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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96)화 (895/1,192)

제896화

백천범이 언덕으로 두 걸음 내려가니 온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울부짖는 소리가 여전히 계속되었다. 어떤 이는 너무 오랫동안 울부짖어서 목이 쉬어 버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쉰 목소리는 끝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건 백천범이 두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가슴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속이 꽉 막힌 것 같았지만, 묵용감이 운다고 또 뭐라고 할까 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묵용감은 그녀가 속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울어도 괜찮소. 한바탕 울고 나면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품에 기대어 갑옷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다. 마음이 조금 편해지자 그녀는 눈물을 닦고 묵용감에게 물었다.

“황상, 어떤 계책을 써서 사람을 구해 오죠?”

묵용감은 먼 곳에 이어져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횃불은 산길을 따라 장사진을 이루며 길게 이어졌다. 이미 병력의 절반을 풀어서 산을 수색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상대가 곰이든 몽달군이든 간에 저들은 이곳 산림에 아주 익숙했다. 몇십 년 동안 이곳 숲에 똬리를 틀었기에 눈을 감고도 관군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도대체 상대는 어떤 놈들일까? 정말 몽달군이란 말인가? 그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백천범은 그의 팔을 껴안고 흔들었다.

“황상,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계세요?”

“짐의 생각에는… 대군이 계속 행군을 하면 사람들을 속일 수 없소. 우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빤히 알고도 마을을 기습해 사람을 잡아간 건 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백천범이 짙게 그린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설마 저들이 일부러 우리를 도발하는 거란 말이에요?”

“만약 그렇다면, 도발하려는 목적은 무엇일 것 같소?”

백천범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설마 전쟁을 일으키려는 거예요?”

묵용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몽달의 군사력으로 우리 동월과 전쟁을 하겠다? 그건 너무 주제넘은 생각이지. 그들은 기껏해야 소란을 피울 수 있을 뿐, 현재의 정세를 뒤바꿀 수는 없소. 하지만, 이렇게 동월 백성들을 납치해 가는 건 동월의 반격을 강요하는 꼴이지. 만약 정말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오.”

“어떤 이유요?”

“당신이 지난번에 언급한 것처럼 누군가가 몽달군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거요. 동월과 몽달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거지.”

묵용감은 말을 이었다.

“그땐 당신이 기상천외한 생각을 한다고 놀렸는데, 지금 벌어진 상황을 놓고 보면 일리가 있소. 저들은 굳이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마을에 와서 사람들을 잡아갔소. 이건 도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오.”

백천범이 반문했다.

“동월과 몽달이 전쟁을 벌이면, 누구에게 이득이 있을까요?”

묵용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월과 인접한 나라가 몇 군데 있지만, 몽달과 가까운 곳은 북제北齊뿐이오. 그런데 북제 군주는 항상 평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하지 않소.”

“황상,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묵용감은 저 멀리 불빛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만약 저들이 정말 도발하려 한다면 또 사람들을 잡으러 올 거요.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지.”

산림 수색은 한밤중까지 이어졌고 결국 묵용감은 군사를 철수해 진영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장사진을 이루었던 횃불들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주둔지로 향했다. 말을 타고 가던 백천범은 조금 지루했다. 옆에 병사가 들고 가는 횃불이 길가에 있는 나무를 비추자 그녀는 곁눈질로 자꾸 나무를 쳐다봤다.

“어, 저게 뭐지?”

묵용감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을 확인하더니 고삐를 당겨서 말을 멈추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 칼을 잠시 줘 보시오.”

백천범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건넸다. 묵용감은 직접 칼을 뽑더니 옆에 있는 큰 나무 위로 뛰어올라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베었다. 나뭇가지 끝에는 건실한 대추가 가득 매달려 있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손수건을 꺼내 땅에 깔고, 대추를 손수건에 가득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는 손수건 네 모서리를 곱게 묶어서 백천범에게 던져줬다.

“받으시오.”

백천범은 대추로 가득 찬 손수건을 받자 약간 얼떨떨했다.

“지금 시국이 어떤 때인데 저에게 이런 걸 주고 그러세요.”

가볍게 말에 올라탄 묵용감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청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국이 어떻든 삶은 계속 살아야 하지 않소?”

백천범은 대추 한 알을 꺼내 소매에 쓱 닦은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게 마음마저 즐거워졌다.

황제는 존귀한 신분에 맞지 않게 직접 나무에 올라 대추를 땄다. 주변에 있던 모든 병사가 그 광경을 모두 보았다. 황제가 황후를 어찌 대하는지는 그들이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는 직접 확인했다.

다들 속으로 경악을 했지만 감히 내색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좌선하는 승려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아무렇지 않은 척할 뿐이었다.

진영으로 돌아온 묵용감은 백천범의 잠자리를 시중든 후, 홀로 책상에 앉아 지형도를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백천범은 반쯤 감은 눈으로 그를 불렀다.

“황상, 밤이 깊었으니 어서 주무세요.”

짧게 대답한 묵용감은 그녀가 너무 추울까 봐 침대에 누워 이불을 함께 끌어안았다.

“어서 주무시오. 내일 아침에는 내가 따뜻한 찐빵을 사 오리다.”

백천범은 비몽사몽에 대답하더니 그의 품속에서 깊이 잠이 들었다. 하지만, 묵용감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뜬 채 장막이 늘어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 뒤, 품속에 있는 이의 호흡이 고르고 길어졌다. 그녀가 깊이 잠든 것이다. 그는 그녀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녀를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곤 책상 위에 있는 촛불 빛에 의지해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그녀는 매우 평온해 보였다. 흑단처럼 까만 머리카락은 뺨을 따라 흐트러져 하얀 피부가 더욱더 백옥같이 빛났다. 그는 참지 못하고 또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눈에서 코로 그리고 다시 입술로, 그녀가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조용히 웃으면서 이불을 여미고 그 위에 면장포를 덮은 후, 자신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영십삼은 문가에 있다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앞으로 다가가 예를 취했다.

“황상, 어찌 주무시지 않고 나오십니까?”

묵용감은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어슴푸레한 여명이 깔려 있어 곧 붉은 태양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날이 곧 밝을 것이다.”

묵용감은 말했다.

“전 부참장에게 줄 찐빵을 사러 가야겠다.”

“…….”

잠은 안 자고 찐빵을 사러 간다니!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날이 밝기까지는 아직 좀 시간이 남았습니다. 황상께서는 들어가 주무십시오. 소인이 가서 사 오겠습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이 직접 가서 사 오는 게 더 성의가 있겠지. 십일과 십구는 짐을 따르고, 나머지는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전하거라.”

영십삼은 동의하지 않았다.

“황상, 지금 이곳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호위 인원을 좀 더 늘리는 게 좋습니다.”

묵용감은 피식 웃었다.

“짐은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찐빵을 사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호위를 데리고 가서 무얼 하겠느냐? 둘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이곳이 안전하지 않으니 너희 셋을 남겨서 황후를 보호하는 것이다. 절대 방심하지 말고 잘 지키거라. 짐이 돌아왔을 때, 만일 황후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했다면 모두 너에게 책임을 묻겠다.”

영십삼은 난감했다.

“하지만…….”

묵용감이 어둡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더 말할 것 없다. 빨리 다녀오마. 일을 그르칠 수는 없음이야.”

* * *

해가 떠오른 동쪽 하늘이 불처럼 붉게 물들었다. 쓸쓸했던 풍경은 떠오르는 햇살 속에서 목욕이라도 한 듯 금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세상이 온화한 빛을 머금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백천범은 눈을 비비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묵용감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종군한 이래로 아침마다 보이던 사람이 없으니 좀 어색했다. 어제 그런 일이 생겼으니 그는 편안하게 자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일찍 일어나서 사람들과 대책을 상의하러 나갔을 것이다.

막사 안에 준비된 물로 그녀는 간단하게 씻고 밖으로 나섰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영십삼이 얼른 문발을 걷었다. 백천범은 그에게 물었다.

“황상은 어디 계세요?”

영십삼은 좌우를 살피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황상께서는 마마께 찐빵을 사 드리러 가셨습니다.”

백천범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가신 지 얼마나 됐어요?”

영십삼이 대답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가셨습니다. 소인이 대신 가겠다고 했는데 황상께서는 직접 가야 성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백천범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젯밤에 묵용감이 찐빵인지 뭔지 사러 간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때는 너무 졸려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를 말릴 걸 그랬다.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아침부터 찐빵을 사러 갔단 말인가?

“지금은 너무 위험한 때 아닙니까? 황상은 호위를 몇 명 데리고 가셨어요?”

“소인도 말씀을 드렸지만 황상께서는 빨리 오겠다며 십일과 십구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황상께서는 소인에게 마마를 잘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마마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하면 소인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지요.”

백천범은 문득 불안해졌다.

“어떻게 두 명만 데리고 다닐 수 있어요? 만에 하나라도 몽달군을 만나면 어떻게 해요!”

영십삼이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황후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상의 실력으로는 몽달군의 진영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과 십구가 함께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무술 경지가 꽤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몽달군이 근처에 포진해 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수평선을 바라봤다.

“날이 밝기도 전에 갔으니 이제 돌아올 시간이죠?”

영십삼도 마음이 조급했다. 황제가 언제 나갔는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실 황제가 돌아올 시간은 벌써 지났다. 하지만 아무리 길의 끝을 바라봐도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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