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8화
백천범은 병사가 가지고 온 향낭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왜 황상께서 향낭을 남겨두고 가셨을까요?”
포 부참장이 대답했다.
“황상께서 향낭을 남긴 것은 자신이 끌려갔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 아니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급할 때 소지품을 놓고 가는 것은 당연히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백천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황상이 향낭을 남겨 놓은 건 그가 ‘일부러 끌려갔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요.”
포 부참장이 물었다.
“전 부참장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뭐요?”
백천범이 대답했다.
“직감입니다.”
이십 년 동안 함께 지냈으니 그녀만큼이나 묵용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황제로서, 그는 백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것이지만, 더더욱 그녀를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잘 지켜 낼 것이라 믿었다. 포 부참장은 냉소를 지었다.
“부참장으로서 직감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다니 우습지 않소?”
조천명은 언짢은 듯 그를 힐끔 쳐다봤다.
“본 장군은 전 부참장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포 부참장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예전에는 조 장군을 존경했건만! 저리 아첨을 좋아하는 소인배인 줄 몰랐네. 그것도 총신에게 저렇게 아첨하다니 정말 수치스럽군.”
백천범은 조천명을 바라봤다.
“장군님, 지금 계획을 바꿀 수 있나요?”
조천명은 그녀의 의도를 깨닫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본 장군이 방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전 부참장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네. 황상께서는 영명하시고 무공이 뛰어나시니 이번 기회를 틈타 적의 내부로 들어가 탐색을 하려는 듯하네. 때가 되면 공격하는 게 나을 것이네.
해서 본 장군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고 즉시 출발하여 백성白城에서 주둔군과 합류할 걸세. 나머지는 추후 다시 협의하도록 하지.”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조 장군이 지금은 일군의 통수권자로서 입을 열었기에 부하로서 당연히 따를 뿐이었다. 자리를 파할 때, 조천명은 꾸물거리며 기다리다 아무도 없을 때 읍하며 물었다.
“마마, 아까 황상께서 일부러 잡혀가셨다고 했는데 그 말에 얼마나 자신이 있으십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황상께서는 이번 생에 다시는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어요.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
조천명은 황당한 이유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황상께서 안 돌아오시면 어찌합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백천범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황상께서는 영명하고 무공이 뛰어나세요. 게다가 곁에 고수들이 호위하고 있었어요. 황상이 원하지 않다면 아무도 그를 잡아갈 수 없어요.”
“…….”
조천명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밖에선 포 부참장이 진 참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참장 대인, 조 장군께서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황상께서 계시든 안 계시든, 전범에게 너무 공손하게 대하지 않습니까? 총신일 뿐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진 참장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조천명이 아첨꾼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조천명이 전범에게 공경한 태도를 보이는 데는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전범이라는 자도 좀 수상했다. 저번에 황상께서 불더미를 지키며 용모가 수려하고 키가 작은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전범이란 자가 황상과 아는 사이란 걸 알아챘다.
총신이란 소문 따위는 믿지 않았다. 황제는 수십 년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했다. 아내를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명성은 결코 헛된 소문이 아니었다. 황상께서 기껏 사내놈을 위해 자신의 결백을 망칠 리가 없다.
전범의 신분은 의심스럽지만, 분명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다. 조천명도 말하지 않으니 그도 굳이 묻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조천명처럼 전범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진 않았지만, 정도는 지켰다. 그가 아무런 말이 없자 포 부참장이 덧붙였다.
“설마 조 장군도 전범에게 눈독을 들이는 거 아닙니까? 아직도 막사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진 참장은 얼른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다행스럽게도 주변에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호통을 쳤다.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미쳤느냐? 더 이상 살기 싫은 게야?”
* * *
백천범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묵용감은 납치당한 척을 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백성들을 구하려고 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적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이놈들이 과연 진짜 몽달군인지 아닌지. 또 저들은 왜 동월 백성들을 잡아가고 또 어떤 이유에서 동월과 몽달이 전쟁을 하길 바라는 것인지.
백천범에게 소식을 전할 방법이 없기에 그는 일부러 향낭을 남겨 두고 왔다. 백천범은 그의 생각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향낭만 보더라도 그의 뜻이 모두 전해졌을 것이다. 다만 그녀와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달콤한 나날을 보내다가 갑자기 헤어지는 건 살을 베는 것 같은 고통과 다름없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걸 그는 지금 깊이 체득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를 걱정하느라 우울해진 심경은 도저히 감출 수 없어서 애써 꾸며 내지 않아도 붙잡힌 다른 이들과 표정이 똑같았다.
적들은 그들을 납치하자마자 검은색 천으로 눈을 가렸다. 밥을 먹을 때도 안대를 풀어 주지 않았다. 그는 이곳의 풍경뿐만 아니라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조차 알 수 없어 대략적인 시간과 걸어온 길을 짐작할 뿐이었다.
마침내 어떤 곳에 도착했고 누군가가 그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벗겼다.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어서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마치 거대한 협곡처럼 양옆이 모두 가파른 산봉우리였고, 아래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먼 곳에는 호수가 있었고, 가까운 곳에는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분명히 겨울인데도 푸른 산수가 어우러지고 산비탈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의 시간은 아직 가을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주위의 환경을 정확히 살피기도 전에 그는 방 한 칸에 떠밀려 들어갔다. 방 안에는 어떤 가구도 없이 앉는 자리만 있었다. 붙잡힌 십여 명은 모두 이 방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영십일과 영십구는 좌우에서 묵용감을 감싼 채 사방을 경계했다. 가운데 앉아 있던 묵용감은 시선을 떨구고 바닥을 바라봤다. 여전히 애통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누군가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여인의 손에는 큰 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따끈따끈한 찐빵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오는 동안 따뜻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뜨거운 찐빵을 보자 다들 눈빛을 반짝였지만, 감히 손을 내밀지 못했다. 뒤에 들어온 남자는 나무통 두 개를 메고 있었는데, 나무통 하나에서는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자는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온화하게 말했다.
“다들 배고프죠. 얼른 드세요.”
또한, 그녀는 나무통을 가리켰다.
“통 안에 국이랑 사발이 들어 있으니 국도 한 그릇씩 드시면서 몸을 녹이세요.”
어떤 사람은 입맛을 다시면서도 그녀를 경계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 놓고 드세요. 당신들을 독살할 거였으면 이렇게 멀리까지 데리고 오진 않았을 거예요. 겁내지 마세요. 여긴 아주 좋은 곳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영십일은 영십구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영십일은 먼저 앞으로 나아가 찐빵을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자신들은 굶어도 상관없지만, 황상까지 굶길 수는 없다. 그가 먼저 먹어 보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황상께도 드릴 수 있었다.
그들이 준 것은 아주 잘 만든 찐빵이었다. 말랑말랑하고 고소했다. 그가 두 입 베어 삼켜도 아무런 이상이 없자 그는 두 개를 더 가져와 하나는 황제에게 주고 하나는 영십구에게 주었다. 한 사람이 먼저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곧 벌떼처럼 몰려와 찐빵이 든 바구니를 둘러싸고 손을 뻗었다. 영십구는 그 틈을 타 얼른 국 세 그릇을 떠 왔다.
묵용감은 한 손에는 국 사발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찐빵을 들고선 서로 음식을 빼앗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백성들과 먹을 것을 놓고 다투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국을 담는 사발은 백자였지만 이가 많이 나가고 금이 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사발들은 각양각색이었다. 투박한 도자기, 상질의 도자기, 토기도 있었다. 어떤 그릇은 가장자리가 깨어졌고, 어떤 그릇은 바닥에 금이 갔다. 어떤 사발은 잔금이 가득했다.
한 바퀴 둘러보니, 온전한 그릇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짐작건대 그릇들도 아마 훔쳐 온 것이리라. 이렇게 모양도 들쭉날쭉하고 사용감도 있는 걸 봐선 말이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자 아까 왔던 남녀가 다시 들어왔다. 여자는 사발과 바구니를 다시 가져갔고 남자는 다른 나무통 두 개를 들고 왔다. 한 통에는 물이 담겨 있었고, 다른 한 통에는 물잔이 들어 있었다. 물은 찻잎을 넣지 않은, 그냥 끓인 물이었다. 물잔도 각양각색이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었다.
그 후에 오랫동안 아무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입구에 지키는 사람이 있어서 나갈 수는 없었다. 배부르게 먹고 할 일도 없으니 다들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고, 또 여기가 어딘지 추측하며 도망갈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방 안에서 사람들이 속삭이자 마치 모기 천 마리가 모여 있는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묵용감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속으로는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흉악해 보이지 않았고, 이들을 때리거나 굶기지 않았다. 단지 가두어 둘 뿐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대충 계산한 거리로 생각해 보면 여기는 아직 북쪽 국경 지대였다. 다만, 동월 국경 안쪽인지 아니면 몽달로 넘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젊었을 때 북쪽 국경에 있는 주둔지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만, 이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다른 곳은 모두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만 이렇게 생기가 넘쳐흐르다니… 뭔가 괴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영십일과 영십구는 묵용감 양쪽에 석상처럼 앉아서 입구를 바라봤다. 그들은 감히 다른 사람들이 황제에게 친한 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무서운 두 얼굴을 보고 다들 그들을 멀리했다. 방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외딴 섬처럼 따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 지나니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건장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는 앞에 온 두 사람처럼 상냥하지 않았다. 그는 냉담한 눈빛으로 모든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묵용감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