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8화
두 시위가 여제를 힘껏 내리눌렀지만, 여제는 굽히지 않으려 발악했다. 더는 볼 수 없던 남제화가 소리쳤다.
“태자 전하, 이제 저분은 그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노파일 뿐입니다. 어찌 그리 힘들게 하십니까?”
묵용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제만 빤히 바라보았다. 여제가 마침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순간, 그는 비로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여제의 두 눈이 불룩해지더니, 연거푸 피를 뿜어댔다. 그녀의 고개가 비뚤어지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고였다. 묵용린은 여제가 잠시 혼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시위가 여제의 호흡을 확인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묵용린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빨리 여제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며칠은 더 살려 줄 생각이었는데… 여제가 이것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다니! 호인은 명이 짧고 악인은 천년만년 장수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직 쓰지 못한 수가 많은 그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남원의 신하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여제는 구미호처럼 목숨이 아홉 개는 있다고 믿던 존재였다. 늘 남원과 함께 살아가던 그녀였건만 갑자기 죽다니! 뜻밖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금 척연했다.
누구보다 심경이 가장 복잡한 사람은 남제화였다. 여제는 그의 가족이만, 동시에 원수였다. 그래도 결국엔 가족인 게 더 컸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에 품었던 원한이 전부 다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여제를 향해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신하들은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그를 따라 다 같이 머리를 조아렸다.
묵용린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는 높은 단상 위에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인간의 나약함에 감탄했다. 그래, 여제가 죽었으니 그 악몽도 그를 괴롭히지 않겠지. 이제 그의 원한도 전부 갚은 셈이었다. 그때 남제화의 뒤에서 한 신하가 소리쳤다.
“황후 마마!”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가 서둘러 그녀 곁에 달려들었다.
“불이, 어찌 된 것이오. 불이, 일어나 보시오. 불이…….”
묵용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 마마는 어찌 된 겁니까?”
남제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위지불이를 안은 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묵용린은 그의 뒤통수만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위지불이가 깨어났을 땐 이미 깊은 밤이었다. 그녀는 서너 시진은 족히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뜨니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남제화의 모습이 보였다. 이마를 짚은 채 두 눈을 내리깐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폐하.”
그녀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남제화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 기쁨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이, 깨어났구려.”
위지불이는 몸을 일으켜 앉아 이마를 쓸어내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병이 난 건가요?”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병이 난 게 아니라 그저 한숨 푹 잔 것뿐이오.”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유심히 살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소?”
위지불이는 조금 의아했다.
“병이 난 것이 아니라면서 불편한 데는 왜 물으시는 거예요?”
남제화는 그녀의 왼쪽 팔을 들고 혈 자리를 몇 군데 눌렀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평소에 콩알처럼 불룩 솟던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라, 제 고충은요?”
남제화가 말했다.
“원주原主가 죽어서 고충도 함께 사라졌소. 불이, 이제 고충의 독이 풀렸소.”
위지불이가 입을 쩍 벌렸다.
“독이 풀렸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놀란 눈으로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폐하, 폐하께서 그때…….”
남제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태황을 죽이는 게 싫어서 거짓말을 했소.”
여제가 이미 죽었으니 위지불이도 더는 추궁할 수 없었다. 그녀가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 막으신 덕에 묵용린 손에 가게 됐네요.”
남제화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게 그분의 운명일 테지.”
부부는 실의에 빠진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여제가 증오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증오 안에 또 다른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남제화는 너무도 슬펐다. 한참 뒤, 위지불이가 남제화의 손을 꼭 쥐며 물었다.
“폐하, 좀 어떠세요?”
“짐은 괜찮소.”
남제화가 입꼬리에 힘을 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후손들의 눈에는 혼군昏君이 되겠구려. 어찌 되었든 남원이 짐의 손에서 끊겨 버렸으니.”
“폐하는 혼군이 아니에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모든 이를 지키신 것이지요. 남원이 전쟁의 화마에 멸하지 않게 막으신 거라고요. 후손들도 분명 이해할 거예요.”
그녀는 별안간 떠오른 존재에 안색이 급변했다.
“폐하, 호아는…….”
“묵용린에게 물으니 용삼도의 부대가 그의 수하에게 공격받아 서로 한바탕 전투를 벌였다더군. 용삼도와 강암룡 모두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호아는 무사하여 돌아오는 중이라고 하오. 그러니 마음 놓으시오.”
“묵용린은 정말 치밀한 자네요. 폐하께서 태황과 호아를 미리 떠나보낼 거란 것을 다 예상했잖아요.”
“그리하지 않았다면 그가 무엇으로 짐을 협박할 수 있었겠소?”
위지불이가 남제화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폐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괴로워하지 마시어요. 동월이 강하고 남원이 약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에요.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잘 지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요.”
남제화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당신과 호아를 데리고 이 모든 것들에서 멀리 도망쳐 산속에 은거하고 싶소. 그러나 묵용린은 기어이 짐을 남원의 번왕으로 앉히려 하오. 불이, 짐은 떠날 수 없소. 이 궁에서 계속 머물러야 하오.”
“걱정하지 마세요. 저랑 호아가 폐하 곁을 지킬게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까짓것 번왕이면 번왕인 거죠. 남원은 여전히 남 씨의 통치를 받고 있잖아요. 저는 저주만 해결되면 번왕에서 다시 황제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봐요.”
남제화가 눈을 번득였다.
“위중청은 궁을 오가며 단 한 번도 저주의 비밀을 언급한 적 없었소. 보아하니 저들은 일찍이 대비하고 있던 모양이오. 우선 중요한 급선무는 비밀을 파헤쳐서 남원의 인구를 매년 늘리는 것이오. 우리 남원의 사내들이 얼마나 용맹한데, 인구만 늘어나면 강병을 기르는 것도 전혀 문제없소.”
위지불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남원 백성들과 후손들을 위해 폐하께서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해요.”
남제화는 묵용린이 여제의 뒷일을 처리하는 것에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그도 양보할 수 없었다.
여제가 아무리 못됐다고 한들 남원에서 한 시대를 호령하던 이였다. 그녀의 몸에도 남씨 가문의 존귀한 혈통이 흐르기 때문에 백성들의 존경은 받지 못하더라도 남원 황실의 존엄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그는 태황에 맞는 격식대로 일을 처리했지만, 늘 마음속으로 묵용린의 트집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미리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그가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묵용린은 내전에 틀어박혀 남원의 정무를 살필 뿐, 여제의 장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떤 참여도 방해도 하지 않았다.
며칠 안에 그는 남원의 주둔군을 새로 배치했다. 우선 용삼도의 부대를 성 밖으로 옮기고 성안과 황성은 이천행의 부하가 관할했다. 성 교외를 지키는 오만 대군은 이천행이 직접 통솔했다. 국경 지역의 주둔군은 전부 다 남원 경내로 옮겼고, 각각 지역과 거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배치했다. 이렇게 해야 누군가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동월군이 빠르게 제압할 수 있었다.
용삼도를 성 밖으로 배치한 것은 묵용린이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황성의 남제화와 성안의 수많은 부호, 대신들을 이용해 용삼도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감히 함부로 날뛰었다간 성 교외의 오만 주둔군과 황성 안의 동월군이 앞뒤에서 협공하여 용삼도를 참혹하게 죽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남원은 공식으로 동월의 서남쪽 영토에 포함되었고, 묵용린은 동월의 판도를 넓히는 첫발을 내디뎠다.
* * *
북쪽으로 갈수록 기온은 점점 떨어졌고 풍경도 점점 황량해졌지만, 백천범의 기분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녀에게 금과 옥으로 쌓아 올린 금궁을 나오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장엄하고 우뚝 솟은 궁전은 지금껏 늘 변함없이 그대로인지라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문을 나서면 늘 고분고분 그녀를 따르는 궁녀와 태감들뿐이라 정말 재미가 없었다. 북으로 가는 길은 풍경이 예쁘진 않았지만 광활한 하늘만 봐도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한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날씨가 추워지자 황제는 그녀에게 더는 갑옷을 입히지 않았다. 옷이 너무 무거워 걸을 수 없을까 봐 회색 면으로 만든 옷을 만들어 입혔다. 모든 병사들을 통틀어 백천범만 유일하게 갑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유독 튀는 회색 옷을 입은 그녀의 존재를 병사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황제 곁의 시종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황제가 어딜 가든 그녀는 그 곁을 그림자처럼 졸졸 쫓아다녔다. 심지어는 밤에도 황제의 막사에서 잠을 청했다. 게다가 어찌나 곱고 아담한지. 어떤 이들은 그녀가 황제의 시중을 드는 태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많은 태감 중에 한 사람만 데리고 나온 걸 보면 분명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태감일 것이다.
양주자는 안고 있던 땔감을 모닥불 옆에 내려놓았다. 때마침 옆에 있던 병사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봐, 어린 공공이 꿩을 굽고 있잖아. 분명 황상께 구워 드리려는 걸 거야.”
“이야, 제법 능숙한데. 궁 안에서 지내는 공공이 저런 것도 할 줄 알아?”
양주자는 그들이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 공공은 무슨, 나도 아는 사람이야. 전범이라고… 가 대인과 동문이래. 무술 실력이 엄청 뛰어나다던데… 아마 그래서 황상의 시위가 되었나 보네.”
누군가 그의 말을 반박했다.
“황상의 시위는 전부 다 궁에서 데려왔다고. 듣자니 영 대인께서 직접 골라 가르쳐서 충심이 엄청난 이들이라던데. 어찌 아무나 골라 황상 곁에 배정하겠어?”
“가 대인의 동문이라면 예전부터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지.”
양주자가 말했다.
“게다가 무술 실력도 좋으니 특별히 뽑았을 수도 있고.”
“황상의 시위 중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게다가 매일 밤에도 황상의 막사에서 잔다니까. 밤새 황상을 지키는데 교대도 하지 않고 말이야. 난 어린 공공이라고 봐.”
“전 형제는 공공이 절대 아니라니까.”
양주자가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말했다.
“내기할래?”
지루한 행군 중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내기란 말이 들리자 병사들은 서로 하겠다며 아우성을 쳤다.
“하자, 해!”
그저 재미로 하는 것이었기에 내기에 건 금액은 고작 동전 두 닢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