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7화
묵용린은 마침내 단폐에 올랐다. 금빛이 번쩍이는 옥좌 앞에 다다른 그는 오만한 미소를 짓더니 아래 있는 이들을 깔보듯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가 옥좌에 앉는 순간, 여제의 목에서 꾸르륵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를 쏟아내며 포효했다.
“저자를 당장 끌어내리거라! 당장 끌어내래도! 어서 끌어내리지 못할까……!”
이 옥좌는 그녀의 것이었다. 지금은 그녀가 앉을 수 없다고 해도 오직 남씨 성을 가진 황족들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녀가 암암리에 옥좌를 지켜냈기에 다섯 장로들에게서도 지켜 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은 남 씨의 강산이고 저 옥좌에는 남씨 성을 가진 자만이 앉을 수 있었다…….
그녀가 오랜 시간 지켜봤던 존재는 오직 묵용린뿐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동굴에서의 일을 줄곧 기억했다. 아직 어린아이였음에도 묵용린은 그녀를 포악하고 흉악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절로 겁이 날 정도의 눈빛이었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연약하고 어린 몸 안에 저리 강력한 영혼이 살고 있다니.
묵용린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녀는 다른 아이의 얼굴을 바꾸는 과정과 피가 낭자한 무서운 장면을 지켜보게 했다. 그녀는 어린 묵용린이 겁을 먹고 그녀에게 굴복하길 원했지만, 묵용린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는 짐승처럼 사나운 눈으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당시 그녀는 이 아이를 내버려 두었다간 분명 큰 우환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고, 그 아이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미루고 있었는데, 그때 위지문우와 남제화가 묵용린을 빼돌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마음이 약해져 그들의 충고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차 백천범이 자신을 증오할까 봐 묵용린을 동월에 돌려보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뼛속 깊이 후회했다. 그때 모진 마음을 먹고 묵용린을 단칼에 죽였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묵용린은 가볍게 옥좌의 팔걸이를 매만졌다. 그는 승리자를 연상케 하는 태도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십수 년간 본궁은 매일 어떻게 복수할까 고민했지. 당신을 죽일까도 고민했지만, 그건 당신을 너무 편하게 해 주는 것이라서. 부황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할 때 비로소 두렵다. 해서 난 당신을 죽이지 않으려고. 내가 이 옥좌에 어떻게 앉는지, 내가 어떻게 남원을 짓밟는지 살아서 직접 봐야 하니까.”
“묵용린, 사람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기다니!”
남제화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성을 냈다.
“네게 오만 대군이 있을지언정 궁에 데려온 이들은 수가 적지. 정말 소란을 피우겠다면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묵용린이 턱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제 쪽이 그리 적진 않습니다.”
남제화가 고개를 돌렸다. 대전 양쪽으로 동월군이 가득 차 있었다. 시선을 돌려 문밖을 살펴보니 밖에는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병사가 집결해 있었다. 남제화는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이리 짧은 시간에 저 많은 병사가 들어왔단 말인가. 한데도 남원의 황제인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니……. 이미 대세는 묵용린에게 기울어 있다는 걸 그 또한 깨달았다.
묵용린이 자신의 수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천행은 곧장 손을 휘저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들은 안으로 드시지요.”
곧장 발소리가 들려왔다. 혼란스러운 발소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조심스럽게 걷는 소리였다. 뒤이어 문턱을 넘어 대신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남제화를 발견한 대신들은 우물쭈물 망설이더니 결국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한쪽에 섰다.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남원의 문무백관이었다. 용삼도를 제외하고 조정에서 중임을 맡은 모든 이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이천행은 금빛이 번쩍이는 두루마리를 남제화에게 건넸다.
“폐하, 받으십시오.”
남제화는 두루마리를 받아 펼쳤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사실 조금 의외였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퇴위서가 아니라 스스로 왕이 되어 기꺼이 동월에 신복하여 동월 황제를 존주尊主로 여긴다는 성명서였다.
이는 남원이 자발적으로 동월에 속할 것이며, 동월의 서남 지역 영토로 흡수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는 이 영지의 번왕藩王이 되는 것이다. 즉, 동월은 단 한 명의 병사도 쓰지 않고 남원을 점령하겠다는 뜻이었다.
남제화에게 이는 매우 굴욕적인 일이었다.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거늘… 그렇다고 또 무슨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남원의 백성들을 일으켜 동월군의 칼에 찔려 죽게 하라고? 어진 군주인 그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왕으로 내려오는 것은? 고작 십 대인 소년의 손에 내려간다면 훗날 조상들은 어찌 뵌단 말인가? 그는 성이 나서 두루마리를 힘껏 내던지고 옥좌에 앉은 묵용린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전하, 기개가 남다르십니다.”
묵용린이 냉소를 지었다.
“성명을 읽지 않으신다고 본궁에게 다른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전하께서 제 외숙부가 아니었다면, 번왕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남씨 가문에서 왕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묵용린, 내가 네 외숙부인 걸 아직 알긴 하는구나. 한데도 이런 짓을 하다니… 천벌이 두렵지 않으냐?”
“국가를 위해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당대 군왕의 임무인 것을요. 본궁이 아직 황위에 오른 것은 아니나, 태자로서 조정을 돌본 지 오래입니다. 남원을 차지하는 것은 본궁의 오랜 염원이니 평화롭게 해결하는 게 가장 좋지요. 그리하지 않으신다면 남원의 병력으로 동월군에 맞서야 하는데… 그건 너무 무모하지 않습니까?
제가 폐하와 폐하의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예전과 그리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황권이 무너지고 동월에게 구속된다는 아주 작은 변화만 있을 뿐이지요.”
“권력이 막강하다고 하여 남원의 백성들이 네게 복종할 것 같더냐?”
묵용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아니지요. 사실 본궁은 남원을 구해 주러 왔습니다. 본궁은 남원의 인구를 늘릴 수 있거든요. 먹을 음식이 많아지고, 옷이 생기고, 생활이 풍족해지다 보면 백성들도 자연히 만족스러워하겠지요. 누가 권력을 갖든 그들이 관심이나 두겠습니까?”
남제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남원의 인구를 늘릴 수 있다고 하였느냐?”
“네, 위중청이라는 자는 폐하께서도 아시지요? 그자가 남원에 온 것은 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더니… 무려 팔 년의 시간을 쏟은 후에 그 원인을 찾아냈지요. 해서 본궁은 남원의 저주를 어찌 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모든 이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제마저도 감정이 북받친 모습이었다.
“대체 원인이 무엇이냐?”
여제의 물음에 묵용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코웃음을 쳤다.
“그걸 내가 왜 알려 줘야 하지? 본궁은 네가 죽을 때까지 모르게 할 것이다. 그래야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지.”
여제는 노여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슴께에는 방금 쏟아낸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태자를 가리키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제화가 물었다.
“하면 짐에겐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묵용린은 느긋하게 너른 소매를 털며 대꾸했다.
“알려 드릴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남제화가 던진 성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남제화는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린이 옥좌 팔걸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폐하, 정말 기개가 넘치십니다. 한데 그 기개를 얼마나 더 부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요.”
남제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태자, 날 위협하는 것인가?”
묵용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야 본궁도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폐하께 때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본궁이 여제를 붙잡아 데려올 수 있었다는 것은, 폐하께서 빼돌린 다른 이들도…….”
남제화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가 대꾸도 하기 전에 위지불이가 먼저 소리를 내질렀다.
“대체 누굴 붙잡았단 말입니까? 설마 호아입니까? 묵용린, 만약 호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내 귀신이 되어서라도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묵용린은 기분이 나빴다.
“대전에서 황후가 마구 소리를 내지르다니. 체통은 어디에 두시고. 폐하, 너무 오냐오냐 내버려 두시는 것 아닙니까?”
남제화는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찌를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역시 묵용린은 은혜를 모르는 놈이었다.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손을 쓰다니, 여제보다 더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위지불이를 꽉 붙잡았다. 위지불이는 문득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목숨은 중요치 않지만, 호아의 목숨이 묵용린에게 있었다. 저 역귀 같은 놈이 호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불같이 치솟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남제화의 손을 꼭 쥐며 냉정을 되찾았다는 걸 알려 주었다.
남제화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서려 있던 찬기가 조금씩 가시는 동안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묵용린이 수하에게 눈짓을 보내자 이번엔 영십칠이 성명을 주워 남제화에게 가져갔다. 남제화는 성명을 내던지지 않고 떨리는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의 두 눈에는 달갑지 않은 분노와 어쩔 도리가 없는 설움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성명을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여제가 미친 듯 발버둥 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안 된다. 그걸 읽을 수는 없다, 읽어선 안 돼…….”
하지만 덩치 큰 두 시위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기에 달려들진 못했다. 여제는 고통스러운지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엄청난 광기를 내뿜으며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화아, 읽으면 안 된다. 이곳은 남씨 가문의 천하이자 남씨 가문의 강산이다……!”
남제화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다시 목청을 높였다.
“나 남원 제12대 황제 남제화는 동월에 신복할 것을 원하며 금일부로 동월을 떠받들고 번왕으로 물러난다. 후세들 또한 이 약조를 지켜야 하며, 동월을 적으로 삼아선 아니 된다. 동월과 남원은 대대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군신이라 칭한다.”
낭독을 마친 남제화는 창백해진 얼굴로 몸을 휘청거렸다. 위지불이는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걷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남원의 신하들도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고요해진 대전 안,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저승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기이한 웃음소리였다. 한밤중에 피눈물을 흘리며 우는 곡소리처럼 들리기도 해서 절로 가슴이 벌렁댔다. 묵용린이 차가운 얼굴에 웃음기가 서렸다. 그가 미친 듯 웃는 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무릎을 꿇지 않지?”
여제가 혈담을 내뱉으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말거라!”
묵용린은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내렸다. 다른 이들이 무릎을 꿇든 안 꿇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여제는 반드시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가 수년간 꿈에 그리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그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야 했다. 여제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의 강산을 빼앗아 온다면 그녀에게 죽느니만 못한 삶을 선사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