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6화
“허 장군, 자네 어찌…….”
막상 그를 어찌 질책할지 몰랐던 조천명은 우선 백천범에게 사죄하려 했다.
“전 부참장, 실은…….”
백천범이 영십삼에게 말했다.
“검을 거두세요. 허 장군님께서 놀라시겠어요. 전 그저 부참장입니다. 장군께서 꾸짖으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영십삼은 검집에 다시 검을 꽂고는 싸늘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가장 놀란 사람은 허대륜이었다. 영십삼의 요패를 알아본 그는 그들이 황상의 최측근 시위라는 걸 깨달았다. 일개 부참장이 황궁 시위단을 데리고 있다니. 게다가 조천명의 태도는 어찌 저리 공손하단 말인가. 보아하니 부참장이 아니라 도성에서 온 귀인인 듯했다.
수려한 외모와 여인처럼 새하얀 피부, 어린 나이로 짐작건대 분명 황실의 자제일 것이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에 잠겼다. 설마… 태자란 말인가?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황제가 친정을 떠날 땐 태자가 조정을 다스려야 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과거 백 장군은 태자가 이제 자신의 키와 비슷하다고 알려 준 적 있었다. 하지만, 이 청년은 백 장군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작았다. 만약 태자가 아니라면 황자란 말인가? 듣자니 성 황자도 용모가 뛰어나다던데… 전 부참장과도 얼추 비슷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알기론 황자는 올해 열둘인데, 이자는 스물은 넘어 보이니 나이가 맞지 않았다. 그는 전 부참장이 아마 다른 황실 종친일 거라고 추측했다.
추측을 마친 그는 백천범에 대한 인상이 더욱 나빠졌다. 이왕 군대에 들어와 경험을 쌓기로 했으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는 이런 부잣집 도련님들을 아주 싫어했다.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조상님 덕에 황궁 시위까지 끌고 다니다니! 참으로 같잖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대장군으로서 늘 절도 있게 행동해 왔기에, 어떤 불만도 표출하지 않고 상황을 수습했다.
“이 일은 좀 더 따져 봐야 하니 우선 좀 쉬시게.”
황제의 친정 소식에 그는 일찌감치 후원을 비워 황제가 묵을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전 부참장이 왔으니 그는 모두를 병영으로 데려가도록 분부했다. 영십삼은 병사가 자신들을 병영으로 데려가자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부참장님은 여기 묵지 않으실 것이니, 허 장군께 별도의 공간을 내어 달라고 청하시오.”
함께 따라오던 조천명이 병사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일단 물러가거라. 내가 직접 허 장군에게 말해볼 테니.”
조천명은 주변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세 시위 외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가 조용히 백천범에게 물었다.
“마마의 신분을 허 장군에게 알릴까요? 혹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잖습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아직은 말하지 않은 게 좋겠어요. 오는 길에도 황상께서 시위들을 제외하고는 조 장군에게만 제 신분을 알려 주셨잖아요. 허 장군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만에 하나 소문이 새어 나가면 황후는 군에 있는데 황제가 없으니 다들 황상의 행방을 의심할 거예요.
그리고 전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어 주도면밀하지 못해요. 조 장군도 제가 앞에 있으니 자꾸 망설이시잖아요. 그러니 다른 의견도 많이 들어보는 게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걸 다른 이는 생각해 낼지도 모르니까요.”
조천명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황후 마마는 자신이 주도면밀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말한 것들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그는 황후 마마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거처 문제는 제가 허 장군을 찾아가 얘기해 보겠습니다.”
병영엔 온통 사내들뿐이니 백천범이 지내기엔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조 장군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허대륜은 자신을 찾아온 조천명을 보고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조 장군, 정리는 다 마쳤는가? 국경 지역은 도성에 견줄 곳이 못 된다네. 괜스레 고생만 시키는군.”
조천명이 말했다.
“난 괜찮지만, 전 부참장의 거처를 좀 바꿔 주게. 병영에서는 지내기가 어려울 걸세.”
“어째서 어렵단 말인가?”
허대륜이 말했다.
“그자는 부참장이 아닌가? 다른 부참장들은 다들 병영에서 지내는데 왜 그자는 안 된단 말인가?”
조천명이 탄식하며 말했다.
“허 장군, 설마 전 부참장 주변에 있던 자들이 누군지 모르는 것인가?”
“알지, 황궁 근위가 아니던가.”
허대륜이 말했다.
“내 조 장군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대체 그자의 신분이 무엇이길래 본 장군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인가?”
허대륜의 불쾌한 낯빛에 조천명은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
“허 장군은 몰랐겠지만, 그자는 황상께서 직접 데려온 사람이라 신분을 노출하기 어렵다네. 황궁 근위를 데리고 다니는 자가 절대 보통 사람일 리가 없지. 황상께서 전 부참장을 내게 맡기셨으니,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앞으로 난 끝장일세. 그러니 허 장군께서 좀 봐주시게.”
조천명의 직함이 허대륜보다 높았기에 그의 체면을 깎아 내릴 순 없었다.
“하면 조 장군이 보기에 그자를 어디에 묵게 해야 한단 말인가?”
“후원이 조용하고 오가는 이도 없던데… 그곳에 묵게 하는 게 좋겠네. 허 장군 생각은 어떠한가?”
허대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곳은 황상이 묵으실 곳이었다네. 그런 곳을 그자에게 내어 주다니… 자네는 그게 옳다고 보는가?”
조천명이 서둘러 대꾸했다.
“아무렴 더할 나위 없이 좋고말고!”
허대륜은 그의 반응이 조금 뜻밖이었다.
“그자의 신분이 아무리 존귀하다고 해도, 어찌 천위를 거스른단 말인가. 황상이 묵으실 곳을 내어 주는 건 아니라고 보네.”
조천명은 자신이 이 정도로 암시하면 허대륜이 얼추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리 둔하다니. 황제께선 황후 마마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탄다고 해도 분명 기뻐하실 것이다.
“전 부참장이 후원에 묵는다고 해도 황상께선 분명 개의치 않아 하실 걸세. 그러니 그리 조정해 주게.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뭐든 내가 다 책임지겠네.”
허대륜은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조천명의 말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알겠네. 조 장군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하니 전 부참장에게 후원으로 들라 전해 주시게.”
조천명은 허대륜의 말에 담긴 가시를 알아차리곤 좋은 마음으로 그에게 충고했다.
“장군, 내 지금 장군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네. 하지만 부디 전 부참장에게 불경을 저지르지 말게나. 그랬다간 나중에 황상께서 책망하실 걸세.”
감히 누가 황후에게 불경을 저지른단 말인가. 황제가 아는 순간 분명 그자의 명치를 걷어찰 터!
* * *
황제를 구출하는 것은 매우 엄중한 사안이었다. 지위가 높은 장수들이 대청에 모여 오랫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황제가 잡혀간 사실은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비밀을 지키라는 함구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첫째는 황제의 안위를 위해서였고, 둘째는 황제의 부재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번 일이 그리 좋지 않은 일인 건 분명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백천범 역시 회의에 참석해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허대륜이 모래 지도에 작은 깃발을 꽂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 명의 시위가 그녀의 뒤를 지켰다.
“이곳이 황상께서 붙잡히신 마을이고 여긴 적사성… 여긴 백성이네.”
허대륜이 말했다.
“마을에서 적사까지 곧은 관도가 있지만… 몽달군은 분명 관도를 버리고 숲길을 뚫었을 것이네. 만약 그들이 숲길을 통해 몽달로 돌아간다면 우리로선 추적이 매우 어렵네. 시간이 꽤 지체되었으니 지금쯤 그들은 이미 돌아갔을 듯하네만.”
자리에 앉은 이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허대륜은 또다시 작은 깃발을 모래 지도에 꽂았다.
“이곳은 몽달 도성인 패륜이로 백성과 두 개의 군郡을 사이에 두고 있지. 몽달군이 만약 황상을 패륜이로 데려갔다면, 분명 그 두 개의 군을 지나야 할 걸세. 그러니 그 길을 따라 병사들을 매복하면 황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네.”
다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백천범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 황상을 데려간 자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매복했다가 몽달군에게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더 의심을 살 겁니다.”
허대륜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몽달은 늘 우리 북쪽 국경을 교란해 왔네. 그들이 아니라면 또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전 부참장은 도성에서만 지내서 몽달인들이 얼마나 음험하고 야비한지 잘 모를 걸세. 게다가 그들은 매번 몽달인의 차림새로 나타난다네. 이는 자신의 신분을 굳이 감출 필요 없단 뜻이지.”
“만약 누군가 동월과 몽달의 전쟁을 부추기려 그런 짓을 했다면요?”
백천범이 말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사상자가 발생할 테고 누가 승리를 가져가든 양쪽 모두 근본을 해치겠지요. 만약 누군가 일부러 동월과 몽달의 전쟁을 부추겨 어부지리로 이득을 얻고자 한다면요?”
허대륜은 성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저리 터무니없는 말을 해 대다니!”
그와 동시에 세 시위가 동시에 검을 뽑았다. 대청에 앉은 이들은 다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백천범이 서둘러 영십삼에게 눈짓을 보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허 장군님,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도 경청하겠습니다.”
허대륜은 서늘한 눈빛으로 세 시위를 바라보며 분을 겨우겨우 억눌렀다. 시위는 주인을 보호하는 게 당연한 일이기에 그들의 행동에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전 부참장이라는 자가 눈에 몹시 거슬릴 뿐이었다.
“그래, 내 전 부참장에게 하나 묻지. 그 말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 있나?”
백천범이 말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연달아 대군 근처에서 손을 썼어요. 사실 도발이었죠. 목적은 우리가 몽달과 전쟁을 하게 하려는 것이에요.”
허대륜이 팽팽히 맞섰다.
“전 부참장, 어째서 그게 몽달의 본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몽달이 우리를 도발하여 전쟁을 치르고 싶을 수도 있는데.”
백천범도 이치를 따지며 논쟁을 벌였다.
“순전히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면 죽이면 되지, 무엇 하러 사람들을 잡아가겠어요? 동월 경내에서 많은 사람들을 잡아가는 건 그자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애초에 백성들을 죽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전쟁을 바로 할 수 있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