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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84)화 (883/1,192)

제884화

영십칠은 마음속으로 태자를 무척이나 탄복했다. 금의옥식하며 자란 황가의 귀족이 난생처음 떠난 긴 여정에 이렇게 고생하다니. 때론 요기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해 지저분하고 낡은 절간에서 하룻밤 묵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태자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음식점을 놓쳐 딱딱하게 굳은 찐빵을 먹을 때에도 아무런 투정도 하지 않고 바위처럼 침묵했다. 영십칠은 그 바위 안에 뜨거운 용암이 들끓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젠가 그 용암은 밖으로 뿜어져 나올 것이다.

그간 태자는 위지 가문에서 남원 여제에게 보내는 자객을 암암리에 가로막았다. 그는 태자가 황후를 위해 그런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말수가 적고 표정이 평안하면서도 그는 무의식중에 조급한 마음을 드러냈다. 영십칠은 남원으로 가는 여정이 태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일 거라고 추측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직접 달려갈 만큼 중요한 일.

* * *

오늘은 남원에서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어린 태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목욕을 시키는 세삼洗三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하나둘 거리에 모여들어 가무를 즐겼고 태자를 축복했다. 세삼은 남원의 풍속 중 하나다.

아이가 태어나 사십오일이 되면 세 번 씻겨야 한다. 먼저 머리를 감고, 그다음은 손을 씻고, 마지막으로 발을 씻는 것이다. 세삼례를 받은 아이는 부처님의 비호를 받으며 평안하고 건강하게 자란다고 믿었다.

남원 사람들은 세삼을 귀문관鬼門關(저승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모든 집안 식구들은 마음을 졸이고 정성을 다해 아이를 지켰다. 매일 불경을 외며 무사히 세삼을 지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갓난아이들이 세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심지어는 세삼 당일에 죽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세삼만 지나면 아이들은 무사히 자랐다. 이러한 현상은 저주이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괜스레 걱정할까 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마음이 놓이지 않아 태자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세삼 의식이 다 끝난 후에야 그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축하 연회는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남제화는 태자를 품에 안은 위지불이를 끌어안고 천천히 달빛 아래를 거닐었다. 밤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꽃 그림자가 하늘거리며 꽃향내를 내뿜었다. 상쾌하고 아름다운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꿈만 같았다.

남제화는 큰 행복 속에서 긴 탄식을 내뱉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까지 있으니 그의 인생은 너무나 완벽했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다 순조로운데 그가 무언갈 잊고 있는 듯했다.

정전에 들어온 그는 은밀히 눈짓을 보내는 강암룡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위지불이가 아이를 데리고 침소에 들자 그가 강암룡을 서재로 불러 물었다.

“무슨 일이냐?”

강암룡은 어딘가 모르게 겁에 질린 듯했다.

“폐하, 방금 접한 소식입니다. 동월의 대군이 국경을 넘어 타곤성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강암룡의 말에 남제화는 화들짝 놀랐다.

“타곤성에 언제 도달한다더냐?”

“이틀이면 도착한다고 합니다.”

남제화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어째서 이제야 소식이 전해진 것이냐?”

강암룡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제화는 순간 국경 지역에 사달이 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분명 항복했거나 학살을 당했을 터.

“수장이 누구라더냐? 병력는 얼마나 되느냐?”

강암룡은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동월의 태자… 묵용린이 오만 대군을 이끈다고 합니다.”

남제화는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여제가 걱정하던 일이 역시나 일어나고 말았다.

여제가 이 말을 할 때마다 그는 묵용린을 두둔했다. 그러나 그의 걱정도 여제보다 결코 적지 않았다. 적어도 묵용감이 재위 중일 땐 동월 대군이 국경을 넘을 일은 없을 거라 예상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할 거라 여겼는데… 묵용린이 지금 손을 쓸 줄이야!

동월의 태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냉혹하고 몰인정했다. 다만 그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태자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벌이려는 건 분명 큰일인데, 어찌 백천범을 속일 수 있었을까? 설마 백천범도 암묵적으로 이 일을 허락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백천범이 혈육의 정을 내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정이 두터운 친남매였다. 어쩌면 무시무시한 묵용 부자가 백천범을 속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고작 이틀이라. 이틀 뒤엔 동월의 병사가 성 앞까지 찾아올 것이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찾아오든 이는 분명 좋지 않은 일이었다.

“폐하, 어서 방도를 찾으셔야 합니다.”

강암룡이 말했다.

“용 장군을 입궁하라 할까요?”

남제화가 손을 내저었다.

“묵용린에겐 오만 대군이 있다. 우리는 모든 병력을 합쳐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강경하게 맞서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못한 짓이다.”

강암룡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면 부족들에게 병력을 요청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어쨌든 부락은 남원에 속해 있으니 번영과 몰락을 서로 함께하지 않습니까? 아포 족장을 통해 각 부족에 소식을 알리면 동월군의 발을 묶어 둘 수 있을 겁니다.”

남제화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발을 묶어 둘 수는 있고?”

“일단 해 보는 것이지요. 부족의 용사들은 산세에 익숙하니 숲에서 싸우는 것에 매우 능숙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강점이지요. 그들이 측면에서 함께 공격을 퍼붓고 수병獸兵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겁니다. 그리고 용 장군이 병사들과 최후의 방어선을 수비하면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남원의 사병들은 전쟁 경험이 없다. 게다가 수적으로 너무 열악하지. 이미 한 수 진 것이나 다름없다. 부족들은 남원의 본래 민족도 아니고, 남원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남원을 떠나 적당한 산에 터를 잡고 거기에 새로운 왕을 세우면 되는 것을.

지금 그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한들, 그리 호응을 얻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수병은 이미 십여 년 전 남원과 동월이 전쟁을 치를 때 정예군만 출병시켰음에도 파멸하고 말았지. 수병은 더 이상 우리의 비밀 무기가 아니다. 동월군을 대적하기에는 조금도 승산이 없어.”

강암룡은 그의 말에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폐하, 하면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자는 말씀이십니까?”

남제화가 탄식을 내뱉었다.

“짐도 묵용린이 이렇게 빨리 손을 쓸 거라고 생각치 못했다. 참으로 급작스러운 일이구나.”

그는 가만히 서서 침묵에 잠겼다. 그의 얼굴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묵용린이 남원을 찾은 첫 번째 이유는 분명 여제에게 복수하기 위함일 것이다. 가서 용삼도에게 전하거라.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여제를 호송해 멀리 떠나라고.”

말을 마친 그는 잠시 뒤 또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별도의 정예병을 꾸려 황후와 태자도 다른 곳으로 보내거라.”

강암룡이 급히 물었다.

“폐하께서는 떠나지 않으십니까?”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할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군이 몰려옵니다. 묵용린은 분명 악의를 가지고 찾아왔을 테니 폐하께서도 피하시지요. 동월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일단 폐하와 태자께서 무사하시다면 우리 남원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강암룡이 무릎을 꿇었다.

“폐하, 황후와 태자를 모시고 함께 떠나십시오.”

남제화가 손을 내저었다.

“묵용린은 어릴 때 짐을 본 적 있다. 그땐 고작 한 살이었지만, 짐은 그 애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걸 곧장 알아보았지. 돌잡이에서 태황의 옥좌에 기어오른 아이다. 태황의 걱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지. 그래도 그 애는 닙닙의 아들이니 조금은 가족애가 느껴지는구나. 짐은 어쨌든 그 애의 외숙부다. 짐을 어찌하진 못할 것이야.”

그가 강암룡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서 명을 전하거라.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우리도 움직여야지.”

강암룡은 지금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명을 받잡고 자리를 떴다.

남제화는 방에서 한참 동안 넋을 놓았다. 위지불이를 찾아가 몇 마디 당부를 전하려고 움직이는데 위지불이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폐하,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어째서 저와 아이를 보내려는 거예요?”

“강암룡이 다 얘기하지 않았소?”

남제화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동월의 대군이 곧 성 앞에 도달할 거요. 아직 그들이 무얼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신과 호아까지 위험한 일을 겪게 할 수 없소. 그러니 먼저 떠나시오. 짐은 나중에 합류하겠소.”

위지불이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도 나중에 우리 쪽으로 오실 거예요?”

“물론이고말고. 짐은 묵용린의 외숙부니 짐을 어찌하진 못할 것이오.”

“동월에 있을 때, 태자에 대해 들은 적 있어요.”

위지불이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손짓까지 하며 설명했다.

“소문으로는 아주 차가운 사람이래요. 문무백관 중에 태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더 컸을 테니 분명 그때보다 더 무시무시하겠죠.

폐하와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땐 태자가 고작 한 살이었잖아요. 어찌 외숙부를 기억하고 있겠어요. 설령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국가와 국가의 일이라고요. 이익 앞에서 고작 그 정도의 가족애를 신경 쓰겠어요?”

“불이.”

남제화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황제요. 짐은 떠날 수 없소.”

“알아요.”

위지불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당신도 함께 가자고 설득하러 온 게 아니에요. 강암룡한테 태자를 데려가라고 할게요. 호아는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으니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만약 이대로……. 그럼 너무 아까운 생명이니까요. 그 애가 좀 더 살 수 있다면, 설령 시골 촌놈으로 산다고 해도 전 정말 기쁠 거예요.

전 당신 곁에 있을게요. 우린 부부예요. 부부는 일심동체라고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전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남제화는 두 눈이 시큰거렸다.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 같소. 아직 이리 젊은데 혹… 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호아를 데리고 평범한 자에게 시집을 가도 되는 것을.”

“폐하, 잊으셨어요? 전 내일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태황이 제게 고충을 심은 날부터 전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얻은 거라고 생각한다고요. 지금은 당신과 혼인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모든 염원을 다 이루어서 더는 바랄 게 없어요.

호아는 호아의 인생이 있고, 제게는 제 인생이 있어요. 폐하 곁을 지키는 게 제 운명이에요. 같이 맹세한 거 잊으셨어요? 이번 생은 절대 떨어지지 않기로 했잖아요!”

위지불이는 오른손을 들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는 벼락을 맞을 거예요!”

남제화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좋소. 하면 그대도 남으시오. 우리의 앞날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당신만 곁에 있으면 난 그것으로 족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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