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5화
그는 그녀 위에서 내려오던 때를 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아주 작게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그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아가 숨고 싶었다. 그러다 또 조금 울적해졌다. 체력 하면 자신 있었던 그가 어찌 이리 짧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여색을 멀리한다고 해서 완전히 문외한인 것은 아니었다.
임무를 받고 밖으로 파견을 나갔을 때 대청 위에서 남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도 있고, 남녀가 시시덕거리는 소리도 들었기에 이리 시간이 짧으면 남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시… 실수였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그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영십일은 그녀가 깨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십일은 조용히 몸을 돌리곤 그녀와 등을 진 채 누웠다. 더는 그녀를 보지 않고 거리를 두면 마음이 조금은 안정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영십일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월아는 이미 방을 떠난 뒤였다. 그는 적잖이 놀랐다. 시위인 그는 잠귀가 밝은 편인데 어찌 월아가 나갔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지체된 듯했다. 어젯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하다 아침이 되어서 잠시 눈을 붙였다. 월아는 아마 그때 자리를 뜬 것 같았다.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탁자 위에 아침밥이 준비된 것을 발견했다. 죽은 아직 따뜻했다. 전병은 식은 것 같았지만 딱딱하진 않았다. 전병을 한 입 베어 무니 진득한 기름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그간의 아침밥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그는 빠르게 아침밥을 먹은 뒤, 묵용감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묵용감에게 죄를 고했다.
“노야, 잘못했습니다. 늦잠을 잤습니다.”
묵용감은 탁자 옆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눈 밑에는 옅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봄날의 밤은 지독하게 짧은 법이지. 나도 다 이해한다.”
그의 말에 영십일이 얼굴을 붉혔다. 무슨 대꾸를 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한 얼굴로 뒤통수만 긁었다. 묵용감 뒤에 서 있던 영십구가 그를 바라보며 놀렸다.
“십일 형, 하룻밤 동안 신랑이 된 기분이 어떠십니까?”
황제가 그를 놀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영십구의 말에 그는 예를 갖추지도 않고 맞받아쳤다.
“그리 알고 싶으면 오늘 밤엔 네가 가 보거라.”
묵용감이 말했다.
“십일,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됐다. 도성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상을 내리마.”
“아닙니다.”
영십일이 진지한 얼굴로 읍했다.
“노야의 근심을 더는 것이 이 십일의 본분인 것을요.”
묵용감이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십일, 이런 말을 묻는 게 좀 그렇지만 비상시니 어쩔 수 없구나. 어젯밤 의심할 만한 부분은 없었느냐?”
“맞아요, 십일 형. 어서 말해 봐요. 그 여인이 형님을 어찌했습니까?”
영십일은 영십구의 조롱도 들은 척 않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월아가 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지금껏 자신을 잘 먹이고 잘 길러 준 것이 상갑 등급인 사내와 자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굴을 붉히더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월아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묵용감도 조금 뜻밖인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그 한 마디 속에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다 큰 처녀를 키우는 게 상갑 등급인 사내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라니. 하지만… 상갑 등급인지 아닌지를 어찌 평가한단 말인가. 용모로? 신분으로? 체격으로? 아니면 종합적으로 따져서? 게다가 듣자니 상갑 등급인 사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다시 잘 생각해 보거라. 다른 말은 안 했느냐?”
그가 물었다. 영십일은 어젯밤 일을 곰곰이 곱씹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래도 수상한 점은 보고해야 했다.
“떠나고 싶으면 빨리 해치우라고 하다 말을 줄였습니다. 아마 너무 많은 걸 노출해선 안 된다고 교육받은 것 같습니다.”
묵용감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저 말의 중점은 ‘그 일을 빠르게 해치우는 것’이다. 방 관리와 그 여인들의 목적은 일을 해치우기 위함이었다. 그저 일만 빠르게 잘 처리하면 된단 말인가.
하지만 저리 잠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체 무얼 얻고 싶길래 꼭 그런 일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생각에 잠긴 그는 넋을 놓은 채 다시 차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어젯밤 영십일의 희생 때문인지 그들은 묵용감 일행에게 좀 더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 향긋하고 바삭한 전병은 찐빵보다 더 맛있었고 찻잎도 상급의 용정차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묵용감은 밖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뒷짐을 진 채 굽은 회랑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자 영십일과 영십구는 멀리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마다 누구의 방해도 원치 않았다. 이럴 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았다. 영십구가 이 틈에 영십일을 놀렸다.
“십일 형, 얘기 좀 해 봐요. 어떤 느낌이었어요? 좋았습니까?”
영십일이 눈을 흘기며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네가 직접 해 보면 알 것 아니냐.”
영십구가 탄식을 내뱉었다.
“말도 마세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니까요. 노야께서 저들이 형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절 내어 줄 거라고 하셨어요.”
영십일이 말했다.
“하면 소원을 이룬 셈 아니냐.”
“형님의 여인은 너무 흉포해서 싫어요. 분명 저에게 맞서겠지요.”
그 말에 영십일은 발걸음을 멈추고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게도 다른 여인이 배정되지 않았더냐? 네 여인을 넘어뜨리는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영십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십일 형, 하룻밤 부부라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더니… 그 말이 진짜였군요! 전 그저 한번 해 본 말인데… 이렇게 감싸시다니!”
영십일이 호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거 아니다.”
영십구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적잖이 신난 모습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월아랬죠? 이름까지 그리 기억하시는 데 아니긴요. 나중에 그 여인도 함께 데려가세요. 도성에서 혼인을 맺는 거예요. 그럼 얼마나 좋아요!”
영십일은 서늘한 눈빛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의 신분을 잊지 말거라.”
영십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분이 뭐 어때서요. 시위는 장가들지 말라는 법 있나요? 앞으론 피비린내 나는 곳이 아닌 한가한 곳에서 하는 일로 바꿔 달라고 해 보십시오. 분명 그리해 주실 겁니다.”
영십일은 오랜 시간 침묵한 뒤에 입을 열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거라. 어젯밤은 그저 노야께서 주신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지 다른 뜻은 없다.”
말을 마친 그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영십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황상의 말이 옳았다. 십일 형의 마음이 정말 움직인 것이다!
* * *
백천범은 대오를 따라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드디어 백성白城에 도착했다. 이곳은 북쪽 국경 지역 병사들이 주둔하는 곳으로, 백장간이 도성에 돌아오기 전에 총수로 지내던 곳이다. 그가 떠난 뒤에는 허대륜許大倫 장군이 그의 뒤를 이어 군대를 지휘했다.
허대륜은 무사 출신으로 용맹스럽고 충심이 강했다. 오늘날의 공훈과 관작은 그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위신이 높은 인물이었다. 황제가 몽달군에게 잡혀갔단 소식을 들은 허 장군은 곧장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당장 몽달의 도성 패륜이를 쳐서 황제를 풀어 주라고 압박할 생각이었다.
백천범은 황급히 그를 말렸다.
“허 장군님, 절대 안 됩니다.”
허대륜은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병영을 밖에서 그들을 맞이할 때, 그녀가 조천명과 함께 서 있길래 그저 눈길만 한 번 주었을 뿐. 누구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행색만 봐도 부참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조금 의아할 뿐이었다. 저리 마른 체격으로 어찌 부참장의 자리에 올랐단 말인가. 그런데 조천명이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왜소한 부참장이 먼저 소리를 내다니. 허대륜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조천명은 허대륜의 안색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허 장군, 황상께서 붙잡히시어 나도 조급하긴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다른 까닭이 있으니 일단 내 말부터 들어 보게.”
허대륜은 이치를 따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부장인 조천명의 신분이 있었기에 먼저 그의 체면을 살려 주어야 했다.
“하면 어서 안으로 드시게.”
조천명은 그날 백천범이 했던 분석을 낱낱이 전해 주었다. 허대륜은 한참 동안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몽달은 자신들이 잡아간 사람이 황상이라는 걸 아직 모른단 말인가?”
“바로 그 말일세.”
조천명이 말했다.
“그러니 지금 출병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네.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걸세.”
“하면… 우리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조천명은 무의식적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말했다.
“조 장군님 말씀이 맞습니다. 상대는 아직 황상의 신분을 모르고 있지요. 그러니 암암리에 조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황상이 어디에 계신지만 알아내면 구조할 수 있을 겁니다.”
허대륜은 전 부참장이란 자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자고로 무관은 무관다워야 하는데, 저리 비쩍 마른 자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적군과의 교정은커녕 이곳의 거센 바람에도 날아가 버릴 체구였다.
게다가 그는 규율을 매우 중시하는 자였다. 고작 부참장이란 자가 조 장군 앞에서 허세를 부리니 기분이 언짢았다. 그가 백천범을 바라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전 부참장, 몽달군이 황상의 신분을 모른다고 어찌 확신하는가?”
사실 백천범도 확신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직감이에요.”
허대륜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전쟁은 직감을 믿어선 아니 되네. 머리를 믿어야지!”
그의 야유에 백천범도 지지 않고 맞섰다. 백천범도 열심히 분석한 끝에 얻어낸 결론이었다.
“저도 머리는 있습니다.”
허대륜이 가차 없이 호통쳤다.
“내 보기엔 바보 같은데!”
그의 말에 조천명의 안색이 급변했고 몇몇 시위는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영십삼의 검은 곧장 허대륜의 목을 겨누었다. 그 반응에 조천명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무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