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4화
“곰이 산에서 내려왔다는 증거라도 있소?”
마을 주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허벅지를 탁 쳤다.
“기억이 났소. 내가 곰을 본 적이 있소. 그러니까 이십여 년 전의 일이오. 곰이 산에서 내려왔는데, 산기슭에 이르기도 전에 사람들이 물건을 시끄럽게 두들겨서 놈을 다시 산으로 쫓아냈소.”
“직접 봤소? 시각은 언제였소?”
“저녁 무렵이었소. 날이 막 어두워질 때쯤.”
마을 주민은 멀지 않은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곰이 바로 저기 있었소. 이렇게 크고, 이렇게 거대했소. 느릿느릿 걸어오는데 누군가가 그걸 보더니 대야를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소. 그리고 다들 물건을 두들기며 뛰어나갔소.
마구 시끄럽게 하자 곰은 도망갔소. 하지만 이튿날 저녁, 누군가 실종이 되었다는 걸 발견했소. 여자였소. 그래서 다들 곰에게 잡혀갔다는 걸 알았소. 그다음부터 매년 이런 상황이 발생하고 있소. 실종된 대다수가 모두 여자와 아이들이오.”
그는 좋은 마음으로 충고했다.
“그러니 어서 읍내로 가서 숙소를 찾아 그만 쉬시오. 밤에는 절대 길을 재촉하지 마시오. 곰이 남자를 잡아간 적도 있소.”
묵용감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곰들이 겨울에만 내려오는 거요? 다른 시기에 마을에서 사람이 없어진 적은 없소?”
마을 주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숲속에는 곰뿐만 아니라 호랑이도 있어서 수풀 속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적지 않소.”
“시신을 찾은 적 있소?”
“다 먹혔는데 시신이 어디 있겠소? 신발 한 짝이라도 찾은 게 다행이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라졌는지에 대한 통계가 있소?”
마을 주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그런 걸 집계하겠소? 한 해 한 해의 일을 어찌 다 기억하겠소?”
묵용감은 또 적사의 몽달군이 사람들을 납치해 간 것에 관해 물었다. 주민이 대답했다.
“그 일은 이미 동네방네 소문이 다 퍼졌소. 하지만 적사는 우리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 직접 보진 못했소. 도대체 몇 명을 잡아간 건지, 누구도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 없소. 아무튼 사람을 납치해 간 건 우리도 알고 있소.
젊은 사람들이 납치된 집 앞에서는 영감과 노파가 주저앉아 울며불며 저들의 죄상을 토로했지만, 안타깝게도 주둔군이 도착했을 때 몽달군을 일찌감치 멀리 달아난 상황이었소.”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소?”
“곡물을 빼앗긴 적은 있었소. 달자병은 곰과 마찬가지요. 시도 때도 없이 와서 피해를 주지만, 사람을 납치해 간 건 이번이 처음이오.”
묵용감은 턱을 쓰다듬으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저 산처럼 매우 깊어졌다.
* * *
며칠 동안 묵용감은 백천범을 데리고 또 몇몇 마을을 방문했다. 탐문해서 얻은 내용은 모두 비슷했다. 그는 조천명과 다른 수하들을 불러 탐문한 내용들을 쭉 알려 주었다.
조천명은 그제야 황제와 황후가 산수 놀이를 한 것이 아니라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원래 그는 황제가 출정을 하는데 황후를 데리고 온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그는 정중한 태도로 예를 갖추어 말했다.
“황상, 이런 일은 신하들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황상과 전 부참장은 귀하신 신분인데 이런 일을 하시다니요. 만약 사고라도 난다면 신은 만 번을 죽어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네. 전 부참장이 처음으로 먼 길을 떠난 셈이니 짐이 데리고 다니며 견문을 넓혀 주는 것이지. 알고 보면 일거양득인 셈이지.”
“…….”
말이 일거양득이지… 황상께서 하는 건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거였다. 다른 사람은 백천범의 신분을 모르니 깜짝 놀랐다. 다들 황제가 전 부참장에게 심상찮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느꼈다.
남자가 같은 남자를 좋아하다니! 과연… 천하의 사내들은 다 똑같이 도둑놈이라고 하더니, 궁중에 계신 황후마마만 불쌍하게 되셨구나. 조천명은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그들이 헛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알려 줄 수 없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중요한 사실을 언급했다.
“황상, 만약 마을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근 몇 년 동안 근방 백 리에서 사라진 인구를 따져보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 백성을 괴롭히다니… 정말 괘씸한 곰이 아닙니까?”
황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 장군은 정말 곰이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었다고 생각하는가?”
조천명이 황제의 말속의 뜻을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그는 입을 열었다.
“신은 이번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네의 견해를 말해 보게.”
“아마도 이건 곰이 한 짓이 아닐 겁니다. 이 산에 다른 맹수도 사람을 잡아먹는데…….”
황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에 부장인 조천명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는 순간 말을 바꿨다.
“또는 맹수가 사람을 잡아먹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건…….”
하지만 결론은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는 백천범이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걸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
“전 부참장, 자네가 말해 보게.”
백천범은 며칠간 황제를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보를 들었고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는 멋들어지게 정중한 예를 취했다.
“황상, 신은 이게 곰이 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곰은 대설이 산을 덮고 먹을 것을 찾지 못해야 산에서 내려오는데, 이곳의 곰은 대설이 오기도 전에 마을로 내려옵니다. 이게 첫 번째 의문점입니다.”
포 부참장이 끼어들었다.
“전 부참장, 어째서 모든 곰이 대설이 내린 후에 산에서 내려온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런 예외가 없단 말인가?”
백천범은 묵용감을 가리켰다.
“그건 황상께서 알려 주셨어요.”
포 부참장은 할 말을 잃었다.
“…….”
젠장! 뒷배가 너무 대단해서 안 물어본 것만 못하게 되었군. 황제의 언짢은 표정으로 포 부참장을 힐끔 째려본 뒤, 백천범을 향해 턱을 살짝 들었다.
“계속하게.”
포 부참장은 황제의 매서운 눈빛에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였다. 그는 속으로 성급했던 자신을 탓했다. 자꾸 그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곰이 사람과 가축을 동시에 잡아갔다고 하며, 동료를 데리고 내려와서 분업한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곰은 혼자 다니기 때문에 동료를 데리고 다니는 건 곰의 습성이 맞지 않습니다. 이게 두 번째 의문점입니다.
또 여러 해 동안 마을 사람들이 실종되었지만 곰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일한 목격담은 이십여 년 전에 한 번뿐입니다. 어떤 때는 여러 마을에서 한 날에 사람들이 실종되었다고 했어요. 이건 곰이 여러 마리라는 건데, 매번 사람의 눈과 귀를 피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도 논리에 맞지 않아요. 이게 세 번째 의문점입니다.”
백천범의 분석을 듣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전 부참장이 갑자기 임명되어 수상했지만, 머리는 좋은 편인 듯했다. 어쩐지 황상이 그를 다르게 대하더라니. 황제가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듯 부드럽게 물었다.
“또 다른 건 없는가?”
백천범은 그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낯선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백천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의문점이 더 있습니다. 여기는 겨울에만 사람이 실종되는 게 아니라 다른 계절에도 사람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산에 곰 말고도 호랑이가 산다고 하는데, 일 년 내내 사람이 실종되는 게 당연한 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합니다.
게다가 관아에서 관병들을 산에 보내도 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잡아먹혔다고 한들 뼈나 옷가지가 발견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른 물건은? 설마 짐승이 그것까지 다 먹었단 말인가요?”
“전 부참장의 분석이 맞네. 의문점이 이렇게 많으니 이번 일은 분명 이상한 점이 많지.”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은 여기에서 며칠 더 머물러야겠네. 상황을 좀 더 확인하고 다시 논의하지.”
몇 명의 참장들은 모두 조천명을 바라봤다. 조천명이 공손히 공수하고 예를 취했다.
“황상, 몽달군이 우리 동월 백성을 사로잡아 간 일이 더 예사롭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 일이 더 시급할 거라 여겼는데…….”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전 부참장이 방금 한 말을 자네는 듣긴 했는가?”
“신도 당연히 들었습니다. 분명 이곳의 일은 수상한 점이 많지만, 몽달 쪽은…….”
“자네는 이곳 주민들이 실종된 것과 몽달군이 우리 동월 사람들을 사로잡아 간 것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천명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두 가지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공통점은 없는 것 같은데……. 황제의 시선이 다른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두 가지 사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말해 보겠는가?”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백천범이 눈알을 굴리더니,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제가 알아요.”
다들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황제 앞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대다니… 예의는 어디에 팔아먹고 온 것일까? 백천범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겸연쩍게 웃었다. 그녀는 읍하고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상, 신이 알고 있습니다.”
“말해 보시게.”
황제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의 따위는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모두 사람이 실종되었고, 그들이 근처 마을 주민이란 사실입니다.”
“전 부참장은 역시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군. 아주 총명해.”
황제가 붓으로 지형도에 커다란 원으로 한 지역을 표시했다.
“실종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네. 단지 실종된 방식이 다를 뿐, 시골 마을에선 수년 동안 곰이 잡아갔다고 하고 적사성 안에선 몽달군이 백성들을 납치되었다고 하지.”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실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네.”
그가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큼 공수를 하고 대답했다.
“신이 알고 있습니다. 근처 마을이든 적사성 안이든, 실종된 대다수는 여자와 아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수의 남자는 있지만, 노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황제는 백천범이 이것까지 생각해 낼 줄 몰랐다. 그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역시 자신의 아내였다. 총명하기가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감정이 격해진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 번 쥐었다. 무릇 상급자가 아랫사람에게 칭찬의 표시로 어깨를 두드리는 것은 정상이지만, 이렇게 끈적끈적하게 꼭 쥐었다 놓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여러 장수들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다들 시선을 돌린 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 거리낌이 없으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