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3화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지만,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싫었다. 그녀 스스로 충분히 자신을 지킬 줄 알았다. 그가 근심하는 일 따윈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백천범이 갑옷에 달린 끈을 풀며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 무거워요.”
묵용감이 급히 다가가 도와주었다.
“맞소. 제법 무겁소. 앞으로는 입지 마시오. 가볍고 얇은 갑옷을 구할 방법을 고민해 보겠소.”
갑옷을 벗으니 몸이 다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손과 다리를 쭉 뻗은 백천범은 편안한 모습으로 말했다.
“황상, 제가 여기 있다는 걸 다른 이들한테도 다 알렸어요?”
“아니.”
묵용감이 말했다.
“곁을 지키는 시위와 부장 조천명, 그리고 참장 둘만 알고 있소. 짐은 천하의 황후가 종군한다는 사실을 그리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싶진 않소. 짐의 전쟁이 덜 진지해 보이지 않소.”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럼 저한테 직위를 내려 주세요. 제가 당당히 황상 곁을 지킬 수 있게 말이에요.”
묵용감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면 부참장이라고 하지. 아, 입대할 땐 무슨 이름을 썼소?”
“전범이요.”
묵용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았으면 그 이름을 잊어버릴 뻔했소. 소성에 불이 났던 그날 밤, 짐은 그 이름을 듣고 바로 당신을 떠올렸소. 안타깝게도 일을 그르쳐 돌고 돌아 겨우 당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 일을 언급하자 백천범의 눈이 반짝였다.
“사내아이 분장을 하고 월규, 월향이랑 장사하면서 지낼 땐 참 편안했는데 말이에요.”
묵용감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짐은 편치 않았소. 당신을 찾느라 온 천지를 돌아다니지 않았소.”
“그래도 결국 찾았잖아요. 저랑 황상이 역시 인연이었던 거죠. 떼려야 뗄 수 없는.”
“그게 당신이 짐을 처음 떠난 것이었잖소.”
지난 일을 되짚어 보니 묵용감은 감개무량했다.
“그 후 또 짐을 떠났지. 그때 짐은 정말 어찌 살았는지 모르겠소…….”
백천범은 손을 뻗어 그의 손 위를 덮었다.
“그때 일을 뭐 하러 기억해요. 지금은 잘 지내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죠.”
“지금도 잘 지내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것이오.”
묵용감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막상 달성하지 못한다면 괜히 실망만 클 테니 말이다. 일단 이번 전쟁을 잘 마친 뒤에 다시 생각해 볼 계획이었다.
* * *
빠르게 말을 달린 시위는 그날 밤 궁에 돌아갔다. 궁문은 이미 잠겨 있었지만 태자가 준 요패가 있었기에 궁문을 열 수 있었다. 세 개의 문을 더 지난 그는 빠르게 안으로 내달렸다. 태자는 아직 취침 전이었다. 밖을 지키던 태자의 수하가 그를 보자마자 곧장 입을 열었다.
“어서!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시위는 장영전으로 들었다. 태자는 곁채에 놓인 침상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태자가 곧장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시위가 예를 갖춰 대답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길, 마마의 종군을 윤허하셨으니 전하께선 걱정하지 말고 조정을 잘 돌보라고 하십니다.”
묵용린이 책을 내려놓고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궁의 예상대로구나. 황상께서 또 뭐라 하시던가?”
“황상이 안 계실 땐 전하께서 동월의 군주이시니 걱정하지 말고 전하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마음이 동요된 묵용린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거라.”
시위가 떠난 뒤, 장량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날이 곧 밝겠습니다. 어서 침소에 드시지요. 황상께서 자리를 비우셨으니 전하께서 조정을 지키셔야 합니다.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될 일입니다.”
묵용린은 모퉁이에 놓인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날이 밝을 시간이었다. 그는 잘 생각이 없는지 손을 내저었다.
“본궁은 자지 않을 것이다. 잠시 생각할 일이 있으니 그만 물러나거라.”
장랑은 다시 그를 타일렀다.
“전하, 그러다 옥체가 상하십니다.”
태자가 보내는 서늘한 눈빛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묵용린이 생각한다는 일은 황제가 그에게 전한 말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설마 부황께서는 줄곧 그가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알고 계셨단 말인가?
황제의 출전이 결정된 뒤, 그의 머릿속에는 곧장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황제와 황후가 모두 자리를 비운 것은 그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설마, 부황은 일부러 모후를 데려간 것이란 말인가? 그에게 정사를 맡기기 위해서?
요즘도 악몽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매번 깜짝 놀라 잠에서 깨기 일쑤였고 잠에서 깨서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능력 있는 동월의 태자였다. 하지만 그가 십여 년간 악몽에 시달린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포악한 기운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포악한 살기였다. 하지만 그는 그 기운을 잘 억제할 줄 알았다. 황제와 황후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런데 너무 오래 억누른 탓에 반등의 힘도 커지고 있었다. 그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근 몇 년 동안 가슴 속 악마를 없앨 기회만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실행력이 뛰어난 태자는 결단을 내리면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군주가 없으면 조회를 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무백관들은 각자 관청으로 출근했다. 상주서는 먼저 양승해 대학사에게 제출토록 했다. 양승해는 태자의 스승이라 그와 친분이 유달리 두터웠다. 양 대학사는 상주서를 다 읽은 뒤에 장영전에 보냈다.
묵용린은 묵용감과 달리 야심이 엄청난 황태자였기 때문에 의심은 거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조정에서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가난청뿐이었다. 가난청은 양승해 대학사의 마지막 제자이기도 했다. 이제 겨우 열 살이지만, 가난청은 보기 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세 살부터 태자 곁을 지키며 함께 공부했고, 네 살에는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았다. 다섯 살에는 오경을 배우고 여섯 살에 시를 짓고, 일곱 살에 글을 썼다. 태자는 조정 업무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면 늘 가난청을 찾아 논의하며 독특한 견해를 얻곤 했다.
열 살이 된 가난청은 이미 관직에 몸담고 있었다. 태자가 그를 상경常卿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가 양승해를 보좌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배치였다.
병권은 묵용린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황제가 백장간을 도성으로 불러들인 것도 아마 호부를 호국대장군인 백장간에게 넘기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또 효기대장군인 한통이 군대에 주둔하며 진두지휘하고, 성 밖 군영에는 사장풍까지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황후의 오라버니, 한 사람은 황제 곁에서 이십 년 세월을 따른 측근. 다른 한 사람의 부인은 황후와 오랜 친구이니 다들 보통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이 지켜 준다면 그에게 함부로 덤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 안에는 영 대인이 있었다. 그는 어군御軍의 총책임자로, 궁 안 시위영과 금군禁軍, 황성 금군錦軍을 관리했다. 늘 굳은 얼굴의 영 대인은 사심이 없기로 유명했다. 누구든 그를 보면 무서워했고, 개마저 길을 돌아갈 정도였다. 황제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고 귀신도 무서워한다는 묵용청양조차 영 대인은 무서워했다.
궁을 떠나기 전, 묵용린의 걱정은 묵용청양이었다. 그는 영구를 불러 묵용청양을 잘 지켜봐 달라고 분부했다. 황제와 황후가 모두 자리를 비워 묵용청양도 뒷배를 잃었으니 아마 가르침에 조금 더 복종할 것이다.
묵용린은 자신이 남원에 가는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남원을 동월의 판도에 병합할 생각이었다. 중임을 맡고 있던 자들은 그의 대담함에 깜짝 놀랐지만 그리 뜻밖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남원과 동월의 관계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도성을 떠난 지금,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태자가 직접 떠나는 건 동의할 수 없었다. 존귀한 신분인 건 말할 것도 없고, 태자는 황제와 달리 전투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생기면 그들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본단 말인가.
태자는 그들에게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황태자인 그가 지금껏 특별한 공로를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이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둘째, 남원에는 군대가 없어 한 번의 충격도 견디지 못할 것이니 진짜 전쟁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남원 황궁에 가서 남원 황제를 신복시키면 되었다. 셋째, 조정의 정무와 군무는 이미 적절히 안배해 두었으니 빠르게 돌아오면 별문제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다들 그를 좋은 말로 타이르기만 했다. 태자는 지금껏 궁을 떠나본 적도 없는데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들이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태자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자리에 있던 이들은 그 눈빛에 몸이 덜덜 떨렸다. 고작 열여섯 살인데도 황제보다 더 위엄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황태자가 그의 부황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의사를 반대할 수 없었다.
몇몇 보좌 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더는 태자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미 모든 일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그날, 묵용린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영십칠만 데리고 길을 나섰다. 부잣집 도령으로 변장한 그는 말을 채찍질하며 빠르게 서쪽으로 달려갔다. 영구는 별도로 열 명의 암위를 붙여 그를 호위했다.
영십칠은 조용한 성격이었고 묵용린도 과묵했기에 두 사람은 필요한 말 외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늘 이렇게 지냈다. 함께 한 지 십여 년이 흘렀기에 서로 너무 익숙했고 호흡도 잘 맞았다. 눈빛 하나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궁문을 나선 순간부터 묵용린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서둘러 남원에 도달하는 것. 그는 밤낮으로 길을 재촉했고, 달을 머리에 이고 별빛을 헤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길가의 풍경을 감상할 겨를은 없었다. 그는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깊은 밤이 되어서야 휴식을 취했다. 임안성에서 몽달까지의 여정이 더 가깝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가 그보다 먼저 길을 떠났으니 그는 황제가 개선하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땐 모든 일이 이미 다 끝난 뒤일 것이다. 부황께선 그를 책망할 것이고, 모후께선 상심이 크시겠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마음도 점점 옅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 끝은 새로운 삶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