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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02)화 (901/1,192)

제902화

영십일과 영십구는 안색을 굳혔다.

“그럴 수 없소. 우리는 노야를 모셔야 하오.”

“여러분, 어딜 가든 그 지역의 풍속을 따르는 겁니다.”

방 관리는 웃는 낯으로 대했지만, 어조는 고집스러웠다.

“규칙은 깨지 말아야 합니다.”

묵용감은 두 시위에게 손을 내저었다.

“상관없다. 오늘은 각자 자기 방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자.”

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영십구는 한 번 더 소리쳤다.

“노야!”

묵용감은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영십일은 영십구를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노야의 말씀을 듣자.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들을 따로 자게 하려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밤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곳의 비밀을 오늘 밤에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영십구도 그의 눈빛을 알아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묵용감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살며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였다. 방금 목욕을 했는지 길고 촉촉한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수려한 용모에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예를 갖추고 들어와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노야, 노야의 시중을 들고자 찾아왔습니다.”

여자의 치장과 움직임, 말투 때문에 묵용감은 ‘시중’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에겐 백천범 말고 다른 여인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여인이 찾아와 밤 시중을 들겠다고 말하자 그는 황당할 뿐만 아니라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탁자 옆에 앉아서 여자를 훑어보며 물었다.

“누가 당신을 보냈소?”

여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방 관리입니다.”

그녀의 말속에 북부 억양이 느껴졌다. 묵용감은 또 물었다.

“당신도 밖에서 잡혀 왔소?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집안에 또 다른 사람이 있소?”

여자는 살짝 몸을 떨더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를 힐끔 쳐다본 그녀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은 거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거요?”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야, 시간이 늦었으니 편안히 쉴 수 있게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장포 위로 손을 가져갔다. 묵용감은 급히 일어나며 정색했다.

“무슨 짓을 하려고?”

그는 목소리를 낮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의 분위기가 바뀌자 여자는 깜짝 놀라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전, 저는 노야의 시중을…….”

남자의 매서운 눈초리에 그녀는 뒷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말을 잇지 못했다.

“당장 나가거라!”

묵용감은 고함을 쳤다. 여자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노야, 전 나갈 수 없습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제가 벌을 받습니다. 노야! 제발 이곳에 있게 해 주세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묵용감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너의 임무라고?”

“예, 그렇습니다.”

“잡혀 온 다른 남자들도 모두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인가?”

여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의 목적이 대체 무엇인가?”

여자는 대답 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조차 알지 못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묵용감은 기왕 왔으니 마음을 편안히 가질 생각이었다. 천천히 이곳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상대 쪽에서 그에게 난제를 던져 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잠시 침묵에 잠겼던 그는 여자가 아직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시오. 나가기 싫으면 내가 자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그냥 여기 앉아 있기만 하시오.”

여자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노야, 정말 제가 밤 시중을 들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묵용감은 침대 가로 다가가 장막을 드리우며 냉랭하게 말했다.

“난 그런 거 필요 없소.”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노야, 제가 예쁘지 않아서 싫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다른 여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묵용감은 가슴이 철렁했다.

“여기에 그런 여인들이 얼마나 많길래 고를 수도 있단 말이오?”

“노야께서는 상갑 등급이셔서 마음에 안 들면 여자를 고를 수 있습니다.”

“상갑 등급이란 게 뭐요?”

“노야께서 신체검사를 하셨을 때 상갑이라는 평가를 받으셨습니다. 상갑 등급을 받으면 모두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먹는 음식과 자는 곳도 남들보다 낫고 밤 시중을 드는 여자도 더 예쁩니다.”

“상갑 말고 또 뭐가 있소?”

“갑, 하갑, 상을, 을 그리고 하을이 있습니다.”

묵용감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 시종 두 명도 밤 시중을 드는 여자가 있소?”

“그 두 분도 상갑이시니 당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옆 방에 있던 영십구는 바닥에 앉아 있는 여자를 경멸하듯 노려봤다. 방금 이 여자는 자신을 건드리려고 했다. 그는 곧장 업어치기를 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고 고통스럽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짓이세요? 저는 밤 시중을 들려고 온 사람입니다.”

영십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제가 예쁘지 않아서 싫으신가요?”

예뻐? 영십구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예쁜 여자일수록 더 위험했다. 그는 절대 속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 그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저를 내쫓지 마세요.”

영십구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여자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서 그에게 다가갔다. 물기를 머금은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손을 뻗자마자 영십구는 한 번 더 업어치기를 했다.

여자는 다시 비명을 질렀고 또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너무 아파서 이목구비가 다 찌푸려질 정도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밤 시중을 왜 이렇게 완강히 거절하는 걸까? 또 말로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단 말인가?

“당신은 도대체 왜…….”

“대화는 괜찮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영십구는 덧붙여 물었다.

“말해 봐라. 저들이 너를 보낸 목적이 무엇이냐?”

“당신의 밤 시중을 들라고 했어요.”

“…그런 다음에는?”

“그리고…….”

여자는 바닥을 기어서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았다. 머리를 풀어헤치는 그녀의 표정은 매우 초췌해 보였다.

“아마도 아이를 가지게 되겠죠.”

“…….”

영십구는 순간 낮에 봤던 아기 병사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장래에 후손을 남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여인과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이곳 사람들은 모두 얼빠진 멍청이란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경고했다.

“난 잠을 좀 자겠다. 또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싶지 않으면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반대편, 영십일의 거처에서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영십일은 서른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 정결한 마음을 유지하고 욕심이 없는 승려와 같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여자에게는 거칠게 대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여자가 다가오면 질겁을 했다. 때릴 수 없으니 자신이 도망갈 수밖에.

한 사람은 도망가고 한 사람은 그를 뒤쫓았다. 두 사람은 탁자를 에워싸고 몇 바퀴나 돌았다. 여자는 지쳐서 숨을 헐떡거렸다.

“왜 도망가십니까?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십니까?”

영십일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요?”

여자는 성질이 좀 급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잠자리 시중을 들려고 왔다고요. 왜 자꾸 물어요?”

“난 시중이 필요 없소. 얼른 나가시오. 난 혼자 자겠소.”

“안 돼요.”

여자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나가면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이에요.”

“안 나가면 내가 험하게 굴지도 모르오.”

“그럼, 저한테 어디 한번 험하게 해 보세요.”

여자는 기운을 차린 듯 또 추격전을 시작했다. 영십일은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엄포에도 저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영십일은 힘들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비록 그의 체력은 여인과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계속 이렇게 도망쳐 다니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의 거처에 여자가 있다면 황상과 영십구의 거처에도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은 도대체 여인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소리에 집중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영십구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그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도둑놈 심보를 도무지 버리지 못하는군.

그 발걸음 소리가 침대에 이르기도 전에 그는 장막을 뛰어넘어 발을 날렸다. 흐릿한 검은 그림자는 다시 벽 모퉁이로 날아갔다. 검은 그림자는 곧장 비명을 지르며 벽에 부딪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변명이 들려왔다.

“저, 전 그냥 물 한 잔만 마시고 싶었을 뿐이에요…….”

“…….”

묵용감의 방이 가장 조용했다. 그는 장막을 내리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여자는 탁자에 앉아서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날 밤, 영십일의 거처에서 일어난 소란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그와 여자는 거리를 두고 대치하다가 그대로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영십구는 얕은 잠을 자면서 소리가 나기만 하면 바로 장막을 뛰어넘어 무력으로 여자를 제압했다. 묵용감은 애당초 강한 기운을 발산한 덕분에 밤새 편안하게 푹 잤다.

* * *

이튿날 아침. 영십일의 눈 밑엔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영십일만큼은 아니었지만 영십구 역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묵용감만이 기운찬 모습이었다. 그가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여인을 끼고 밤을 지새운 것이냐?”

두 시위가 팔짝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노야, 절대 아닙니다.”

“아니라면 몰골이 어찌 그 모양이야?”

묵용감이 모처럼 만에 농을 건넸다.

“봄밤이 너무 짧아 너희가 기루에라도 찾아간 줄 알았다.”

영십구는 황제의 웃는 모습에 용기를 내어 캐물었다.

“노야, 혹 어젯밤…….”

묵용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노야가 어떤 사람이냐. 여인을 가까이할 사람처럼 보이느냐?”

영십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계시니 선녀가 앞에 있다고 한들 절대 눈길을 주지 않으실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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