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9화
이튿날 점심, 백천범은 푸른 풀을 말에게 먹였다. 양주자가 슬쩍 그녀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전범을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그의 목 위로 새하얀 검날이 닿았다.
“어딜 감히!”
양주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을 늘어뜨리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백천범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양주자인 걸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양 형이었군요.”
양주자를 따라 구경 왔던 다른 병사들은 나무 뒤에 숨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백천범이 시위에게 손을 내저었다.
“어서 칼을 거두세요. 놀라잖아요.”
시위는 칼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양주자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 양주자는 시위의 눈길에 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가 황제의 시위라는 걸 양주자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그가 어째서 전범을 주인처럼 보호하는 것이란 말인가? 백천범이 말했다.
“그만 가 보세요. 전 양 형이랑 얘기 좀 나눌게요.”
시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전 부참장님, 그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을 듯합니다. 황상께서…….”
황상은 질투가 심해서 이 사실을 알았다간 저자의 가죽을 벗길지도 몰랐다.
“그럼 뒤로 몇 걸음만이라도 물러나세요. 여기 그렇게 서 있으면 양 형이 입도 떼지 못하니까요.”
백천범이 말했다.
“제가 죄인도 아니고, 다른 이와 대화도 못한단 말이에요?”
그 말에 시위는 곧장 예를 갖춘 뒤 다섯 걸음 정도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양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위가 멀리 떨어지자, 양주자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천범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곁눈으로 검을 만지작거리는 시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곧장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시위를 바라보니 여전히 검에 손을 대고 있긴 하지만, 더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시위의 손이 드디어 검에서 떨어졌다. 그는 전범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당췌 알 수 없었다.
“전 형제.”
그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방금 저분이 전 부참장이라고 부르던데… 며칠 만에 진급을 한 것인지요?”
백천범이 겸손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저 보잘것없는 관직이잖아요. 그리 말할 게 못 됩니다.”
양주자가 재빨리 대꾸했다.
“부참장이 보잘것없다니요. 게다가 행군 중에 진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분명 남들보다 뛰어나셔서 황상께서 전 부참장을 중시하시는 거겠지요.”
백천범이 어색하게 웃었다.
“특별한 것도 없어요. 저는 그저 황제를 모시며 심심풀이 장난…….”
그때, 시위가 다가와 말을 전했다.
“전 부참장님, 황상께서 이쪽으로 오시랍니다.”
고개를 돌리니 황제가 저 멀리 서서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천범은 탄식을 내뱉으며 양주자에게 손을 내저었다.
“전 이만 가 봐야 해서요. 나중에 짬이 나거든 또 얘기해요.”
양주자는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차가운 시선에 등 뒤에서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와 백천범이 막사로 들어가자 나무 뒤에 있던 이들이 양주자를 둘러쌌다.
“어서 말해 봐. 대체 어찌 된 거야? 전 형제는 황상의 시위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시위가 전 형제를 지켜 주는 거야?”
양주자가 말했다.
“전 형제는 시위가 아니라 부참장이래. 황제 곁에서 총애 받는 부참장이라고.”
“공공이 아니라?”
“당연히 아니지.”
양주자가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그만 패배를 인정하고, 돈부터 꺼내.”
내기에 진 이들은 울상을 한 채 양주자의 손에 동전 두 닢을 올려 주었다. 양주자가 동전을 세며 헤벌쭉 웃었다.
“앞으로 공공 소리는 절대 입에 담지 마. 상부에서 알게 되면 분명 뼈도 못 추릴 테니까.”
누군가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참장이면 그 위에 참장도 있고, 부장인 조 장군님도 계시는데 어찌 홀로 황상을 모신단 말이야?”
“그것도 몰라?”
또 다른 누군가 목소리를 낮추고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관리 중에 전 부참장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을 노리개로 삼는다잖아. 황상께서도…….”
양주자가 손을 뻗어 그자의 머리통을 쳤다.
“감히 황상을 헐뜯다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어? 난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다른 이들도 하나둘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못 들었네. 아무것도 못 들었어.”
말은 그렇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전 부참장이 황제의 총신인데 그림자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밤에도 함께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들 이 소문에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황제는 처를 목숨처럼 아끼기로 유명한데 남자 신하를 총애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 *
백천범을 막사 안으로 끌고 온 묵용감이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아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소?”
백천범이 물었다.
“왜 못 해요? 막 부대에 합류했을 때 양 형이 절 도와줬어요. 오늘은 우연히 마주쳐서 몇 마디 나눈 것뿐이라고요.”
“양 형?”
황제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의 신분을 잊지 마시오.”
백천범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부참장이잖아요. 부참장이 병사를 만났는데 얘기도 못 나눠요?”
황제가 눈을 희번덕였다.
“당신이 부참장이오? 당신은 짐의 황후요. 존귀한 신분인 황후가 어찌 아무나하고 말을 섞는단 말이오?”
백천범이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지금은 부참장이잖아요. 그것도 황상께서 봉해 주셨죠.”
황제는 그녀의 고집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꼬집었지만 옷이 너무 두꺼워 살이 잡히지도 않았다. 백천범은 몸을 틀며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더 성이 난 묵용감은 당장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싶었다. 백천범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뻔뻔하게 굴어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있을 때만 순순히 져 주었다.
처음엔 황제의 출전에 황후가 종군하는 게 아름다운 미담으로 남을 것 같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군대는 몇 년간 금욕을 해 온 사내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여인을 만나면 눈이 돌아가지 않을까?
게다가 자신의 부인처럼 절세가인이라면… 아무리 군대를 엄히 다스리는 동월이라 할지라도 어떤 난잡한 생각을 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묵용감은 당장이라도 백천범을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 있었다. 황제인 그의 말은 중천금이었다. 약속해 놓고 어찌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단 말인가? 설령 말을 바꾼다 해도 백천범이 불처럼 화를 낼 테니 안 될 일이었다. 또 막상 그녀를 보내자니 아쉽기도 했다.
결국 그는 그녀를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은 접고,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절대 백천범의 신분을 노출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총신에 대한 소문이 황제의 귀에도 전해졌다. 그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문에 대해 해명할 수도 없었다. 그가 백천범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것도, 백천범과 매일 밤 함께 잠드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명성에 흠이 가는 것도 황제였기에 묵용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 것을. 과거 군신이던 시절. 흉신부터 시작해 온갖 나쁜 이야기는 다 들었는데 이까짓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하지만 백천범은 그의 권위를 지켜 주고 싶었다.
“황상, 온종일 저를 허리띠에 둘러매듯 데리고 다니시면 안 돼요. 황상이 어딜 가든 제가 옆에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오는 거잖아요. 전 지금 부참장이니까 부참장다운 면모를 보여야죠. 절 너무 감싸실 필요 없어요.”
“안 되오. 부참장은 가짜고 황후가 진짜니까.”
묵용감이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짐은 저 저속한 놈들이 당신을 침 흘리며 보게 할 수 없소.”
백천범은 그의 터무니없는 질투가 우습기만 했다.
“전 아이를 셋이나 낳은 어머니라고요. 누가 절 침 흘리며 보겠어요? 제가 나이도 더 많을 거예요.”
“그래도 안 되오.”
황제가 투덜거렸다.
“혼인할 때 여자가 세 살이 더 많으면 궁합이 좋다는 말도 못 들어봤소? 아마 나이가 많다고 더 좋아할 것이오.”
백천범이 말했다.
“고작 세 살만 많게요? 열 살 넘게 많을 거예요. 황상이 절 좋아한다고 다른 이들도 절 다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요.”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짐의 황후를 누가 감히 싫어한단 말이오?”
백천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절 좋아한다고 해도 기분이 나쁘고, 절 싫어한다고 해도 기분이 나쁘세요? 너무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저녁이 되자 병사들은 주둔지에서 야영 준비를 했다. 저녁밥을 먹은 뒤, 묵용감은 백천범을 데리고 주둔지 주변을 산책했다.
날은 일찍이 저문 뒤였지만, 별이 밝게 떠올랐다. 언덕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니 짙은 남색 하늘에 커다란 은색 못이 가득 박힌 것 같았다. 백천범은 이렇게 큰 별은 처음 보았기에 깜짝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한참 동안 감탄을 내뱉다 말했다.
“정말 예뻐요!”
묵용감이 물었다.
“마음에 드오?”
“네.”
“하면 짐이…….”
묵용감은 습관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그녀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별은… 그는 말을 끊고 멋쩍게 웃었다.
백천범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어찌하실 건데요? 별을 따 주시려고요?”
부인 앞에서 늘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려 노력하는 묵용감은 뻔뻔하게 맞받아쳤다.
“그대가 마음에 든다면 짐이 당연히 따 주어야지.”
말을 마친 그는 두 팔을 벌리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달빛이 비추는 아래, 그는 마치 날개를 편 매처럼 힘차게 하늘로 올랐다. 백천범은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에 젖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늘 그녀 앞에서 진솔하게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묵용감은 이내 나무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발끝에 살포시 힘을 실어 그 힘으로 더 위로 올랐다. 지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처럼 비범한 기개를 뽐냈다. 백천범은 가슴을 부여잡고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가 별안간 손을 공중으로 뻗더니 무엇인가를 확 낚아챘다. 정말 별을 따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모습이 우습기도 했고 또 감동적이었다. 황제인 그가 이리 유치한 짓을 하는 것은 그녀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묵용감은 빠르게 땅 위로 내려와 주먹 쥔 손을 그녀 앞에 건넸다.
“별을 따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