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1화
영십일은 옷을 갈아입자는 말에 두려움이 생겼다. 집 안에 누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틈을 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대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무 머리의 아가들이 발밑에서 소리를 꽥꽥 내지르고 있으니 마음이 정말 심란했다. 아이를 사랑하는 묵용감도 너무 시끄러워서 온화한 마음이 진작에 사라진 뒤였다. 그에게는 청양 한 명이면 이미 충분했다. 이렇게 많은 아이가 떠드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을 치우시오. 도망가지 않겠소.”
방 관리가 먼 곳을 향해 손짓하자 눈썹에 점을 숨긴 사내가 다시 한번 우각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무 머리 아기 병사들이 벌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명은 뛰다가 넘어졌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일어나 뛰어갔다. 아가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은 그 광경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나타나기도 빨랐지만, 사라지는 건 더 빨랐다. 정말인지 굉장한 훈련 성과였다.
“세 분은 이리로 따라오시오.”
방 관리는 그들에게 손짓했다. 이곳은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묵용감은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영십일과 영십구는 얼른 그를 호위했다. 그들은 호숫가 옆 회랑을 따라 올라갔다. 그곳엔 가옥들이 줄지어 있었다. 방 관리는 그중 한 칸을 가리키며 영십일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서 지내시오. 안에 갈아입을 의복이 있으니 얼른 갈아입으시오.”
묵용감은 뜻밖에도 그들의 중간 방을 배정받았다. 두 시위가 그의 양옆 방을 쓰게 되다니. 이건 자신들에게 이득이 아닌가? 방 관리는 그의 표정을 보고 방긋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용담호혈이 아니오. 비록 당신들을 초청한 방식은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악의는 전혀 없소.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오. 당신들은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게 될 거요. 심지어 이곳이 좋아서 떠나기 싫을 수도 있소.
당신들의 신체검사 결과는 모두 상갑上甲이기에 가장 좋은 방을 배정해 주었소. 탁자 위에 종이와 붓이 있는데, 질문에 대한 답을 쓰고 나면 당신들은 서로의 방을 오갈 수 있소. 다만 다른 사람 방에는 갈 수는 없소.
당신들의 음식과 옷은 내가 책임질 것이오. 뭐든 필요한 게 있다면 나에게 말씀하시오. 세 분이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지내게 하는 것이 나의 책무요.”
묵용감은 그 말이 의외였지만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아기 병사를 보내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부터도 이상했다. 정말 방 관리의 말처럼 악의는 없는 것 같았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묵용감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했다. 벽 쪽에 침대가 놓여 있고 침대 위에는 얇은 면사 장막이 걸려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팔선상과 네 개의 걸상이 함께 있었다. 반대편 벽 쪽에는 붉은 장목樟木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저 안에 갈아입을 의복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방 안을 훑어본 묵용감은 탁자 앞으로 갔다. 탁자 위에는 찻주전자와 찻잔 몇 개가 있고 종이와 필묵이 놓여 있었다. 이건 그들이 도망갈 수 없을 것이란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며, 결국 이곳에 들어올 거라 예측했단 뜻이었다.
묵용감은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을 잡아 온 건 시험해 보기 위함인가?
그는 고개 숙이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의 성명과 하는 일은 무엇이며 같이 온 이들과 무슨 사이입니까?」
묵용감은 별생각 없이 붓을 들어 답을 썼다. 본인은 동월 상인이며 성은 황黃이고 명은 염범念帆이라 한다. 다른 두 사람은 시종이며 각각 십일과 십구라 한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노야께서 가장 좋아하는 것과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인으로서 가장 좋아하는 건 자연히 돈이었다. 제일 싫은 건……. 방 안을 서성거리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기로 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돈이고, 가장 싫어하는 건 남이 옷을 벗기는 것이다.
묵용감은 질문에 답을 다 적고 난 뒤, 종이를 들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방 관리가 아직 회랑에 서 있었다. 그는 곧장 질문지를 회수해 갔다. 잠시 후, 두 시위도 질문지를 들고 나오자 방 관리가 종이를 걷어갔다. 그는 자리를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그의 태도는 훨씬 나아졌다.
방 관리가 떠나자 영십일과 영십구는 즉시 묵용감의 거처로 들어갔다. 황제를 보호하는 것은 그들의 직무였다. 이왕 방 관리가 서로의 거처를 드나들 수 있다고 하니 그들은 묵용감의 거처에서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 질문지에 대한 정보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물은 질문은 같았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모두 똑같은 걸 썼다. 그들의 신분과 성명은 미리 입을 맞춰 놔서 틀릴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달랐다.
영십일이 대답한 내용은 이랬다. 노야께선 부인을 가장 좋아하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황제는 아내를 목숨처럼 사랑했으니 당연히 가장 좋아하는 건 아내일 것이다. 또 군주로서 그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겠는가?
영십구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노야께선 여러 나라 유람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밤을 가장 싫어한다. 동월 상인인 그가 부유하고 편안한 나날을 팽개치고 변방에 와 있으니 여러 나라 유람하는 걸 좋아한다는 건 좋은 핑계였다. 하지만 묵용감은 자신이 왜 밤을 가장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영십구에게 물으니 그는 부끄러운 듯 약간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마마께서 안 계시는 밤이 외로우실 것 같아서 그리 답했습니다.”
“…….”
그녀가 떠오르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의 범아는 군영에서 잘 있는 것일까.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영십일은 황제의 얼굴에 쓸쓸함이 보이자 그가 황후 마마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황제를 위로했다.
“노야, 십삼이 곁에 있으니 부인께서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 생각이 간절하구나.’
이런 말은 시위 앞에서 할 수 없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영십구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노야, 저들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뭘까요?”
묵용감의 차가운 시선이 찻주전자에 머물렀다.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 대답이 서로 다른데 거기서 뭘 알아채지는 않겠죠?”
영십일이 말했다.
“고작 그 몇 마디로 무얼 알아내겠느냐?”
묵용감을 스스로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우리의 신분과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
* * *
그 시각, 호수 맞은편 기슭에 자리한 방. 방 관리가 그들의 질문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첫 번째 질문에는 아무런 허점도 없이 똑같은 대답을 적어 놓았다. 그들의 대답이 사실인지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인지는 모른다.
두 번째 문제는… 문제지 세 장을 찬찬히 훑어본 그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그들의 대답이 엇갈렸다. 시종이 자기 주인의 취향을 모른다면 그건 진짜 시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충성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주종 관계는 사실이지만, 두 젊은이는 평소에 황 노야를 수행하는데 익숙한 시종이 아니다.
두 젊은이는 체격이 건장하고 무공이 상당했다. 눈빛도 매서운 걸 보면 대저택에서 정성 들여 키운 호위병 같았다. 또한 자주 그의 수행을 들지 않았다는 건 수하 중에 이런 고수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 노야가 만약 정말 상인이라면 분명 규모가 큰 거상巨商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체격 또한 꽤 괜찮았다. 하낭을 쉽게 걷어차 버린 동작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무공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상인이라는 신분과 이름은 모두 거짓일 것이다.
방 관리의 시선이 영십일의 질문지에 머물렀다. 그는 황 노야께서는 부인을 가장 좋아하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 적었다. 이건 진실일지도 모른다.
큰 가문은 보통 처첩이 많지만, 황 노야가 부인을 좋아한다면 부부 금실이 좋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첩을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건 신분이 높다는 뜻으로 그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니 분명 그는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돈을 좋아한다는 건 상인이라는 신분에 맞고, 여러 나라 유람을 좋아한다는 건 그들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그런데 밤을 싫어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 관리는 사람을 불러 조용히 몇 가지를 분부했다. 그 사람은 명을 받고 물러갔다.
저 세 사람이 위험인물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곳에 남겨 둘지 말지는 바깥의 소식이 돌아오면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하지만 내보내자니 꽤 아까웠다. 세 사람은 모두 신체검사에서 상갑을 받았고 체격도 좋았다. 분명 저들의 아이는 좋은 자질을 타고 날 것이다.
* * *
그날 하루, 묵용감은 모처럼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그 누구도 그를 찾아와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굽어진 회랑에 서서 푸른 호수와 저 멀리 산비탈 위의 단풍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곳곳마다 기이한 기운만 흐르지 않았다면 무릉도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양위를 하게 된다면 백천범과 이곳에 와서 한동안 지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라면 분명 이곳을 좋아할 것이다.
바람은 호수 위를 스치며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물결은 층층이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묵용감이 물결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데, 꽤 큰 물고기가 튀어 오르더니 다시 물속으로 숨어 버렸다. 영십구가 눈빛을 반짝였다.
“노야, 호수에 물고기가 많습니다.”
물이 매우 맑아서 잘 살펴보면 물속에서 물고기가 신나게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에 소인이 영양 보충을 시켜 드릴게요.”
방은 제법 괜찮았지만, 나오는 식사는 그저 그랬다. 황제가 드시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묵용감은 아무 말 없이 뒷짐을 진 채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영십일은 주위를 살피다 낮게 말했다.
“노야, 시각이 늦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굽어진 회랑을 따라 방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회랑 끝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물녘이라 잘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이 가니 다름 아닌 방 관리였다. 그는 살짝 허리를 굽히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황 노야께서 돌아오셨군요. 날이 저물었으니 어서 거처로 돌아가 쉬십시오.”
묵용감이 물었다.
“방 관리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소?”
방 관리가 웃었다.
“이곳의 규칙을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이곳은 어두워지면 각자의 방에 들어가 지내야 합니다. 다시 아침이 밝으면 바깥에 나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