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0화
성 황자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형…….”
안 그래도 골치 아픈 태자가 그들까지 상대해 줄 여력은 없었다. 그가 낮게 호통쳤다.
“모후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다. 다들 그만하고 조용히 있거라.”
묵용청양은 성 황자의 몸에서 내려와 일어섰다.
“오라버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들어가서 어머니를 뵙고 올게요!”
청양이 몸을 틀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월규가 깜짝 놀라 그녀를 붙잡았다.
“세상에, 들어가시면 아니 됩니다. 마마께서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황상께서 떠나실 때 소인에게 당부하셨어요. 공주께서 사고를 치시면 전부 다 적어 두라고요. 황상께서 돌아오시면 하나하나 잘잘못을 따지실 거라고 하셨어요.”
묵용청양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정말 그러셨다고요?”
“정말이고 말고요. 소인이 어찌 이런 걸 속이겠습니까.”
성 황자가 끼어들었다.
“월규 고고, 방금 다 봤죠? 얼른 적어 놔요. 이게 첫 번째 사고니까요.”
묵용청양은 그의 눈앞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성 황자는 바로 태자 뒤에 숨어 버렸다. 그는 정말 분통이 터졌다. 이리 컸어도 여인 하나를 이기지 못하다니! 크면 묵용청양이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제가 크는 만큼 묵용청양도 같이 큰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둘의 키는 크게 차이나지 않았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묵용청양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조용히 들어가 어머니가 무엇을 하고 계신지만 보고 나올게요. 만약 어머니가 울고 계시면 오라버니께서 들어가 위로해 드리세요. 울다가 눈이 부으면 아버지께서 마음 아파하실 테니까요.”
태자도 어머니가 걱정이었다. 태자 역시 망설이고 있었는데 청양이 용기 내 들어가 보겠다고 하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혼나는 게 일상인 여동생이니 오늘 한 번 더 혼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 조용히 들어가 보거라. 시끄럽게 굴면 안 된다.”
묵용청양은 몸을 숙인 채 까치발을 들더니 손까지 들어 올렸다. 꼭 두 발로 걷는 커다란 고양이 같은 모습에 월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도 사실 태자와 같은 마음이었다. 걱정은 되었지만 차마 들어갈 순 없었다. 그러니 묵용청양을 내버려 두는 수밖에. 어쨌든 귀신도 꺼린다는 공주가 아니던가. 가끔은 마마조차 그녀를 어찌하지 못했다.
묵용청양은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등불을 켜지 않은 탓에 몹시 어두웠다. 그녀는 발끝을 세우고 침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조심스레 장막을 들어 올리자 침대 위에 모후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가만히 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장막을 내리고 조심스레 방을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한숨부터 크게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선 주무시고 계세요. 아직까진 배가 고프지 않으신가 봐요.”
“자세히 본 것이냐?”
태자가 물었다.
“울고 계신 건 아니고?”
“아니에요.”
묵용청양이 말했다.
“전혀 미동도 없으셨어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월규가 말했다.
“그럼 마마께서 더 주무실 수 있게 하시어요. 기분이 나쁠 땐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는 법입니다.”
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월규에게 분부했다.
“하면 부엌에 음식을 데워 두라고 분부하고 모후께서 기침하시거든 그때 식사를 차려 드리게.”
월규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태자 일행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묵용청양은 성 황자 뒤를 밟다가 느닷없이 발을 걷어찼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성 황자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똑바로 안 걸어?”
“실수로 발을 높게 들었지 뭐야.”
“발을 높이 드는 건 말이나 하는 짓이라고.”
“뭐? 다시 한번 말해 봐!”
태자가 호통쳤다.
“다들 그만하거라.”
태자 역시 여동생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대체 저 성격은 누굴 닮은 것이란 말인가. 하늘과 법도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만약 그녀가 하늘에 오른다면 거기에서도 화를 자초할 것이다.
조용히 복도를 걷던 태자는 불현듯 마음이 불안했다. 묵용린은 발걸음을 멈추고 월규에게 물었다.
“모후께서 고고에게는 어떤 분부를 내리셨는가?”
월규가 잠시 기억을 되짚은 뒤 대꾸했다.
“마마께서 주무실 테니 등불을 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끄러우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도 하셨고요. 소인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태자가 물었다.
“모후께서 분부를 내리실 때 안색이 어떠하셨는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셨습니다.”
월규가 말했다.
“하지만 소인은 알아볼 수 있었지요. 마음이 편치 않으시다는 것을요.”
태자가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들어가서 모후를 조용히 불러 보아라. 모후께서 대꾸하시는지 잘 살펴보고.”
“전하, 마마께서 시끄럽게 굴지 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리하는 것일세.”
태자가 묵용청양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서.”
묵용청양은 빠르게 안으로 달려가더니 금세 뛰쳐나왔다. 그녀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오라버니, 어머니께서 어찌 이불이 되셨을까요?”
그녀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월규가 물었다.
“마마께서 이불이 되셨다니요? 공주, 어서 제대로 말씀해 보시어요.”
묵용청양은 숨을 헐떡거리며 대꾸했다.
“어… 어머니를 불, 불렀는데 아… 아무 반응이 없어서… 제… 제가 이… 이불을 젖혔더니… 안… 안에 또 이불이 있을 줄… 누… 누가 알았겠어요…….”
안색이 급변한 태자는 서둘러 침전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이들도 그 뒤를 부랴부랴 쫓아갔다. 태자가 문을 들어서며 소리쳤다.
“등불을 켜라.”
궁녀들이 서둘러 등에 불을 붙이자 방 안은 순식간에 환해졌다. 서둘러 장막을 올린 월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에게 말을 건네려 했다. 그때, 묵용청양이 잽싸게 이불을 걷자 그 밑에 또 다른 이불이 놓여 있었다. 사람처럼 말려 있는 이불을 보며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태자가 문밖을 지키던 궁녀에게 물었다.
“마마께선 어딜 가셨느냐?”
궁녀가 그걸 어찌 알까. 깜짝 놀란 궁녀는 털썩 무릎을 꿇고 대꾸했다.
“마마께서 방해하지 말라 하시어 소인은 줄곧 문 앞만 지켰습니다.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지켰습니다.”
태자는 고개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잠그는 고리가 풀려 있었다. 저곳으로 나가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멀쩡한 문을 내버려 두고 왜 창문으로 나간단 말인가? 대체 어딜 가시려고!
“서둘러 인력을 동원해 마마를 찾거라.”
태자는 모후가 어딘가에 숨어 속상한 마음을 달래는 중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묵용청양이 소리쳤다.
“잉? 베개 밑에 편지가 있어요.”
그녀는 서둘러 편지를 펼쳐 등불 아래 가져갔다. 태자는 곧장 편지를 뺏어와 읽었다. 그의 안색이 깊숙한 골짜기처럼 어두워졌다. 그의 안색을 본 월규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마마께서 뭐라 쓰셨습니까?”
태자가 탁자를 치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모후께선 부황과 함께 가셨다.”
월규는 입을 쩍 벌렸다. 좀처럼 믿기지 않는 그의 말에 월규는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를 채 다 읽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태자 앞에서 감히 울부짖을 수도 없기에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가늘게 훌쩍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심부름을 보내 놓고 몰래 도망치다니! 십 년 넘게 함께 지내면서 단순한 주종主從의 정을 일찍이 뛰어넘은 두 사람인데… 어찌 그녀마저 버리고 홀로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월규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될 만큼 슬피 울었다. 태자와 공주, 황자 앞에서 우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황후의 행동에 그녀는 정말 상심이 컸다. 설령 간다고 해도 언질은 하고 가야 할 것 아닌가.
만약 황후가 떠나는 걸 알려 주었다면 월규 역시 어떻게든 황후와 함께 가려 했을 것이다. 시집도 가지 않고 마마를 모시겠다고 결심했는데! 마마가 떠났으니 이제 그녀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묵용청양은 서둘러 월규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고고, 울지 말아요. 어머니는 아버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마음 놓으세요.”
소식을 전해들은 학평관은 애간장을 태우며 급히 달려왔다. 월규를 혼내야 마땅했지만 눈물 범벅이 된 그녀를 그리 모질게 몰아세울 순 없었다.
“너도 참… 마마 곁을 그리 오래 지켰으면서 마마의 생각도 몰랐단 말이냐? 궁을 나가고 싶으셨던 것 아니냐? 아주 잘하는 짓이다. 몰래 도망가시는 마마를 놓치다니! 시녀 노릇을 아주 잘하고 있구나!”
월규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태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소인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소인이 우둔하여 마마를 잘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태자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고고, 자책하지 말게. 서신을 보아하니 모후께서는 일찌감치 계획을 세우신 것 같네. 아는 이가 많아지면 일이 틀어질까 봐 알리지 않으신 거겠지. 어쨌든 부황과 함께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본궁도 마음을 놓을 것이네.”
그가 학평관에게 분부했다.
“자네는 영 대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서둘러 부황께 사람을 보내라고 하게. 모후께서 그곳에 계신다면 모셔 오라고 전하고.”
학평관은 대답을 올린 뒤, 허리를 숙이고 급히 자리를 떴다. 태자도 공주와 황자를 데리고 떠났다. 홀로 남은 월규는 우두커니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문득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백천범이 없으니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제 자신은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 * *
백천범은 사병 대열에 섞여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녀에게 변장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예전에 남원에서 동월까지 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변장술 덕분이었다.
그녀는 노란 고약을 발라 얼굴을 누리끼리하게 만들고 눈썹을 두껍고 길게 그렸다. 거기에 입가엔 점을 찍고 눈꺼풀을 축 늘어뜨리고 다녔다.
한참을 걸었지만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제법 체력이 좋은 백천범이었지만 몸에 걸친 갑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무거운 갑옷 때문에 키가 작아지고 다리가 풀리고 등까지 굽는 기분이었다. 꼭 모래주머니를 몸에 걸치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있던 이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올렸다.
“밥 안 먹었어? 이제 출발했는데 벌써 늘어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