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3화
영십구가 말했다.
“노야, 저들이 대체 무슨 수를 쓰려는 걸까요. 설마 미인계를 쓰려는 걸까요?”
사실 묵용감도 아직 저들의 속셈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줄곧 적진에 침투하면 위험한 일이 도사릴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자신들을 잘 먹이고 좋은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도 모자라 밤에는 여인까지 보냈다. 이곳에서 아주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방 관리의 말이 아마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구나.”
그는 이 이상한 상황을 더 확실하게 파악하고 싶었다. 잠시 밖을 살펴보던 영십구는 안으로 들어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노야, 오늘 밤에는 이곳 상황을 좀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묵용감도 그럴 생각이었다. 만약 실종된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면 어째서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대체 어디에 숨겨 두었길래? 또 어제 만난 아기 병사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아이들도 밖에서 잡아 온 것이란 말인가?
아기들은 나이도 다들 엇비슷했고 훈련도 잘되어 있었다. 끌려온 것이라면 그리 질서정연하지 않을 것이다.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훈련하는 것도 불가능할 터.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가 지나 또 밤이 찾아왔다. 아직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세 여인이 또다시 찾아왔다. 어젯밤과 똑같은 모습으로 단장한 그들은 역시 같은 행동을 취했다.
묵용감은 그나마 사정이 더 나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여인은 알아서 그를 피했다. 묵용감은 편히 누워 있고, 여인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영십구는 역시 좀 더 젊은 편이라 흉악하긴 했지만, 여인은 그의 성격에 차츰 적응해 갔다. 여인은 이제 더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여인이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쓰려는 탓에 그는 밤새 눈을 붙이지 못했다.
영십일은 어젯밤처럼 도망치고, 여인은 그를 뒤쫓기 바빴다. 아침이 되자 영십일과 영십구는 부끄러움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했다. 묵용감이 그들을 흘기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그 여인들은 오늘 밤에도 올 것이 아니냐. 방법을 써서 그들을 제압한 뒤에 나가야 한다.”
영십구가 별안간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어찌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예,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묵용감은 진즉 생각했던 방법이지만, 그 여인들이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나온다면 방 관리가 어찌 나올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깨달았다. 방 관리는 계속 그 여인들을 데려다 치근거리게 할 생각이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니 계속 이렇게 대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백천범을 떠올리니 몹시 초조해졌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오늘 밤엔 반드시 상황을 똑똑히 밝혀야 했다.
또다시 저녁이 되자 여인들이 그들을 찾아왔다. 묵용감은 가장 능숙하게 처리했다. 여인의 허리띠를 잡아당겨 그녀를 침대 기둥에 묶었고 혹시 몰라 그녀의 혈 자리까지 짚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영십구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여인을 붙들어 맨 뒤, 입에 헝겊을 쑤셔 넣었다.
영십일은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세 여인 중 가장 억척스러운 그녀는 그가 제압하려고 하자 표범처럼 마구 발버둥을 쳤다. 너른 소매가 미끄러지며 그녀의 가늘고 하얀 팔이 드러나자 영십일이 남긴 붉은 자국이 곳곳에 보였다.
그 모습에 영십일은 죄책감이 들었다. 무력으로 연약한 여인을 제압하는 것은 대장부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는 좋게 타일렀다.
“힘을 그리 쓰지 마시오. 그러다 다칠지도 모르오. 당신을 어찌하려는 게 아니오. 금방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여인이 성을 내며 눈을 부릅떴다.
“날 이리 아프게 하다니!”
영십일은 그녀의 몸을 밧줄로 묶으며 말했다.
“그리 꽉 묶진 않았소. 하지만 도망가면 안 되오.”
여인이 별안간 눈시울을 붉혔다.
“대체 제가 무얼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겁니까?”
사흘 밤을 만난 사이 아닌가. 정을 나눴다고 할 순 없어도 여인의 낯이 익은 상황이었기에 영십일 역시 난처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나는 원… 원치 않소.”
“저처럼 어여쁜 여인을 원치 않으신단 말씀입니까?”
“서로 잘 알지도 못하지 않소. 그런 이와 정을 나누다니. 짐승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이오?”
여인이 냉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사내와 여인은 전부 다 그리 짐승처럼 굽니다.”
그녀의 말에 영십일은 말문이 막혀 가만히 묶기만 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겠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두 시진 후에는 혈도가 저절로 풀릴 테니까.”
여인이 멸시가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인을 이렇게 대하는 게 뭐 그리 잘난 재주라고. 재주가 좋으면 침대에서 제대로 보여 줘야지요.”
영십일은 그녀의 담대한 언변에 깜짝 놀라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때 밖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수건을 그녀의 입에 넣으려고 하다 그녀의 차디찬 눈빛에 가슴이 철렁였다. 결국 그는 자신과 타협했다.
“됐소. 어차피 소리도 못 지를 텐데…….”
그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채 황급히 문을 나섰다.
하늘에 먹을 엎지른 것처럼 깊은 밤이 찾아왔다. 달조차 구름 뒤에 숨어 어두운 밤. 굽은 회랑에 모인 세 사람이 조용히 움직이는데 별안간 지붕에서 등불이 켜지며 주변을 새하얗게 밝혔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불빛에 묵용감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커다란 등불 옆에 사람의 형태가 보였지만 누군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등불이 호수를 샛노랗게 비추자 놀란 물고기가 물속을 빠르게 헤엄쳤다. 물이 찰박찰박 튀는 소리가 주위에 들려왔다. 다시 복도 양쪽을 바라보니 시커먼 무리가 서 있었다. 몇 명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적지 않은 수였다.
그때 회랑 끝에서 걸어오던 이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방 관리였다.
“이리 늦은 시각에 어찌 방에서 쉬지 않으시고…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이왕 다 밝혀졌으니 묵용감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두 시위에게 눈짓을 보내자 세 사람은 일제히 팔을 벌려 위로 뛰어올랐다. 지붕을 지키는 사람이 적으니 그쪽을 뚫으면 그나마 가망이 있었다.
하지만 방 관리는 당황하기는커녕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침착한 모양새였다. 묵용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윽고 세 사람의 머리 위에 커다란 그물이 떨어졌다. 제 발로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그들은 손으로 그물을 뜯어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가는 줄로 만든 그물이 아닌 철사를 꼬아 만든 그물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칼이 있다고 해도 끊지 못할 정도로 강했기에 방 관리가 저리 태연자약했던 것이다.
묵용감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무려 과거에 군신으로 불렸던 동월의 황제가 물고기처럼 그물에 걸려 버리다니. 소문이 퍼지면 여러 나라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그들이 그물에 잡히자 방 관리는 곧장 수하를 시켜 그물을 제거하게 했다. 묵용감이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들에게 이리 좋은 게 있을 줄은 몰랐군.”
방 관리가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간 이곳에 다녀간 이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개중에는 기예가 뛰어난 강호의 고수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이리 준비를 해 두지 않으면 이곳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을 겁니다.”
묵용감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방 관리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분명 상인은 아니시겠지요.”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아는가?”
“대략 추측은 할 수 있지요. 이곳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까요.”
“대체 이곳의 비밀이 무엇인가?”
방 관리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곳에 계속 머무시다 보면 조만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곳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이제 이곳 사람이 되어야지요.”
“하면 지금은 떠나도 된단 말인가?”
“떠날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어째서?”
“저희의 마음을 아직 받지 않으셨잖습니까?”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참 이상하군. 천하에 억지로 여인을 밀어 넣는 경우가 다 있다니?”
“저희의 마음입니다. 만약 그 여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원하는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곳엔 다른 건 몰라도 여인만큼은 아주 많으니까요.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다들 밖에서 붙잡아 온 이들인가?”
방 관리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이 물었다.
“여인들을 받아들인 뒤에는 또 어찌해야 하는가?”
“그땐 이곳을 떠나시든 남아 계시든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가 말을 다시 이었다.
“저 여인들을 받아들이시면 노야의 활동 범위가 좀 더 커질 겁니다.”
묵용감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딱 한 명만 받겠네.”
그는 방 관리가 흥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 명으로 하시지요. 하면 잘 논의해서 결정해 주십시오.”
두 시위는 묵용감의 말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했다. 그들은 묵용감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우선 여인들을 데려가게. 우린 방에 들어가서 상의를 해 볼 테니.”
방 관리가 품에서 작은 호각을 꺼내 몇 차례 불자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이 밖으로 나왔다. 묵용감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여인들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떠나자마자 누군가 방으로 들어와 저들의 혈도를 풀어 줬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무릉도원인 것 같지만 사실 항상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 곳이었다. 여인들이 밖으로 나오자 묵용감은 두 시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잔에 물을 따르며 그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도 앉거라.”
두 시위가 황송해하며 대꾸했다.
“노야, 저희가 어찌 감히.”
묵용감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앉으라면 앉거라. 그리 서 있으면 내가 고개를 들고 너희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