 더 가까이 오면 검을 뽑을 기세였다.
허대륜은 순간 무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영십삼은 마치 전범을 황제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무조건 세 척은 떨어지게 했다. 황제도 이렇게 모시진 않거늘. 그는 더욱 성이 나서 호통쳤다.
“자네가 황상 곁을 지키는 자이긴 하나, 내 백성에 온 이상 이리 방자하게 굴 수는 없다!”
영십삼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나머지 두 시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포위하듯 백천범을 가운데에 두었다. 백천범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누가 영구에게서 배운 자들 아니랄까 봐… 성격도 영구와 똑같았다. 오직 주인만 생각할 뿐,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녀가 목청을 가다듬고 세 시위 가운데 선 채 말했다.
“허 장군님, 전 아직 장군님보다 어리고 키도 더 작고 왜소하지요. 장군께서 절 이기셔도 나약한 자를 업신여긴다는 구설수에 오를지도 모릅니다. 별 소득 없는 승리일 뿐이지요.”
백천범의 말에 시위들은 더 긴장한 채 그녀를 에워쌌다. 그 모습을 본 허대륜은 분명 전범의 실력이 자신보다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고민에 잠겨 있는데 또다시 백천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이렇게 하시지요. 무술 대신 나무에 오르는 대결을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
대장군이 나무에 오르는 대결을 하다니… 이건 소문이 나도 된단 말인가?
“어떠신지요?”
백천범이 눈이 감길 만큼 웃으며 물었다.
“차마 그건 못하시겠습니까?”
허대륜은 순간 그 말에 마음이 동하여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차마 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어찌 견주자는 것인가?”
“속도는 무시하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좋네. 자네 말대로 하지.”
허대륜은 전범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렇게 작고 마른 자라면 나무에 절반 정도만 올라도 용할 테다. 반면 영십삼은 걱정부터 앞섰다.
“전 부참장님, 소인이 대신 겨뤄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손을 탈탈 털며 천천히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필요 없어요. 나무에 오르는 건 져 본 적 없으니까요.”
황후가 나무를 잘 타는 건 영십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직접 오르는 것 말고도 태자와 공주를 가르치기도 했다. 매번 과수원에 과일이 익을 때가 되면 마마께선 청양 공주를 데리고 나무에 올라 과일을 따셨다. 분명 체통은 없어 보여도 자유로워 보였다. 황제는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두며 그저 마마와 공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분부만 했다.
무신 출신인 사내에게 나무를 오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허대륜은 나무 아래로 걸어가 손에 침을 퉤 뱉은 뒤, 기둥을 안고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서너 번의 동작 만에 그는 백천범을 멀찍이 따돌렸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장군이 누군가와 나무를 오르자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느새 나무 주위를 에워싼 병사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결을 지켜보았다.
허대륜은 빠르게 높이 올라갔다. 밑을 바라보니 백천범은 한참 밑에서 오르고 있었다. 다만 동작만큼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천천히 위로 오르던 그녀는 밑에서 뭐라고 떠들어 대든 자신만의 호흡을 유지했다.
잠시 뒤, 허대륜의 속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나무 꼭대기에 다다라서 가느다란 줄기가 그의 무게를 버티지 못했다. 그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휘청거리자 지켜보던 이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허대륜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다. 백천범과 그와의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나뭇가지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더는 올라가기 힘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매달려 숨을 돌렸다. 여기까지가 그의 최대치인 듯했다.
그는 백천범이 자신보다 더 높이 올라가진 못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백천범은 천천히 나무를 올랐고 마침내 그와 같은 위치까지 도달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 장군님, 저 먼저 올라갑니다!”
허대륜은 서둘러 나뭇가지를 붙잡고 조금 더 올라가 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나뭇가지는 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흔들렸고, 하마터면 부러질 뻔했다. 깜짝 놀란 그는 나뭇가지를 꽉 붙잡았다. 더는 위로 오르지 못하고 백천범이 올라가는 모습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야 백천범이 그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건 빠른 속도 때문이 아니라 몸이 가볍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볍기 때문이다. 그가 졌다. 나무 타기에서 진 게 아니라 두뇌 회전에서 진 것이었다.
나무타기였지만 대장군으로서 패배는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허대륜이 어두운 낯빛으로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오자 밑에 있던 병사들이 썰물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나무 아래 남은 사람이라고는 세 명의 시위뿐이었다. 다들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두 눈망울 속엔 걱정이 가득했다.
영십삼은 백천범이 떨어질까 봐 어깨가 살짝 들려 있었다. 허대륜은 저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하는 시위의 모습에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백천범은 내려올 때도 안정적이었다. 마침내 땅에 내려온 그녀는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며 허대륜을 향해 활짝 웃었다.
“장군, 제가 이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