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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00)화 (899/1,192)

제900화

눈썹에 점을 감춘 남자가 에이, 하고 탄식했다.

“저 괴로운 표정을 좀 보시오. 마치 우리가 죽이려고 하는 것 같네. 오늘 들어온 사람은 어째서 다 이 모양이란 말이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이렇게 시원스럽지 못하다니? 옷을 벗는 게 이렇게까지 곤란할 일이오? 설마 여자랑 해 보지도 못한 것이오?”

다들 웃기 시작했지만, 영십일은 그들의 웃음소리에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의 주변을 도는 여인의 향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희미한 향기가 그를 더욱 긴장시켰다. 하낭은 그의 탄탄한 근육을 만져보더니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아주 좋아요.”

영십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직 빨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의 손등에 닿았다.

“뭘 그렇게 두려워해요? 사내들은 여기 오면 다 행복해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당신처럼 이렇지 않아요. 답답하게 굴지 말고 좀 빨랑빨랑 벗어 봐요. 뒤에 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영십일은 아무 말 없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낭은 할 수 없이 몇 걸음 물러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눈썹에 점을 감춘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소리쳤다.

“뭘 이렇게 꾸물거리는 게요? 빨리 벗어 보시오. 여기는 규율만 지키면 즐겁게 살 수 있지만,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냉소를 지었다.

“우리에게도 말을 듣게 할 방법이 다 있지.”

영십일이 어디 협박을 받는다고 말을 들을 사람인가?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남자가 미간을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하자 하낭이 얼른 손을 흔들며 중재에 나섰다.

“화낼 필요 없어요. 제가 다시 잘 말해 볼게요.”

그녀는 두 걸음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십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그는 온몸이 불편했다.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의 것을 꽉 잡았다. 영십일은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곧장 천장으로 솟구쳐 올랐다.

바깥에서 그의 비명을 들은 묵용감과 영십구가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할 때, 영십일이 상의를 탈의한 채 뛰쳐나왔다. 그는 한 손에 자기 옷을 움켜쥐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이었다.

황실의 시위인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 영십구는 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얼른 영십일을 가로막았다.

“얼른 옷 입어요.”

영십일은 다급하게 옷을 걸치고 귀신이라도 오는 양 계속 뒤를 돌아봤다. 묵용감은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늘 냉정하던 영십일이 이렇게 놀랐을까? 그가 물었다.

“저들이 너를 어찌 한 것이냐?”

영십일은 시선을 피하며 감히 묵용감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고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낭이 한 짓거리에 그는 혼비백산하여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옷… 옷을 벗기고… 벗깁니다.”

그는 영십구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뱃속 깊이 감추고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묵용감은 더 묻고 싶었지만, 방 관리가 그에게 손짓했다.

“어서 들어가시오. 당신 차례요.”

묵용감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영십일을 보면서 속으로 단순히 옷을 벗는 일이 아니라는 의혹을 가졌다. 게다가 줄곧 충직했던 시위들이 왜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는 것일까? 묵용감이 안으로 들어가자 영십구가 영십일을 힐끔 쳐다보았다.

“십일 형님, 방금 왜 그리 소리를 질렀어요?”

영십일은 멍하니 되물었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고?”

“비명을 질렀어요. 노야께서도 다 들었어요.”

“…목이 간지러워서 그랬다.”

영십구는 웃음을 참으며 또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뛰쳐나왔는데요? 저들이 형님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어요?”

“아니,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영십일의 시선이 영십구의 바지춤으로 옮겨갔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십구, 넌 바지도 벗었느냐?”

“아니요.”

영십구는 시원스럽게 대답하더니 반문했다.

“형님은 벗었어요?”

“어떻게 벗겠느냐?”

영십일이 말했다.

“여자 앞에서 바지를 벗으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두 사람은 말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십일은 황제가 조금 걱정되었다.

“십구, 노야께서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겠느냐?”

“분명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영십구가 말했다.

“노야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내대장부는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하며,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했어요. 또한 대의를 위해 참아야 한다고요. 노야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시니 우리보다 훨씬 잘하실 거예요.”

“그래도 노야께서는…….”

영십일은 하늘을 가리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구오지존의 용체를 어찌 마음대로 드러내 보이겠는가?

묵용감는 방 안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탁탁 때렸다. 들어와서 보니, 그가 일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던가?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말라고? 무엇을 참고 어떻게 진정하란 말인가? 대의를 중시하라는 말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났다.

제왕의 체면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백천범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찌 다른 여자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있겠는가? 발가벗기는커녕 겉옷조차 벗고 싶지 않았다. 눈썹 밑에 점을 숨긴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들어오는 놈마다 이렇게 말을 안 들어서야 원! 앞에 두 사람은 어려서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무엇인가? 보기에는 젊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설마 그 나이까지 여자랑 손도 못 잡아 봤소?”

하낭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신분이 높은 분 같으니까 체면을 좀 세워 드리죠.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세요. 홑옷만 입고 우리에게 몸을 보이세요.”

묵용감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낭이 그에게 손을 대려고 하자 묵용감은 그녀를 발로 차 버렸다. 무공을 숨기기 위해 세게 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낭은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눈썹에 점을 감춘 사내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정면 승부를 하고 싶지 않았던 묵용감은 한 발 물러서며 밖으로 도망갔다. 영십일과 영십구가 대화하던 중에 황제가 뛰쳐나오자 영십구가 말했다.

“역시 노야께선 빨리 나오셨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쫓아 나오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상황이 틀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이 맞서 싸우려 하자 묵용감이 소리쳤다.

“흩어지거라!”

이미 계획을 망친 이상, 기회를 틈타 이곳을 탐문해 보는 게 더 나았다.

두 사람은 그를 따라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뒤쫓던 사람들은 품에서 작은 우각나팔을 꺼내 불기 시작했다.

묵직한 나팔소리를 듣고 묵용감은 발걸음을 멈췄다. 원군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서둘러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팔방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몰려왔다. 모두 두세 살짜리 아가들이었다. 어쩌면 더 어린 아기도 있을지 모른다. 걷는 것도 시원치 않아서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아가들이 우우우, 하고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그들을 둘러쌌다.

묵용감 등은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이게 원군? 아기 병사? 이렇게 어린 땅꼬마들을 어떻게 때리란 말인가?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멀리서 나팔을 불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묵용감은 두 발이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 움직일 수 없는 게 아니라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발을 들면 작은 무 같은 머리가 줄줄이 딸려 올라왔다. 그 역시 어린 아들과 딸이 있는 아버지였다.

작은 무 같은 머리들이 와글와글 떠들고 통통한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달려드니 그는 묵용청양과 묵용성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마음속에 가장 부드럽고 약한 곳을 건드리니 표정도 온화하게 풀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 아이들과 접점이 없던 두 시위는 정색하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좀 짜증이 났지만, 가장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은 할 수 없으니 일부러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떤 아이가 그들을 보더니 놀라서 으앙, 하고 울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언짢은 듯 그들을 노려봤지만, 영십일과 영십구는 곤혹스럽기만 했다. 묵용감이 꾸짖었다.

“뭘 하느냐? 얼른 안아서 달래어라. 울음까지 터뜨리니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두 시위는 서로 눈짓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인 영십구는 인내심이 없어서 뱀을 피하는 쥐처럼 아이들을 기피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도무지 움직일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영십일은 나이가 많은 형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우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양팔을 멀리 뻗어 아이를 안았는데 그게 마치 짐짝을 들어 올린 것처럼 보였다. 묵용감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렇게 들면 안 된다. 이렇게 안고 가볍게 흔들어라. 그러면 울지 않는다.”

영십일이 어떻게 그런 걸 할 줄 알겠는가? 황상이 흔들라고 하면 그냥 흔들면 되겠지. 좌우로 흔드는 걸 누군들 못하겠는가? 그가 아이를 들고 한바탕 흔들자 아이는 울음을 멈췄지만 그만 구토를 하고 말았다. 아이는 누런 오물을 그의 옷자락에 잔뜩 뱉어 냈다. 영십일의 안색은 살인자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묵용감은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다. 빨리 아이를 내려놓아라. 잘못하면 아이를 흔들어 죽이겠구나.”

그러는 중에도 작은 무 같은 아이들은 그들의 몸을 기어올랐다. 세 사람은 모두 키가 컸고 다리는 나무 기둥처럼 단단했다. 어떤 아이는 통통한 손으로 그의 다리를 꽉 잡고 매달렸다.

불쌍한 묵용감과 두 시위는 대단한 무공을 조금도 쓰지 못했다. 뜻밖에도 그들은 아기 병사들을 어쩌지 못해서 한 발자국도 도망가지 못하고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제야 뒤에서 방 관리가 다가와 허허 웃었다.

“세 분이 다 무공이 뛰어난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 동네 사람들은 때리고 죽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소. 보시오, 아이들이 너무 귀엽지 않소?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매일매일 함께 놀 수 있소.”

두 시위 모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어찌 이리 신비한 곳이 있단 말인가? 사람을 잡아 와서 때리거나 욕을 하지도 않았고 밥도 주었다. 그저 옷만 벗게 하더니 이제는 아이들을 데려와 상대하게 했다.

황실 시위로서 그들은 아무리 험한 일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들의 무공이 무용지물이었다.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전혀 없으니 갑자기 무기력해졌다.

방 관리는 영십일에게 말했다.

“형제는 옷이 지저분해져 불편할 테니 집으로 가서 갈아입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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