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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91)화 (890/1,192)

제891화

이 집에는 부인 말고도 할머니 한 명과 네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다.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뒤에 숨어 손님들을 훑어보았다.

위엄이 넘치는 묵용감이나 냉랭한 표정의 두 시종을 볼 때면 가슴이 섬뜩해졌지만 백천범의 따뜻한 미소를 보면 또 마음이 풀렸다. 백천범은 조손 삼 대와 친근히 대화를 나누었고 세 남자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황제는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곁눈으로 보니 백천범은 어린 여자아이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수줍어하던 소녀는 금방 그녀와 친해졌고, 가는 끈을 가지고 함께 실뜨기 놀이를 시작했다.

평소 어린아이들의 놀이에 전혀 흥미가 없던 묵용감도 막상 구경해 보니 꽤 재미를 느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백천범의 얼굴에 머물렀다. 삼십 대 초반의 사람이 아직도 저런 동심을 가지고 있다니……. 두 손으로 모양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까르르 웃었는데, 그게 꼭 어린 소녀 같았다. 부인이 차를 들고 나왔다.

“두아, 부인께서는 길을 서둘러 가느라 피곤하시단다. 가서 혼자 놀아라.”

두아라고 불린 소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백천범을 바라봤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아이랑 노는 걸 좋아해요. 저도 딸이 있어요. 열두 살로 두아보다 크지만, 심성이 두아만큼 착하지 않아요. 막내아들보다 더 장난이 더 심해서 골치가 아프죠. 두아는 제 딸아이보다 훨씬 착해요.”

두아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백천범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부인, 따님이 벌써 열두 살이나 되었어요? 그런 나이론 전혀 안 보여요!”

백천범은 아주 자랑스럽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저에겐 아이가 셋 있는데, 제일 큰아이는 벌써 열여섯 살이에요.”

이번에 두아 어머니는 아까보다 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정말 그렇게 안 보여요. 정말이에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젊은 아가씨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열여섯 살짜리 아이가 있을 수 있어요? 본데없는 시골 사람이라고 절 놀리시는 거죠? 부인, 그러지 마세요.”

그녀의 말은 묵용감을 웃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런 표정이 없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당신을 속이는 게 아니오. 우리 큰아들은 벌써 열여섯 살이오.”

무표정으로 있을 땐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그가 웃으며 말을 거니 두아 어머니도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그의 말에 감히 말대꾸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두아 할머니가 묵용감에게 물었다.

“노야와 부인께서는 도성에서 오셨지요?”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도성에서 왔소.”

이왕 대답을 시작했으니 속 시원하게 이곳을 찾은 이유를 밝혔다.

“이렇게 찾아와서 폐를 끼친 건 정말 부득이한 일 때문이오. 제 부인은 깨끗하게 씻는 걸 좋아해서 귀댁에서 목욕을 하고 다시 길을 가려고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소.”

그는 영십삼에게 눈짓을 보냈다. 영십삼은 얼른 은괴 한 덩어리를 건네며 말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두아의 할머니는 부들부들 떨며 감히 은괴를 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백천범이 은괴를 건네받아 대신 두아 할머니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받으세요. 이래저래 폐를 끼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래요.”

평소에 작은 은자 부스러기나 동전 몇 푼 정도는 만져 본 적 있으나 스무 냥짜리 은괴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아이고, 손님이 찾아온 건 좋은 일이요. 어찌 귀한 손님에게 돈을 요구할 수 있겠소. 더군다나… 이건 너무 많구려. 우리 바깥양반이 돌아오면 분명 날 혼낼 거요.”

“괜찮아요. 얼른 받으세요. 이건 제 부군의 작은 성의입니다.”

백천범은 은괴를 할머니의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두아의 어머니는 땔감 한 묶음을 들고 와 화덕에 쌓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좋아하는 백천범은 얼른 가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길이가 같지 않은 땔감을 비교해 가며 땔감으로 만든 작은 탑 위에 천천히 얹어 놓았다. 두아 어머니는 다시 한번 놀랐다. 도성에서 온 귀부인이 땔감 쌓는 방법을 알다니. 그녀가 호기심에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아십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제때 숙소를 잡지 못하면 바깥에서 잠을 청해야 해요. 그럴 때는 항상 불을 피우죠. 여러 번 해 보니 금방 알겠던데요?”

두아 어머니는 시종을 둘이나 데리고 다니는데 왜 그런 일을 부인께서 하셨는지 묻고 싶었지만, 오히려 귀찮게 하는 것 같아 말을 삼켰다. 그래도 백천범에 대한 인상은 더욱더 좋아졌다. 옆에 있던 두아의 할머니가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갑자기 끼어들었다.

“우리 마을은 읍내에서 멀리 있소. 해가 서쪽으로 이미 기울었으니, 어쨌든 노야와 부인께서는 숙소를 찾지 못할 거요. 싫지 않다면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길을 재촉하시게. 저녁에 우리 영감과 아들이 돌아오면 두 분에게 양고기를 고아 드리겠소.”

커다란 은괴를 한 덩이 받았으니 집안의 좋은 것들은 다 꺼내어 대접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백천범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묵용감을 바라봤다. 묵용감이 잠시 침묵하는데, 두아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하룻밤 쉬고 가세요. 여기 근처는 지금 안전하지 않아요. 아직은 대설이 내리지 않아서 산길이 막히지 않았으니 먹이를 찾아 내려온 곰을 만나면 큰일이에요. 더군다나 얼마 전에 몽달군이 적사赤沙에서 사람을 잡아갔대요. 여기는 적사까지 거리가 좀 되니까요. 그렇다고 아주 먼 것은 아니지만요.”

묵용감은 마음이 동하여 백천범과 의논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쉬었다가 내일 아침 일찍 다시 길을 재촉하는 게 좋겠소. 그렇지 않소. 부인?”

백천범이 그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부군의 뜻에 따르겠어요.”

별안간 피어오른 다정한 미소에 묵용감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부드럽게 그녀를 응시했다. 두아 어머니는 그들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남편과 결혼한 지 불과 사오 년밖에 안 되어서 아직 애정이 끓었지만, 남들 앞에서 저렇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들은 밭에서 일을 마치고 양 떼를 몰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두아는 얼른 뛰어나가서 집에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두아의 어머니도 함께 나가서 작은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지나가던 장사꾼이라는 말에 두 사람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손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집안에 남자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묵용감은 과묵한 태도를 바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을의 수확량은 어떤지, 농작물은 잘 자라는지, 소와 양을 얼마나 기르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입담이 좋은 두아의 할아버지는 곧바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리 유창하지 않은 관화官話로 끊임없이 말을 쏟아 냈다. 묵용감은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물어보다가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었다.

“아까 두아 어머니가 이야기하던데… 몽달군이 적사에서 사람을 잡아갔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오?”

두아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누가 알겠소? 어느 날 갑자기 몽달 군대가 적사성 안으로 돌진해 와서 보는 사람마다 잡아갔소. 듣기로는 수십 명을 잡아갔다고 하더군. 식량도 약탈해 갔다고 했소. 주둔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멀리 달아난 후였다고 하오. 그동안 인심이 흉흉해서 아무도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

“몽달군은 언제 왔소?”

“저녁 무렵에 와서 물건과 사람을 빼앗아 달아났소. 주둔군이 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어디로 쫓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소.”

“몇 명이나 잡아갔소?”

“어떤 이는 스무 명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십여 명이라고 하오. 구체적으로 몇 명이 잡혀갔는지 우리도 모르겠소.”

“몽달군이 확실한 것이오?”

“본 사람이 모두 몽달군이라고 말하니, 틀린 말은 아닐 거요. 달자韃子(북방 민족을 속되게 이르는 말) 병사들에게 당한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 어찌 잘못 볼 수 있겠소?”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소?”

“식량이나 돈을 빼앗아 간 적은 있어도 이번처럼 사람을 납치해 간 건 처음 있는 일이오.”

궁중과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두아네 집에서 내놓은 것들은 꽤 훌륭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목욕을 하는 방에는 커다란 나무 욕통이 있었다. 두아 어머니가 욕통을 안팎에서 여러 번 닦으며 쑥스러운 듯 백천범에게 말했다.

“부인, 좀 낡았지만 아쉬운 대로 쓰십시오. 우리는 시골 사람들이라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백천범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두아 어머니는 목욕물을 적당한 온도로 섞는 것을 도와주고 문을 닫고 나갔다.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너무 편안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행군은 정말 고된 일이지만, 황제라 해도 그를 견뎌야 했다. 사실 그녀는 고생하는 게 두렵지 않았고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군이 그녀를 걱정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그는 항상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썼다.

욕탕에 몸을 담근 백천범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큰 만족감을 얻었다. 한참 눈을 감고 목욕을 즐기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급히 몸을 돌려 보니 문 아래의 좁은 틈새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누구예요?”

“나요.”

낮고 온화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백천범은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문 앞에서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지켜 주겠소.”

“문이 닫혀 있잖아요. 밖에는 추우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불을 쬐세요.”

“당신은 어서 씻으시오. 난 전혀 춥지 않소.”

묵용감은 팔을 소매 속에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쪽 국경의 밤하늘은 드높고, 별은 더 크고 밝았으며 달빛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단지 바람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가 참지 못하고 가볍게 발을 동동 구르자 그 소리가 백천범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시골은 치안이 허술해서 그는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문밖에서 지키고 있는 것이 더 마음이 놓였다. 만일 어떤 멍청한 놈이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의 손에 박살이 날 터였다.

백천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밖이 추운 건 그녀도 알고 있었고, 묵용감이 절대 돌어가지 않을 줄도 알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그녀에게 하늘 아래서 가장 다정한 부군을 두라고 했을까. 그녀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재빨리 씻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누군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서 수건을 가져갔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서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뒤를 돌아보니, 다름 아닌 묵용감이었다. 화가 난 그녀는 두 손으로 그에게 물을 뿌렸다.

“깜짝 놀라 죽을 뻔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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