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79)화 (878/1,192)

제879화

묵용감이 출발하기 전날, 백장간이 임안성에 돌아왔다. 황제는 그를 남서방으로 불러 두 시진 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그 누구의 출입도 불허했기에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백장간이 떠날 때도 그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북쪽 국경에서 머문 백 장군의 얼굴은 까무잡잡해진 지 오래였고, 곰보 자국이 남은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거기에 눈빛은 꼭 북쪽 국경에 있는 암산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의 병사들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백천범 앞에선 미소를 보였다.

백천범은 이런 그의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큰 오라버니는 올 때마다 늙어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달빛처럼 하얗고 우아하던 큰 오라버니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백천범이 백장간을 유심히 바라볼 때, 백장간도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이 세상에 젊음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백천범일 것이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린 아가씨 같았다.

피부는 물이 터질 듯 맑고 투명했고, 커다란 눈은 순수하고 선했다. 눈망울은 또 어찌나 반짝이는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네 살이었던 그때의 눈망울과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왜 그리 빤히 보는 거예요? 어서 앉으세요.”

백장간이 말했다.

“황상 옆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으니 잠시 서 있어도 된다.”

“소쌍이는 잘 지내요?”

“잘 지내고말고. 그저 네 생각뿐이지.”

“두 아이도 잘 지내고요?”

“응, 아주 잘 지낸다. 장난기가 심해서 온종일 야단법석을 피우느라 제 어미가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야.”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저랑 소쌍이가 정말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자매가 된 것도 모자라 똑같이 쌍둥이를 낳았으니까요. 우리 애들은 성별이 달라 그리 닮진 않았지만, 오라버니 아이들은 남자 쌍둥이라 꼭 닮았잖아요. 가끔 두 아이를 착각할 때도 있죠?”

“다른 이들은 착각할 때도 있지만, 부모인 우리들은 헷갈리지 않는단다. 매일 같이 지내다 보면 한눈에 구별할 수 있지.”

“아이참, 저도 정말 보고 싶어요. 만나면 무척 재미있을 텐데요.”

“곧 볼 수 있을 거다. 난 폐하를 뵈어야 해서 먼저 온 것이고, 부인과 아이들은 천천히 오는 중이니 여드레 정도 뒤면 도착할 거야. 그때 만나면 되지.”

백천범은 아무런 대꾸 없이 웃었다. 그때, 태자가 동생들을 데리고 백장간을 보러 왔다. 백장간은 태자, 공주, 황자 순으로 일일이 예를 갖췄고, 뒤이어 묵용린도 묵용청양과 묵용성을 이끌고 외숙부께 인사를 올렸다. 아무리 집안 어른이라고 한들 군주에게 예를 표하는 게 우선이었다.

묵용청양은 외숙부가 들려주는 북쪽 국경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는 북쪽에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수많은 소와 양 떼가 무리를 지어 다닌다고 알려 주었다. 또 끝이 보이지 않은 광활한 사막과 바람이 불면 하늘을 덮치는 황사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곳에 사는 유목민들은 일정 기간마다 거처를 옮기며 커다란 천막에서 산다는 이야기에 묵용청량의 눈이 반짝였다.

묵용청양은 부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 사람들은 정말 행복하겠네요. 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니까요. 저도 이사 가면 좋겠어요. 매일 궁에서만 사니까 이제는 개미들까지도 낯이 익을 정도예요. 정말 시시해요.”

늘 그녀와 각을 세우는 묵용성은 자연스레 비아냥거렸다.

“시시하다고? 여긴 황궁이야. 들어오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고.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이곳에서 지내는 게 싫은 모양이구나. 부황께서 들으셨다면 분명 꾸짖으실 거다.”

묵용청양이 눈을 희번덕였다.

“하! 황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넌 위아래도 없어? 부황께서 들으셨다면 네가 혼이 났을 거야.”

백장간은 두 남매의 말싸움에 웃음을 터뜨렸다. 백천범이 민망해하며 말했다.

“큰 오라버니한테 우스운 꼴을 보여 드렸네요. 저 둘은 어릴 때부터 저 모양이에요. 아마 전생에 원수지간이었을 거예요.”

백장간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떠들썩하고 좋지.”

동생들이 떠드는 사이 묵용린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허리를 펴고 고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노승이 입정한 듯 평화로워 보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럽다는 건 바로 이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터. 살짝 오므린 입술과 검은 두 눈망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윽한 눈빛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백장간은 조금 전 남서방에서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어린 태자는 이미 제왕의 상을 지니고 있었다. 내일 황제가 북으로 떠나면 이 소년은 난제가 가득한 대국을 이어받아 제왕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 * *

이튿날, 묵용감은 출정에 나섰다. 은색 갑옷을 입은 그는 새하얀 말에 올랐다. 투구에 달린 붉은 술이 바람에 흩날리자 누구보다 위풍당당해 보였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수년 전 천하에 이름을 떨친 군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묵용감은 조정을 다스리는 것보다 전쟁터를 누비는 군신이 더 잘 어울렸다.

길시가 되자 병사들은 북을 치며 기세를 드높였다. 하늘엔 열두 발의 축포가 발사되었다. 황제 뒤로는 활력이 넘치는 일만의 정예병이 따랐다. 햇살이 갑옷을 비추니 꼭 하늘이 내린 천하무적의 병사들 같았다.

격앙된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 묵용감은 성루의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사병만 있을 뿐, 그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이나 보지 못할 텐데. 배웅 나오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태자는 황제가 성문을 나설 때까지 배웅할 예정이었다. 태자는 한참 동안 성루를 바라보는 황제를 보고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부황, 모후께서 오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오지 않으실 겁니다. 기다리지 마시지요.”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안다.”

그녀가 오지 않으니 그의 마음도 슬퍼졌다. 그녀가 방에서 홀로 울고 있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열두 발의 축포가 모두 터지자 대오는 출발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묵용감이 행차하려는데 태자가 말했다.

“어, 월규 고고입니다.”

급히 말을 세운 묵용감이 고개를 돌렸다. 월규가 궁문에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말에서 내려왔다. 가까이 온 월규가 예를 갖추려 하자 묵용감이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황후가 짐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다더냐?”

월규는 손에 들고 있던 향낭을 묵용감에게 건넸다.

“마마께서 이 향낭을 가져가시랍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머리를 맑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향낭을 건네받은 묵용감이 향을 맡았다. 비록 향은 옅었지만 마음은 매우 편안해졌다. 그가 향낭을 조심스럽게 허리에 매달고는 월규에게 물었다.

“더 전하라는 말은 없었느냐?”

월규가 답했다.

“황상께서 여정 내내 무탈하시길 바란다며 꼭 개선하여 돌아오시라고 하셨습니다!”

묵용감은 조금 실망했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게 다냐?”

“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에게 가서 고맙다고 전해 주거라. 또한 짐이 금방 돌아올 테니 황후에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적인 말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서 전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월규를 통해 전할 수 있는 말만 꺼냈다.

“황후에게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매일 즐겁게 지내고 있으라고 전하거라. 청양이 말썽을 부려도 속 썩이지 말라 전하거라. 짐이 돌아와서 혼내 줄 테니. 또 답답할 땐 영구와 가동에게 호위를 부탁하여 잠시 궁 밖을 구경하라고도 전하고.”

월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 이게 어딜 봐서 전쟁에 나가는 군신의 모습이란 말인가. 말 많은 어멈의 모습이지. 황상보다 마마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 * *

묵용감이 그녀의 마음을 가져간 건 아닐까? 그가 떠난 이후 백천범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방 안에 갇혀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밥을 먹을 때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태자는 그런 그녀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부황이 떠나자마자 모후가 식음을 전폐하다니.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어쩐단 말인가? 그는 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에 계속 손을 비볐다. 옆을 지키던 월규가 그를 타일렀다.

“전하, 마마께 혼자 계실 시간을 조금만 주시지요. 금방 나아지실 겁니다.”

태자가 물었다.

“모후께선 안에서 무엇을 하신단 말인가?”

월규가 고개를 들고 작게 속삭였다.

“아직 주무십니다. 마마께선 낙천적이시니 한숨 푹 주무시고 나면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태자가 말했다.

“평소 허기를 못 참는 모후께서 아직 주무시다니! 그러다 탈이라도 나면 어쩐단 말인가?”

그때, 묵용청양과 묵용성도 백천범을 찾아왔다. 모후가 속을 태우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에 성 황자도 근심에 휩싸였다. 그가 뒷짐을 진 채 어른 흉내를 내며 탄식했다.

“모후와 부황께서는 한 쌍의 새와 마찬가지지. 한 마리가 날아가고 한 마리만 남았으니 식음을 전폐하시는 게 당연한…….”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묵용청양이 격양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부황께선 금방 돌아오실 텐데. 게다가 우리도 있잖아. 평소엔 씩씩하시던 모후께서 오늘은 대체 왜…….”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성 황자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화가 된 거야. 온종일 포고나 하고 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이고, 사무치는 그리움이 화가 돼? 너도 그렇게 그리운 사람이 있나 보지?”

“있어도 너한텐 안 알려 줘.”

성 황자의 머릿속에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순수한 미소를 가진 그녀는 그의 마음속 달빛이었다.

“안 알려 줘도 누군지 알거든?”

묵용청양이 교활한 미소를 짓더니 두 손을 입가에 가져가 소리쳤다.

“내가 생각한 사람이 맞는지 들어 봐.”

성 황자는 얼굴을 붉혔다. 이제 알 건 다 아는 열두 살이 되었으니 부끄러움도 자연히 더 많아졌다. 묵용청양! 저 못된 계집이 그 여인이 누군지 떠들어대면 그의 체면은 어찌 되겠는가?

그는 서둘러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보다 한 수 위인 묵용청양은 그의 손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적수도 되지 않는 게 어찌 손을 쓴단 말인가. 성 황자는 오장육부가 한데 뒤섞이는 것 같은 통증에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머니, 청양이 또……!”

묵용청양은 또 한 번 그의 몸에 일격을 가했다.

“소리만 질러 봐. 네 앞니를 다 깨뜨려서 네가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입도 벙긋 못하게 할 거니까!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해 보시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