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6화
궁으로 돌아오니 시종들이 전부 다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수가 묵용린이 데려온 이들보다 더 많았지만, 양쪽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컸다. 남제화에겐 시종과 시위가 들쭉날쭉 섞여 있었지만, 묵용린 곁에 있는 이들은 용맹스러운 대장부들이었다. 서늘하고 매서운 그들의 눈매를 보아하니 하나같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묵용린은 보전 앞에 도달한 뒤에야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뒷짐을 지고 궁전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지만,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는 남원 황궁의 지도와 지형을 훤히 꿰고 있었기에 그가 원하는 곳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남제화도 말에서 내려 묵용린 뒤에 섰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은 어찌?”
묵용린이 몸을 돌려세우더니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앞서 보였던 온화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본궁이 이곳에 온 것은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남제화의 안색이 급변했다. 자신을 더는 생질이라 부르지 않고 본궁이라고 칭하는 것은 친척 간의 예를 떠나 이제는 나라 대 나라로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동월의 태자인 그가 남원 땅에서 꿋꿋이 본궁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그 의도가 매우 분명했다. 남제화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말해 보라. 짐이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
묵용린은 앞으로 들라는 손짓을 하더니 주인 행세를 하며 말했다.
“안에서 얘기하시지요.”
말을 마친 그는 먼저 앞장섰다.
이곳은 남원 황제와 문무백관들의 조정이었다. 그런 곳을 이웃 국가의 태자가 자신의 궁전에 드나들 듯 함부로 들어서다니. 위지불이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남제화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태도를 바꾸려는 걸까요?”
남제화는 계단을 오르는 소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위지불이는 허리춤에 찬 완도를 만지작거리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폐하, 몇 명 데려오지도 않았는데… 차라리 우리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동작을 해 보였다.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제발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마시오. 궁에 들어왔다는 건 조금도 두려움이 없단 뜻이오. 오만 대군이 아직 성 밖에 있으니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수 있소. 적수가 되지 않는데 어찌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 한단 말이오. 타곤은 백 년 노성이오. 쉬이 망가뜨릴 수 없소.”
그가 안심시키듯 위지불이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소. 내가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겠소. 이미 모든 준비는 다 끝냈소.”
위지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대전에 들어서자 묵용린은 홀로 넓고 깊은 전당 안에 서서 높은 옥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제화가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태자 전하께서도 이젠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겠지.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것인가?”
묵용린이 몸을 돌려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본궁이 무얼 하고 싶은지는 폐하께서도 이미 아실 텐데요. 무엇 하러 굳이 물어보신단 말입니까?”
그의 말투는 낯설고 차가웠다. 조금 전 말끝마다 외숙부와 생질을 언급하던 태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남제화는 이제 현실에 직면해야 할 때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데, 묵용린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한 사람이 부족하군요. 그분이 안 계시면 일이 재미없게 될 텐데.”
남제화는 그가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금의 남원은 짐이 황제라네. 원하는 게 있거든 짐에게 말하면 되지. 무엇 하러 무관한 자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무관한 자가 아니니까요.”
묵용린이 냉소를 지었다.
“남원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그 여제는 일찍이 동월을 정변에 빠뜨릴 천면인 계획을 세웠지요. 우리 부황처럼 총명하신 분조차 그녀의 계략에 빠졌으니 참으로 대단한 자입니다. 그리 대단한 자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지켜보지 못한다면 너무 아쉽지 않겠습니까?”
“태자가 실망이 크겠군.”
남제화가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네.”
묵용린이 천장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어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자를 감싸시다니요. 본궁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여제가 폐하께도 독을 썼지요. 어미 된 자가 아들에게 독을 쓰다니…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일입니다.”
남제화는 수치심에 성을 내며 말했다.
“그건 우리 집안일이지, 너와는 무관하다!”
“어찌 본궁과 무관하단 말입니까?”
묵용린이 오히려 그를 탓하며 말했다.
“제게는 외조모가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그 외조모란 분께서 하마터면 우리 부황에게서 처자식을 뺏고 패가망신 당할 뻔했지만요. 이 원한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분이 자네 외조모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 웃어른의 잘못을 관대하게…….”
묵용린이 그의 말을 끊었다.
“어쩐지… 폐하께서 남원을 통치하는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더니만. 우리 부황께서도 정을 중히 여기는 분이신데, 폐하께서 부황보다 더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이 많아 좋고 나쁨도 구별하지 못하다니! 폐하 같은 분은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위지불이는 그의 비난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 또한 여제를 증오하지만, 묵용린이 남제화를 깎아내리는 건 싫었다.
“정을 중히 여기는 게 나쁩니까? 황제가 되면 무조건 고독한 군주로 몰인정하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몰인정할 필요까진 없지만, 본궁에겐 강산과 사직이 가장 중요하니…….”
위지불이가 코웃음을 쳤다.
“태자께서도 여제와 별로 다르지 않으십니다. 강산과 사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발밑에 두고 짓밟을 수 있단 말입니까?”
묵용린은 그녀의 질책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본궁과 여제는 당연히 다르지요. 본궁은 그자처럼 흑심을 품은 것은 아니니 이런 논쟁은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자를 데려오너라.”
태자의 말에 남제화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회색의 무명 장포를 입은 누군가가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 들어왔다. 눈에는 검은 천이 감겨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남제화도 여제를 증오했다. 화려한 지하 감옥을 뜯어내고 무명옷을 입히고 음식도 단출하기 짝이 없는 걸 내어주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혹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그는 가슴이 내려앉아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묵용린, 네 이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고개를 치켜든 묵용린은 앳된 소년의 분위기를 풍기며 턱을 까닥거렸다. 여제의 눈을 가린 천을 풀어 주라는 의미였다. 별안간 환한 빛이 보이자 여제는 잠시 적응하지 못했다. 다행히 대전 안이 그리 밝진 않았기에 살짝 실눈을 뜨며 빛에 적응했다. 그녀는 노발대발하지 않고 차분한 눈으로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화아, 어미 말이 맞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닌데… 네가 잘해 주었던 건 다 잊고 남원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지 않느냐.”
“입 다물어. 늙은 요괴.”
묵용린은 들끓는 분을 참지 못했다. 스스로를 충분히 갈고 닦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제를 보는 순간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황태자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남들이 들으면 그의 행실을 비웃을 터. 만약 모후의 귀에 들어간다면 더 큰 일이었다. 잠시 고민에 잠겨 있는데 남제화가 성을 내며 물었다.
“너는 궁에서 공부도 하지 않은 것이냐? 스승이 효도 가르치지 않더냐? 공자와 맹자의 말씀은 대체 어디로 배운 것이냐? 네 마음속 증오는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저분은 네 웃어른이자 외조모이시다. 태자라는 자가 시정잡배처럼 상스러운 말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으냐?”
묵용린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외조모라니요. 저희 어머니도 인정한 적 없는 어미입니다. 종실 족보에는 지금도 동월의 백 승상 가문 출신이라고 적혀 있단 말입니다.”
그는 여제 주변을 천천히 서성였다.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 여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독을 썼다. 비록 그의 수하가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제압한 상태였지만, 미리 대비해 두는 게 좋았다. 이 늙은 요괴는 차마 얕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여제를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다.
“십수 년간 짠 판인데 결국 실패로 끝이 나서 자신을 옥에 가둔 것도 모자라 아들과 딸을 낳고도 한 사람은 어미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어미를 옥에 가두다니. 정말이지 실패한 인생이 아닌가.”
여제가 물었다.
“내 인생을 네가 평가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네가 이곳에 온 이유다. 날 죽이러 온 것이냐.”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다. 아직 모르나 본데, 본궁은 위지 가문에서 보내는 자객을 암암리에 막아냈지. 당신이 잘 살아 있으면 하는 마음에. 그리고 오늘도 본궁은 당신의 목숨을 노리러 온 게 아니야. 죽는 건 쉽지만, 사는 건 더 어려우니까.”
그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궁이 이곳에 온 것은 네게 가장 중요한 것을 가져가기 위해서다. 본궁이 어찌 가져가는지 직접 지켜 보거라.”
말을 마친 그는 금색 피풍을 힘껏 뒤로 젖혔다. 눈앞에서 금빛 물결이 이는 듯했다. 물결이 가라앉으니 묵용린은 이미 단폐에 올라선 뒤였다. 여제의 안색이 급변했다.
“무얼 하려는 것이냐?”
그녀는 몸을 앞으로 당겼지만 묵용린의 수하가 그녀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남제화에게 호통 쳤다.
“뭘 그리 멍하니 있는 것이야? 어서 저 애를 막지 않고!”
눈앞의 그림자가 더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기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한 살이 된 묵용린이 네 발로 단폐를 기어오르던 모습과 열여섯이 된 묵용린이 오만불손하게 단폐를 오르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는가 싶더니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또다시 붉게 물들길 반복했다.
남제화는 얼굴을 굳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늘어뜨린 두 손은 힘껏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핏줄이 시퍼렇게 부풀고 뼈마디가 하얘질 정도였다. 그는 이미 최악의 계획을 세웠기에 묵용린이 단폐에 올라 무슨 짓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마주하는 건 정말이지 힘들었다. 설마 이대로 남원을 내어 주어야 한단 말인가? 수백 년의 왕조가 이렇게 그의 손에서 끊어져야 한단 말인가? 분노의 불길이 가슴에 일자 그는 허리춤에 찬 완도를 쓸어내렸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묵용린에게 달려들어 둘 다 죽는 길을 택한다면…….
그런데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위지불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