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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82)화 (881/1,192)

제882화

병사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묵용감은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찾았다간 백천범이 산으로 도망을 칠지도 몰랐다. 늦가을은 맹수가 살찌는 계절이다. 익숙하지 않은 숲속에서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그리 일을 크게 만들었다간 황후의 체면을 지켜 주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성미를 돋운다면 한참 동안 달래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를 달래 주는 건 괜찮았지만, 그녀가 그를 상대해 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일은 난처했다.

묵용감은 막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 서서 근심에 잠겼다. 사냥을 나간 병사들이 말에 들짐승을 잔뜩 싣고 돌아왔다. 병사들은 평소 야외 훈련이 잦기 때문에 이런 일에 능숙했다. 내장을 발라낸 살코기에 소금과 후추를 뿌렸다. 그리고 모닥불 위에 올리니 금세 향기가 올라와 군침이 돌았다.

묵용감은 눈을 번득였다. 백천범은 이런 것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모닥불에 고기를 굽게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십삼寧十三에게 몇 마디 분부를 내렸다. 영구가 그에게 다섯 명의 시위를 붙여 주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가 영십삼이었다. 성이 영 씨인 자들은 대부분 고아였다. 영구는 그들을 거두어 직접 무술을 가르쳤다.

뛰어난 참을성으로 훈련을 견뎌낸 이들은 시위영에서 명위明衛나 암위暗衛가 되었다. 무예는 둘째고 가장 중요한 건 충심이었다. 영구는 몸소 실천으로 그들을 가르쳤기에 그가 데려온 영가의 병사들은 다들 충심이 뛰어났다.

묵용감은 어두운 곳에 서서 모닥불 주변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섯 시위는 뿔뿔이 흩어졌고 여기에 조천명과 두 참장參將까지 가세했다. 모닥불 주변을 지키고 있으니 백천범이 오기만 하면 단번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기가 맛있게 익고 있는데도 백천범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리 신중하다니. 신분이 폭로될까 봐 식탐까지 참는단 말인가? 퍽 대단하군.’

지금은 하루 중 가장 떠들썩한 시간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불빛도 요란하게 흔들렸다.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여기저기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찾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애가 탄 황제는 야생 토끼 다리 하나를 든 채 병사들 사이를 오갔다. 그녀가 숨어 다니느라 음식도 먹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배라도 곯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생각만으로도 혼란스러워서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저녁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묵용감은 백천범을 찾지 못했다. 토끼 고기는 차갑게 식은 뒤였다. 손에는 기름이 묻어 번들거렸다.

그는 고기를 몇 점 뜯어 먹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다년간 길러온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행군 중에는 절대 굶으면 안 되었다. 변수가 너무 많았기에 다음번에 또 끼니를 챙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규율을 어기지 않고 차갑게 식은 토끼 고기를 억지로 베어 물었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소란은 점점 잦아들었다. 병사들은 저마다의 막사로 돌아갔고 서너 개의 순찰 부대가 교대로 막사 주변을 돌아다녔다. 적막 속에는 순찰병들의 발소리와 은색 갑옷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자객이다. 자객! 황상을 보호하라!”

고함과 함께 요란한 발소리와 검이 부딪치는 격투 소리가 이어졌다. 황제의 막사 옆에 있던 모닥불은 이미 꺼진 뒤였다. 뒤엉켜 싸우는 모습이 그림자로 보이긴 했지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혼란 속에서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누군가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때, 누군가 마구 소리쳤다.

“황상! 황상께서 상처를 입으셨다. 황상께서…….”

암흑 속에서 누군가 안쪽으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손에 든 장검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한눈에 봐도 명검이었다. 그자가 지나가자 병사들이 곧장 주변을 겹겹이 에워쌌다. 하지만 에워쌀 뿐 칼끝은 전부 아래를 향해 있었다. 싸우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병사들에게 에워싸인 자는 흠칫 놀라며 발을 굴렀다.

“감히 날 속여요?”

커다란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나지막이 달랬다.

“들어가서 설명하겠소.”

한 시위가 서둘러 막사 입구에 친 융단을 걷었다. 황제가 황후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 있던 이들은 겨우 한시름 돌렸다. 연극이 끝났으니 나머지는 황제의 몫이었다.

막사 안에 켜 놓은 등불이 잔뜩 화가 난 백천범의 얼굴을 비췄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침대에 내려놓은 뒤, 그녀를 흘기며 먼저 성을 냈다.

“짐은 아직 화를 내지 않았거늘, 어찌 당신이 먼저 화를 낸단 말이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왜 몰래 빠져나온 것이오? 태자와 청양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아시오? 짐은 또 얼마나 걱정했는데. 당신이 먼저 짐을 속이지 않았소? 월규를 통해 향낭을 전해 주면서 그때 대오에 섞여 들었겠지! 내 말이 맞소?”

그의 말에 백천범의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검집에 다시 검을 넣으며 웅얼거렸다.

“애들한테는 편지를 남겼어요.”

“편지만 남기면 다요?”

묵용감이 계속해서 그녀를 꾸짖었다.

“만약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짐더러 어찌하라고? 아이들은 또 어찌 생각하겠소?”

백천범도 지지 않고 입을 삐죽거렸다.

“지금처럼 태평한 때에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아무리 태평해도 임안성에 적의 첩자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소? 옛 태자의 사람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망명을 떠난 자들이 조정을 찾아 성가시게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 있소?”

묵용감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

“당신은 다른 이도 아니고 동월의 황후요. 묵용감의 부인이란 말이오. 당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단 말이오?”

백천범은 그의 말에 달리 방도가 없어 두 손을 펼치고 생떼를 썼다.

“그래서 이미 왔는데 어쩔 거예요?”

“어찌하긴.”

묵용감이 말했다.

“태자가 당신을 데려갈 사람을 보내왔소. 짐이 이곳에서도 호위병을 몇 명 더 붙여 오늘 밤 안에 당신을 궁으로 돌려보내 주겠소. 이 일은 없었던 일로 칩시다.”

백천범은 조금 놀란 모습이었다.

“린아가 사람을 보냈다고요?”

“그렇소. 안 그랬다면 짐이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어찌 알았겠소?”

그가 자리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범아, 말 듣고 얌전히 돌아가시오. 짐이 승리를 거두고 곧장 돌아가겠소.”

백천범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검집에 새겨진 문양을 만지작거렸다. 침묵으로 그녀가 원치 않는다는 걸 내비친 것이다. 어렵사리 겨우 빠져나왔는데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니…….

“범아.”

묵용감은 조금 골치가 아팠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댄 채 낮게 속삭였다.

“짐을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시구려.”

백천범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상, 십여 년 전에 제가 남원에서 돌아왔을 때 말이에요. 저한테 약속하셨잖아요. 다시는 저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묵용감은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 약속은 그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몰래 빠져나온 건 잘못했지만, 황상과 떨어지기 싫어요. 당신은 제 부군이잖아요. 당신이 있는 곳에 저도 있어야죠.”

그녀가 검을 내려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전 무술도 배웠고 그간 연습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지난번에 당신이랑 겨룰 때 제 실력이 늘었다고 칭찬까지 해 줬잖아요. 그리고 저한텐 예리한 보검도 있고요. 다른 건 몰라도 저 자신을 지키는 것만큼은 문제없어요. 당신의 발목을 잡을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 당신 곁에는 시중을 들 자가 아무도 없잖아요. 바느질하거나 빨래할 일이 생기면 누구한테 도움을 받을 건데요?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은 제가 할게요. 말한테 풀을 먹일 수도 있고 사냥을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국자를 휘저을 줄도 알고…….”

불빛 아래, 그녀의 자그맣고 빨간 입술이 쉼 없이 움직였다. 묵용감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그녀를 품 안에 힘껏 끌어안았다.

사실 묵용감도 백천범을 보내기 아쉬웠다. 그녀가 하는 말에 넘어가지 않으려 그 또한 자신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분명 냉정해져야 했다. 하지만 군대 앞에선 엄격하기 그지없던 마음도 그녀 앞에선 물렁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점점 더 동요되었다. 그가 탄식을 내뱉었다.

“좋소. 함께 갑시다.”

어쩌면 그녀를 만난 그 순간,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부부가 함께 전쟁터에 나갔다는 이야기가 후세에 전해지면 분명 좋은 미담이 될 것이다.

그의 동의를 얻자 백천범은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묵용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겉으론 여전히 심드렁한 척 굴었다.

“정말 당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백천범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를 재촉했다.

“황상, 궁에서 나온 사람한테 어서 돌아가라고 해요. 태자에게 제 안부도 전해달라고 하시고요!”

묵용감은 가만히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배시시 웃으며 그를 간지럽혔다.

“얼른요, 얼른.”

묵용감은 간지럽히는 그녀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 수하를 불렀다. 줄곧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위는 황제의 부름에 곧장 대꾸했다. 묵용감은 뒷짐을 지고 최대한 위엄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태자에게 돌아가 알리거라. 황후가 조정을 위해 힘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상하고, 또 함께 다닐 만큼 실력이 뛰어나니 짐이 그녀의 종군을 허하였다고. 그러니 짐과 황후는 걱정하지 말고 조정을 잘 돌보라고 하여라. 또한.”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짐이 없으면 태자가 곧 군주니라. 걱정하지 말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전하라.”

“예, 황상.”

시위가 공손히 예를 갖췄다.

“소관, 황상의 말씀을 태자 전하께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그를 내보냈다. 시위는 밖으로 나가 고개를 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태자 전하께서 모셔 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정말이었군.”

황제의 말에 안심이 된 백천범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풀어 옆에 두었다. 묵용감은 불룩한 주머니를 보며 물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소?”

백천범이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부시, 연고, 소금, 후춧가루, 말린 향잎, 간식, 채찍, 표창, 그리고 탄환이랑 지난번에 남원에 갔을 때 오라버니가 준 향이요. 전부 다 필요한 것들만 챙겼어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절로 감탄했다. 정말 필요한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불도 피울 수 있고, 음식을 만들 수도 있고, 여기에 각종 무기와 연고까지. 항상 미리미리 대비하는 그녀의 성격은 아직도 한결같았다.

그녀는 그저 충동적으로 빠져나온 게 아니라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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