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7화
그녀는 속도를 살짝 늦춰 말했다.
“사실… 가장 먼저 이런 추측을 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황상입니다. 황상께서 먼저 음모라는 걸 알아차리셨어요. 누군가 동월과 몽달의 전쟁을 부추기려 한다는 것을요.
황상께서 납치되신 건 사고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적의 소굴에 잠입하기 위해 황상께서 세운 계책인지도 모릅니다. 황상은 제가 지금껏 봐 온 사람 중 가장 용맹하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 누구도 황상을 납치할 순 없습니다. 이번 일은 분명 황상께서 제 발로 들어가신 거겠지요.”
허대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백천범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조천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 장군도 줄곧 황상 곁을 지키지 않았나. 황상께서 자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해 주셨는가?”
“그게… 황상께서 직접 말씀하신 건 듣지 못하였지만… 전 부참장이 들었다고 하면 분명 그리 말씀하신 것이네.”
조천명이 이런 간사한 대답을 내놓다니! 허대륜은 조천명과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의 성품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용맹한 장수이지 아첨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사사건건 전 부참장의 말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인가? 저 전 부참장이 황실 종친이라고 해도 그렇지… 조천명이 이리 시비를 가리지 못할 줄이야! 납치된 사람은 무려 동월의 황제였다. 조천명이 황제에게 직접 듣지 못했다는 말에 허대륜은 그저 백천범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생각했다. 그가 한참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전 부참장은 몽달이 동월의 황제를 납치한 사실을 알아차릴까 봐 선공을 반대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저자들은 이미 동월의 백성들을 잡아가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이유는 성립이 되네. 그중에서도 가장 급선무는 황상을 구출하는 것이고. 조 장군, 자네 의견은 어떠한가?”
조천명은 백천범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짙은 눈썹 아래로 새카맣고 커다란 눈이 더 돋보였다. 이미 혼인을 하고 아이도 낳은 몸이었지만 세월은 그녀의 얼굴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황제의 세심한 보살핌에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순수했다. 그때, 포 부참장이 입을 열었다.
“말장은 허 장군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황상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될 일이니 곧장 전쟁을 일으켜서 몽달을 압박해야 합니다. 전쟁에서는 주도권을 쥐는 자가 기선제압을 하는 법이니까요.”
허대륜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포 부참장 말이 옳다. 우리가 먼저 기선제압을 해서 몽달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야지.”
백천범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 전쟁에 반대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예요. 첫째, 전쟁을 일으키면 적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둘째, 황상의 계획을 망칠까 두렵습니다.”
조천명은 그녀의 얼굴에 묻어난 결연함을 발견했다. 황제가 납치된 후, 그는 황후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다.
그는 연약한 황후가 황제 없이 무사히 백성에 도착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혹여 병이 나진 않을까… 또 신분이 노출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군영을 철거할 때 황후는 직접 나서 막사 철거를 했고, 군영을 다시 설치할 땐 황후도 직접 불을 피우고 요리를 했다. 그들이 무엇을 먹든 그녀도 똑같은 음식을 먹었고, 그 어떤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군대의 일원처럼 행동했다. 황후의 면모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엔 그녀가 황후였기에 따랐지만, 그녀와 함께 지낼수록 그녀의 말을 신뢰하게 됐다. 황제와 황후는 하늘이 맺어준 부부인지라 서로 남다른 애정을 자랑했다. 이 세상에 아마 황후 마마만큼 황상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황제가 직접 적의 소굴로 들어간 것이라면 더욱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전 부참장의 의견에 찬성하네.”
허대륜은 담담히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표결을 하는 게 낫겠군. 소수는 다수의 의견에 복종한다. 출병하여 황상을 구하는 것에 동의하는 자는 손을 들라.”
자리에 있는 대다수가 손을 들었다. 허대륜의 미간이 그제야 느슨해졌다.
“하면 이리 결정이 났으니, 내일 군량부터 준비하도록 하지.”
그때, 별안간 백천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전 동의하지 못합니다!”
백천범의 갑작스러운 발악에 허대륜은 깜짝 놀랐다. 키도 작고 마른 놈이 기세는 제법이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백천범을 바라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반대해도 소용없다.”
조천명이 수습에 나섰다.
“허 장군, 그래도 다시…….”
백천범이 품에서 금패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금패를 본 이들은 곧장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의 요패였다. 황제의 요패를 보는 건 황제를 만나는 것과 똑같았다! 백천범이 말했다.
“다들 일어나세요. 계속 논의를 해야 하니까요.”
다들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허대륜의 안색은 영 좋지 못했다. 전 부참장이 황제의 금패까지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제의 금패를 손에 쥐고 있는 이상 그녀의 말에 따라야 했다.
정말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탁자에 놓인 번쩍이는 금패를 바라보며 다들 침묵을 삼켰다. 그러면서 다들 전 부참장이란 자의 진짜 신분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비록 제 의견은 허 장군님과 다르지만, 일부는 허 장군님의 말이 맞습니다.”
허대륜은 의아함에 눈썹을 치켜세우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제 생각은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황상과 관련된 일에 있어선 절대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큰 방향에서 따지자면 저와 허 장군님의 뜻은 같습니다. 하지만 황상을 구한다고 해도 조용히 일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허대륜은 백천범의 말이 왠지 모르게 듣기 좋았다. 황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다만 구하는 방법에서 이견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헛기침하며 스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전 부참장이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분명 다른 방도가 있을 테지.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도성에 있을 때, 백 장군께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성은 동월의 병사가 주둔하는 큰 병영으로, 저 멀리 몽달 경내에 있는 와도성瓦圖城과 마주 보고 있지요. 그곳에도 몽달의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국경 지역에서 동월 백성들을 괴롭히는 게 몽달군 소행이라면, 와도성에 있는 자들이 한 짓이겠지요. 그들은 수도 많고 우리와도 가장 가까우니까요.
정말 와도성에 있는 자들의 짓이라면, 분명 소문이 났을 겁니다. 그들이 납치에 성공했다면 우리의 이목을 가릴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에요. 그렇담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면 어떻습니까? 무슨 소식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조천명이 백천범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군.”
허대륜은 아무 말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가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와도성에 있는 자들 짓이 아니라면, 직접 몽달 군주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자들일 겁니다. 납치한 자들을 비밀리에 패륜이로 데려가겠지요. 만약 와도성에서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한다면, 제가 직접 패륜이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그건 절대 아니 됩니다.”
이번에 반대한 자는 허대륜이 아니라 조천명이었다. 황후를 패륜이로 보내다니…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허대륜도 반대했다. 조천명도 그와 같은 의견인 걸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건 어려운 일이네. 패륜이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 전 부참장은 존귀한 신분인데 만일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저 스스로 책임질 겁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십삼과 나머지 시위를 데리고 갈 것이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하지만, 시위인 영십삼도 주저되긴 마찬가지였다.
“전 부참장님, 그건…….”
짜증이 난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금패를 탁탁 내리쳤다. 반대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윽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다른 의견이 없는 것 같으니 이 일은 이렇게 결정짓죠.”
말을 마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영십삼이 재빨리 그녀 뒤를 따르며 조용히 물었다.
“전 부참장님, 정말 패륜이에 가실 생각입니까?”
백천범이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 거예요.”
그녀는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이다. 남원에서 동월로 돌아올 때, 그녀는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발걸음을 멈춘 적 없었다. 그리고 묵용감이 사라진 지금, 그녀는 반드시 그를 찾으러 가야 했다. 범이 사는 굴이든, 불바다든, 칼산이든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영십삼이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만약 황상께서 패륜이에 계신 게 아니라면요?”
백천범이 대꾸했다.
“몽달과 동월이 전쟁을 한다면 분명 몽달이 패하겠지요. 그러니 분명 누군가 동월의 손을 빌려 몽달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거예요. 그들의 목적이 몽달이라면 패륜이에도 분명 그들의 세력이 침투했을 거예요. 어쩌면 몽달 황실 내의 알력 다툼인지도 모르고요. 분명 그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영십삼은 그녀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비록 위험한 일이었지만, 황상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기회도 놓칠 수 없었다.
하나둘 자리를 비웠지만, 허대륜은 의자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 다른 이가 보였다.
“포 부참장,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포 부참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대륜 근처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더니 호기심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장군, 전 부참장의 신분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허대륜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알고 있는가?”
포 부참장이 말했다.
“도성에서부터 함께 왔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제가 그자의 내막을 낱낱이 조사했습니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
“듣자니 가동, 가 대인의 동문이라 합니다. 무술 실력이 제법이라는데 실제로 그자의 실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황상의 눈에 든 건지 갑자기 부참장이 되었지요. 그전까진 갑등병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데 매일 황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밤에도 황상의 막사에서 함께 잠을 청하는데…….”
허대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 부참장이 밤에도 황상의 막사 안에서 잔다?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목이 떨어지고 싶은 것이냐!”
“정말입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조 장군께 여쭤보십시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