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9화
황제인 묵용감은 아무리 몸을 낮추어도 몸에서 풍기는 고귀함을 숨길 수 없었다. 게다가 세 사람이 외딴 섬처럼 뚝 떨어져 있으니 더욱더 이상해 보였다. 그는 묵용감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따라 나오시오.”
영십일과 영십구가 이내 묵용감의 앞을 가로막고 그 남자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들은 그와 무슨 사이요?”
영십일이 대답했다.
“우리는 노야의 시종이다.”
남자는 두 사람을 찬찬히 살핀 후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그럼… 당신들도 같이 나오시오.”
세 사람은 그 남자를 따라 방을 나섰고,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여기 관리인이오. 성은 방龐씨이니 방 관리라고 불러도 좋소.”
바깥은 청산녹수가 펼쳐져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썰렁해 보였다. 그들은 방 관리를 따라 산비탈을 올라갔다. 산비탈은 한쪽이 산과 맞닿아 있었고 반대쪽은 낭떠러지였다. 낭떠러지에는 키 큰 나무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산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산비탈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자 튼튼한 나무 울타리가 길을 막고 있고, 두 남자가 손에 장창을 들고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방 관리를 보고 살짝 허리를 구부려 인사하더니 얼른 문을 열어서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간 뒤에야 어떤 가옥 앞에 도착했다. 문에는 두꺼운 문발이 쳐져 있고 문턱이 높아 집안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 관리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한 명씩 들어가시오. 한 명이 나오고 나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오. 알아들었소?”
이곳은 도처에 신비로움이 배어 있었다. 방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시위로서 영십구는 황제가 위험을 무릅쓰게 할 수 없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기백으로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소.”
방 관리는 입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듯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영십구가 막 들어가려고 할 때, 묵용감이 그에게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처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자 가옥 밖에는 묵용감과 영십일만 우두커니 남아 있었다. 영십일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노야, 지금은 경비가 허술하니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묵용감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마음을 편히 하거라. 조급하게 굴 것 없다.”
영십일이 어찌 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마음속에는 황제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이제 적의 소굴을 알아냈으니 어서 돌아가 대군을 이끌고 오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황제가 조급해하지 않으니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가만히 문가에 서 있을 수밖에.
영십구는 고독한 용사처럼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등잔불이 내부를 환하게 밝히고 있어서 별로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탁자 앞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자 둘, 여자 하나. 그들의 시선이 우르르 그에게 쏟아졌다. 만약 남자뿐이라면 영십구는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렇게 크는 동안 여자와 교제할 기회가 드물었고, 더욱이 이렇게 여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태연하게 무표정을 유지하며 상대방을 훑어보았다. 두 남자는 모두 덩치가 우람하고 키가 컸다. 한 남자는 회색 옷을 입었고 다른 남자는 청색 옷을 입었다. 용모는 둘 다 평범해서 군중 속에 있으면 금방 찾을 수 없는 편에 속했지만, 시위로서 영십구는 아무리 평범하게 생긴 사람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남자의 귓불에 옅은 반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는 눈썹 속에 반점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여자는 대략 스무 살은 넘은 것 같았다. 위를 향한 눈썹에 눈매가 어여쁘고 생김새가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시위에게 있어 아름다운 여자는 위험과 같았다. 영십구와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대치했다. 한참 뒤에 눈썹에 점을 감춘 남자가 말했다.
“옷을 벗으시오.”
영십구는 의아했다. 순순히 겉옷을 벗었지만, 저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그에게 계속하라고 했다.
영십구는 아마도 그의 몸에 무기가 있는지 검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매통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탈탈 털었고, 또 겹옷의 가슴팍을 잡아당겨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음을 표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탁자를 더 세게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계속 벗으시오.”
영십구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보다가 상의를 모두 탈의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하반신에 시선을 보냈다.
영십구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 때리고 죽이는 건 상관없지만, 그의 바지를 벗기는 건 어림도 없었다. 군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는 없는 법.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양쪽으로 늘어뜨린 손을 천천히 말아 쥐고 그들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문득 황제가 준 암시가 떠올랐다. 지금 황제는 사로잡힌 척하는 중이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는 책임감에 그는 천천히 요대를 풀고 바지를 벗었다.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동생, 죽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옷을 벗으라고 한 건데 그렇게 긴장할 게 뭐 있어요? 무서워 말고 시원하게 벗어요.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영십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옷을 벗었고 그는 반바지 한 장만 입고 서 있었다. 이것마저 벗으면 이젠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설마 저 여자가 그의 몸을 보려고 이러는 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다니! 그는 또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여자가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팔뚝 위에 툭 튀어나온 두꺼운 근육을 어루만지더니 단단한 등을 토닥거렸다. 마치 장터에서 가축을 고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 참 튼실하네요. 전부 건강한 근육이야. 좋아요!”
눈썹에 점을 감춘 남자가 말했다.
“하낭이 저런 얘기까지 했는데 왜 더 벗지 않고?”
영십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무얼 하려는 것이냐? 거세라도 할 셈이냐?”
하낭이라고 불린 여인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걸 걱정했어요? 우리는 누구도 거세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들을 편안하게 할 뿐.”
그녀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탈의는 그만두죠. 다른 곳이 다 좋으니 그곳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영십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낭이 손을 뻗어 그의 것을 붙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에 그는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 그는 순간 손을 날릴 뻔했지만, 하낭의 밝은 얼굴에 손이 멈췄다. 다행히 하낭은 손을 탁탁 털고 자리로 돌아갔다.
“확인해 봤는데 괜찮아요.”
눈썹에 점을 숨긴 남자가 영십구에게 턱을 치켜세웠다.
“다 됐소. 옷을 입고 나가서 다음 사람에게 들어오라고 하시오.”
영십구는 수치스럽고 분한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를 불러들인 게 단지 그의 옷을 벗기기 위함이란 말인가? 전부 다 미친 것이란 말인가? 어쨌든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그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재빠르게 옷을 입고 방 관리를 따라나섰다.
문밖을 나서니, 영십구는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여인의 면전에서 옷을 벗은 적이 처음이었다.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나오자 방 관리는 영십일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묵용감은 영십구에게 물었다.
“안에 뭐가 있느냐?”
“세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 둘, 여자 하나.”
“들어가서 뭘 하라고 하느냐?”
영십구는 눈길을 슬며시 피했다.
“옷… 옷을 벗으라고 합니다.”
묵용감은 어안이 벙벙했다.
“옷을 벗기고 뭘 하는 것이냐?”
“아뇨, 아무것도 안 합니다.”
하낭이 그에게 했던 짓은 황상에게도 절대 발설하지 않고 뱃속에서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비밀로 할 작정이었다. 묵용감은 난감했다.
“너를 안으로 불러서 옷만 벗으라고 했을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했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무엇을 물어보더냐?”
“아닙니다.”
영십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옷 벗었다가 다시 입었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걸렸느냐?”
“소인, 남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묵용감은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사내대장부는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한다. 작은 일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내 말을 명심하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대의를 위해 참아야 한다. 사소한 일로 전체를 그르치면 안 된다. 그럼 이곳까지 괜히 온 것이지 않으냐?”
영십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좀 지루해서 묵용감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십일은 어째서 아직도 안 나오는 것이냐? 네가 들어간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지 않느냐? 아마도 옷을 벗지 않겠다고 버티는 모양이지?”
영십구는 황제보다 더 영십일을 잘 안다. 그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칼날에 흐르는 피를 핥는 게 생업이었다. 언제라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염라대왕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혹시라도 처자식을 힘들게 할까 봐 장가갈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주인과 형제들밖에 없었다. 영십일은 그들보다 나이는 조금 많았지만, 성격은 더 고지식한 편이었다. 평소에 여자와 교제할 기회가 없는 그에게 여자 앞에서 옷을 벗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때 영십일은 상의를 탈의한 채 두 손으로 허리띠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나왔고 온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하낭을 바라봤다. 그는 속으로 영십구에게 원망을 쏟아 냈다. 왜 그는 자신에게 이런 상황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았지?
그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여자 앞에서 바지를 벗는 건 좀……. 그는 영구가 도맡아 키워낸 제자였다. 그래서 성격도 영구를 닮아 융통성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