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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85)화 (884/1,192)

제885화

남제화에게 남은 이틀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는 용맹스러운 희생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틀 동안 그는 저항이 아닌 힘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든 국가의 멸망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희망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남원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기에 남제화는 용삼도와 강암룡의 편에 중요한 것들을 내보냈다. 남원 황실의 어린 종친들 외에도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중요한 문헌들, 우량 농작물 씨앗, 진귀한 제약 비법, 광자원 분포도, 수리 요새 지도……. 그리고 남원의 정예병과 명마까지.

그들이 가져가는 것들은 남원의 정수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것들만 있다면 어디서든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저주를 깰 수 있다면 인구도 천천히 많아질 것이고, 머지않아 남원의 재건도 가능할 것이다. 모든 일을 잘 안배해 둔 남제화는 대전에 앉아 나무 인형을 조각했다. 위지불이가 웃으며 말했다.

“동월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폐하께선 한가롭게 인형을 조각하시네요.”

남제화가 아직 미완성의 작품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짐이 매년 당신에게 나무 인형을 하나씩 만들어 주지 않소. 이번에도 빼먹을 수 없지.”

위지불이가 눈에 고이는 눈물을 참았다. 그녀는 조각을 받아들고 차분히 살폈다.

“폐하의 솜씨는 정말 대단해요. 진짜 사람보다 더 예뻐 보여요.”

남제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것이오? 짐이 그대의 칭찬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어 보겠소.”

두 부부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시종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마마! 동월군이… 동월군이 왔습니다…….”

남제화가 호통쳤다.

“오면 온 것이지, 뭘 그리 허둥대느냐? 난 묵용린이 성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종은 그의 호통에 얼굴을 붉혔다. 위지불이가 물었다.

“동월군이 어딜 왔는데요?”

“성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또 다른 시종이 달려왔다.

“폐하! 동월의 태자가 사람을 보내 전하길 폐하께서 성문까지 마중을 나오시랍니다.”

남제화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짐의 생질이 찾아왔는데 응당 마중을 나가야지.”

그는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제화는 그녀의 손을 잡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성 밖으로 나가 생질을 맞이할 것이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성 밖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마차가 궁문을 빠져나갔다. 평소에는 늘 떠들썩하던 거리지만, 오늘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행인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집마다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다. 수만의 동월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남제화는 웬만한 부호들은 일찌감치 식솔들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정 관원들은 자신이 떠날 수는 없으니 처자식이라도 멀리 보냈다. 자신들을 기다리는 게 무엇일지 아무도 몰랐기에 그저 순간순간 위험을 피하자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적막한 거리에 말발굽 소리가 유난히 맑게 들려왔다. 마부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황제가 출궁을 하자 시종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함께 따라오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제화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모든 것에 달관한 듯했다.

그는 이번 생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큼 전부 누렸고 존귀한 황권도 가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는 게 인생 아니던가. 그는 위지불이의 손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다른 건 중요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여인이 그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그 어떤 여한도 없었다.

마차가 성문 앞에 멈춰 섰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 발을 걷었다. 남제화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성을 지키는 병사 대열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눈망울 깊은 곳에 서린 두려움까지 가리진 못했다.

남제화는 조금 침울했다. 그들을 보니 여한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듯했다. 그의 유일한 마음의 짐은 그의 백성들이었다.

위지불이는 남제화의 손을 잡지 않고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가뿐하고 재빠른 그녀의 동작은 사활이 걸린 대사를 마주한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는 남제화와 상의도 하지 않고 명했다.

“문을 열거라.”

병사들은 곧장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남제화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의 말이 곧 짐의 말이다. 문을 열거라.”

병사들이 묵직한 나무판자를 내리자 서서히 성문이 열렸다. 동월의 대군이 있어야 할 자리엔 소수의 병사들만 자리를 지켰다. 그 가운데에 훤칠한 소년이 서 있었다.

그 소년은 월백색 장포를 입고 자주색 관을 쓰고 있었다. 빼어난 용모지만 눈매는 서늘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고개를 약간 치켜든 그에게서 존귀한 기백과 타고난 제왕다운 풍모가 느껴졌다.

남제화는 묵용린을 빤히 바라보았고, 묵용린도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건 매우 짧은 시간이었을 뿐, 묵용린은 곧장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예를 갖췄다.

“생질이 외숙부를 뵙습니다.”

남제화는 그의 태도가 조금 뜻밖이었다. 동월 태자는 먼저 예부터 갖춘 뒤 무력을 행사할 계획이란 말인가. 그가 눈이 휘도록 웃으며 답했다.

“그리 먼 곳에서 오는데 어찌 미리 언질도 주지 않고. 미리 알았다면 성 밖 십 리까지 마중을 나갔을 터인데.”

“어찌 감히 외숙부께 그런 폐를 끼치겠습니까.”

묵용린이 웃으며 말했다.

“모후께서 아시면 윗사람도 몰라본다며 꾸짖으셨을 겁니다.”

그가 시선을 옮겨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이분이 제 외숙모이시군요.”

그가 또다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외숙모를 뵙습니다.”

위지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허, 동월 태자가 이리 예를 지키다니.’

그녀는 동월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남원의 황후지만, 뿌리는 여전히 동월에 있었기에 감히 그의 인사를 받을 순 없었다. 그녀가 태자의 인사를 슬쩍 피하며 웃었다.

“안 그래도 어제 외숙부께서 태자 전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오늘 이리 뵐 줄은 몰랐습니다.”

서로 속을 훤히 꿰고 있지만, 겉으로는 제법 예를 갖춰 어물쩍 넘겼다. 묵용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질이 너무 급히 오느라 미리 언질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외숙부, 외숙모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또 이리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오시게 하여 정말 송구할 따름입니다.”

남제화는 아직 묵용린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묵용린은 의례적인 인사치레만 할 뿐, 본론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동월에서 데리고 왔다는 대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남제화는 의중을 떠보듯 물었다.

“우리 생질께서 먼 길 오느라 고단할 터인데… 이 외숙부와 함께 환궁하여 좀 쉬는 게 어떻겠는가.”

묵용린이 공수하며 답했다.

“하면 외숙부께 폐 좀 끼치겠습니다.”

그가 옆으로 살짝 눈짓을 보내자 깃대처럼 꼿꼿이 서 있던 수행원들이 곧장 대오를 정돈하고 태세를 갖췄다.

남제화는 대열 안에 섞인 마차 두 대를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것은 당연히 묵용린의 것일 테고… 뒤에 있는 것은 누구의 마차란 말인가?

묵용린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올 사람이라면 분명 존귀한 존재일 터. 태자가 태자비를 들였단 소식은 듣지 못하였는데, 설마 첩실이란 말인가? 여인을 데리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정말인지… 안하무인이자 극악무도한 행위였다.

남제화가 궁금한 건 한 가지 더 있었다. 고작 소수의 병사들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오려 하다니… 성안에 있을 매복병들이 두렵지도 않은 것일까? 남원의 병력이 아무리 부족하다 한들, 수십 명을 처리하는 건 전혀 문제없었다. 묵용린은 아무래도 무모할 만큼 대담하거나 혹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제화는 자신이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늘 자부해 왔지만, 동월 태자의 속셈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통통했던 묵용린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아무에게나 활짝 웃어 주던 아이인데, 그리 잘 웃던 아이가 커서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동월 태자가 되었다.

남제화는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잠시 넋을 놓았다. 위지불이가 그의 손을 감쌌다.

“걱정하지 마세요. 태자가 외숙모… 저를 외숙모라고 불러 주었잖습니까? 우리를 친척으로 생각하는 거라고요. 폐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심각한 건 아닐 거예요.”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보기엔 태자가 어떤 것 같소?”

위지불이가 고개를 저었다.

“속은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예의가 밝고 빈틈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동월에서 들었던 소문과도 조금 다르고요. 그러니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요.”

남제화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태자가 이 먼 길을 찾아온 것이 고작 외숙부와 외숙모를 보기 위해서인 것 같소?”

“목적이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아마 태황에게 복수하러 온 것이겠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태자를 그리 간단하게만 생각해선 안 되오.”

남제화가 말했다.

“짐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훗날 묵용린의 업적은 제 부황보다 더 위일 것이오.”

뒤따라오는 마차 안에서 묵용린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남원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이었다. 자신이 어릴 때 이곳에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악몽 속에서 보이는 광경도 이곳 남원에서 일어났다.

남원은 그가 싫어하는 곳이었지만 꼭 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모든 근원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번 방문에 완전히 끊어 내야 했다.

마차가 황궁으로 들어섰다. 원래는 황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중문에서 마차를 멈춰 세워야 하지만, 오늘처럼 특수한 상황에선 아무도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느 누가 묵용린에게 마차에서 내리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그들은 계속 황궁 깊은 곳까지 내달렸다.

남제화의 마차가 정전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뒤따라오던 마차는 멈추지 않고 그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는 서둘러 발을 걷어 올렸다. 묵용린의 마차는 그의 눈앞을 지나 보전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대체 저긴 무엇 하러?”

더 깊게 고민하기도 전, 남제화는 서둘러 마부에게 묵용린을 뒤쫓으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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