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1화
그녀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
“아뇨. 잠깐 고민이 있어서요.”
“이런,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걱정할 게 또 있단 말이야?”
그자가 백천범을 위아래로 훑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들어온 거야?”
“네, 막 입영했습니다.”
그녀가 친한 척 말을 건넸다.
“형님은 이름이 어찌 되십니까?”
“양주자楊柱子. 너는?”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전 전범錢凡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을 또 사용할 날이 오다니! 그녀가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
“형님은 노병이십니까?”
“그런 셈이지. 난 들어온 지 삼 년이 되었거든.”
그때 양주자가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황상과 함께 출정하는 병사들은 모두 영 대인이 직접 고른 정예병인데… 너 같은 신참이 어찌 포함된 거지?”
“전.”
백천범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신참이긴 해도 무공이 뛰어나서요. 전쟁터에서 제법 쓸모 있을 거예요.”
양주자가 놀랍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렇게 안 보였는데. 무술은 어느 파에서 배운 거야?”
“가동… 가 대인이요. 아시죠?”
“당연히 알지. 가 대인과 영 대인은 황상의 일급 시위이자 이품 대원인데.”
“전 가 대인과 동문이에요.”
양주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가 경건한 말투로 물었다.
“하면 가 대인의 동문 후배란 말이오?”
백천범은 웃으며 어물쩍 넘어갔다. 동문이 아니라 사제지간이긴 하지만… 그런 걸 일일이 정정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와, 정말 대단하시군.”
양주자가 말했다.
“가 대인은 태자 전하의 사부이셨는데. 하면 그쪽도 태자 전하의 사숙師叔인 셈 아닙니까!”
“하하…….”
“신병일 땐 다들 갑옷이 익숙지 않습니다.”
양주자는 그녀의 환심을 살 작정인 듯했다.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실 다 요령이 있답니다. 절 보고 따라 해 보세요.”
그는 그녀에게 시범을 보여 주었다. 걸을 때 슬쩍 뒤쪽 다리를 웅크리면 힘이 덜 들고 양쪽 다리를 번갈아 가면서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알려주는 대로 움직여 보니 훨씬 더 가벼워졌다. 그녀는 고마움에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양 형.”
양주자는 그녀의 밝은 웃음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입을 열었다.
“전 아우는 참으로 좋은 용모를 가졌는데… 눈썹이 굵고 입가에 점이 있는 게 좀 아쉽습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얼굴로 밥벌이는 충분히 했을 텐데요!”
백천범은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웃어넘겼다.
* * *
묵용감은 점심을 먹은 뒤 나무에 기대어 잠시 졸았다. 행군할 땐 밤에만 주둔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황제가 함께 출정을 나갈 땐, 늘 미리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하지만 묵용감은 이 규율을 완전히 폐지했다. 행군 전투는 그의 본업이었다. 황제가 되어도 황자이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묵용감은 땅바닥에 앉아 있는 병사들을 보고 있으니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감개무량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패기가 넘쳤던가.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하면 이미 늙은 것이었다.
늙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그는 이미 지천명의 나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번 출정을 끝낸다면 그는 더 이상 여한이 없었다. 환갑이 되어서 나왔다면 그건 출정이 아니라 남들에게 짐이 되었을 터.
그는 저 멀리 젊고 생기 넘치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갓 떠오른 태양처럼 힘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지금 자신의 평안한 상태가 더 좋았다. 과거 그는 너무 많은 고통을 경험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 겨우 오늘날에 다다랐다. 그때의 일들을 그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행군 중이었기에 다들 조용히 풀밭에 앉아 있었다. 어떤 이는 눈을 감고 명상을 했고 또 어떤 이는 잠시 졸고 있었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야 다시 길을 재촉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취사병은 집기를 정리하고 기름천에 싸서 말에 실었다. 저 멀리 어린 마부 하나가 말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다. 새로 벤 풀인지 유난히 푸른빛을 머금었다. 묵용감은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른 체구인데 은색 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더 앙상해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마르고 어린놈이 어찌 이번 대오에 포함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저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꾸만 백천범이 떠올랐다. 가녀린 몸매의 백천범도 한 벌짜리 긴 치마를 입으면 저리 앙상해 보였다.
부인을 떠올리니 그는 외로움에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뒤, 그는 속으로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가 그리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감정이 북받칠 줄은 몰랐다. 마치 그의 몸에서 뼈 하나를 뽑아낸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서 이번 출정을 결정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일찌감치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백천범은 그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는 그가 궁을 떠날 때 그녀가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그가 떠나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애달픔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 곁엔 린아도 있고 청양과 성아도 있었다. 그녀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그녀와 점점 더 멀어질 때마다 마음이 길게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쪽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고 다른 한쪽을 끌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멀어질수록 더 아플 수밖에. 부장 조천명曹天明이 다가와 고했다.
“황상, 출발하셔도 됩니다.”
묵용감은 쓸쓸한 마음을 가슴 깊이 억누르며 말에 올랐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조금 전 바라보았던 곳에 눈길을 돌렸다. 말에게 풀을 먹이던 마부는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그는 헛헛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비웃었다. 다른 이를 통해 그리운 마음을 달래려 하다니. 그것도 사내를 통해. 정말 변변치 못한 행실이었다.
이미 깊은 가을이었기에 날은 금세 어두워졌고 기온도 빠르게 떨어졌다. 북쪽으로 갈수록 날씨는 점점 더 추웠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천지에 안개가 자욱하게 꼈다. 가까운 이의 얼굴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조천명은 서둘러 병사들에게 진영을 칠 것을 명했다.
황제의 막사는 다른 이들의 것과는 달랐다. 커다란 소가죽으로 지붕을 만들었고 창문도 나 있었다. 땅에 고정한 쇠말뚝이 막사를 안정적으로 지탱했고, 쇠털로 만든 끈이 팽팽하게 잡아주어서 아무리 센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었다.
또 영구가 특별히 어선방에서 고른 요리사를 보내 주었다. 하지만 황제는 과거에 먹던 술과 고기가 그리웠다. 그는 산에서 들짐승을 사냥해 오라 분부했다. 사냥해 온 건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다 맛있어서 끊임없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막사 안에 등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그에게 고했다.
“황상, 궁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묵용감은 흠칫 놀랐다. 궁에서 왜 그를 쫓아왔단 말인가.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들라 하라.”
그의 앞에 시위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황상, 영 대인께서 소관을 부르시어 마마께서 몰래 대오에 합류하셨으니 이걸 황상께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가 공손히 서신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묵용감은 서신을 받아 들고 등불 아래로 가져갔다. 아무래도 오늘 그가 본 마부가 백천범인 듯했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건만.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그녀였던 것이다!
참, 담도 크지. 어쩐지 흔쾌히 승낙하더니. 몰래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이제 보니 배웅을 나오지 않은 것도 대오에 섞여 들어갈 생각에서였겠지. 그 순간에도 그는 성루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그의 아내는 그와 가까운 곳에 있는데.
출정 이야기를 꺼낼 때 사실 그는 그녀가 크게 반대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한데 이것만큼은 예상치 못했다. 아마 그가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곧장 이 생각을 떠올렸겠지. 그런데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오히려 향낭을 전해 주는 척 상황을 꾸며 댔다. 이런 깜찍한 사기꾼 같으니라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사람을 찾는다는 건 매우 어려웠다. 더구나 그녀는 숨어서 따라올 작정이지 않은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황제는 막사 안을 서성였다. 방법을 강구해 그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해야 했다. 그가 시위에게 물었다.
“영 대인이 또 뭐라 했느냐?”
“영 대인께서 태자 전하의 분부라며 마마께서 황상 곁에 계신다면 소관에게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우선 물러나거라. 이 일은 굳이 퍼트릴 필요 없다. 네가 궁에서 왔다는 것도 알리지 말거라. 우선 짐이 황후를 찾은 뒤에 다시 얘기하자.”
시위는 대답을 올린 뒤,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황제는 막사를 나왔다. 나오자마자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막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막사가 겹겹이 에워싸여 있었다. 이따금 사람들이 오가며 불빛과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눈앞이 아른거렸다.
황제가 뒷짐을 진 채 밖으로 향하자 곧장 시위가 따라붙었다. 그들은 군영의 병사들이 아니라 궁 안 시위들로 황제를 보호하는 인력이었다.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따라오지 말라는 뜻을 내비치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시위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는 막사를 가로질러 말을 묶어 두는 곳에 도착했다. 사람이 쉬면 말도 쉬어야 하는 법. 마부들은 말의 갈기를 빗겨 주거나 풀을 먹였다. 말은 콧소리를 내며 꼬리를 흔들었고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머리를 가까이 대기도 했다.
황제는 멀지 않은 곳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근처에 모닥불을 피워 둬 마부들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마부들을 하나하나 훑던 그는 마지막 마부까지 살펴본 끝에 미간을 찌푸렸다. 낮에 봤던 그 어린 마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묵용감은 그녀의 경계심을 키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마감馬監을 불러와 마부들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백천범과 닮은 어린 마부는 없었다. 묵용감은 마감에게 마부들을 집합시키라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백천범은 없었다.
백천범은 마감영馬監營에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잠시 말에게 풀을 먹였을 뿐인 듯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도 저 불씨처럼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분명 그녀가 대오에 있는데도 금방 찾아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