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8화
백천범은 안에서 향낭에 수를 놓고 있었다. 그녀의 수놓는 솜씨는 크게 발전하여 적어도 손가락에 구멍을 만들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녹하의 세심한 가르침 아래, 그녀가 수놓은 꽃의 모양도 꽤 그럴듯했다. 이 향낭은 묵용감에게 주려고 만드는 것이다. 안에 든 것은 머리를 맑게 하는 목란향으로, 향기가 오래가고 담백하여 남자들이 가지고 다니기에 적합했다. 묵용감이 행군하고 전투를 벌이면 궁중에서와 달리 여러 가지를 신경 쓰기 힘들었다. 정신을 가다듬는 향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 문발을 젖히고 들어오자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그녀는 묵용린이 들어오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
“린아, 어찌 이 시간에 찾아왔느냐?”
“모후.”
묵용린이 다가가 문안 인사를 했다.
“부황께서 친정을 가시겠다는데 모후께서 허락하셨습니까?”
백천범은 웃으며 말했다.
“그 일 때문이구나. 네 부황께서 가고 싶으시다니 보내 주려고 한단다.”
“하지만, 모후. 부황께서는 천자이신데 천금 같은 몸으로 어찌 전투에 나선단 말입니까? 아무 걱정도 안 되십니까?”
백천범은 자수틀을 내려놓았다.
“걱정할 게 뭐가 있느냐? 네 부황은 젊은 시절부터 혁혁한 군신이셨다. 동월의 천하 강산도 그가 싸워서 평정한 것이란다. 그가 전투에 나간다면 이 어미는 승전할 것이라 믿는단다.”
묵용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모후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어떻게 부황에게 시키겠는가?
백천범은 슬며시 묵용린을 관찰했다. 그는 황제의 친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점잖게 앉아 있었다. 나이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 감정을 숨길 수 있다니. 백천범은 속으로 황상이 그를 칭찬한 이유를 알겠다고 중얼거렸다. 묵용감과 비교하면 묵용린은 정말 타고난 제왕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녀는 묵용린을 위로했다.
“네 부황은 아무 일도 없을 거란다. 그는 무술에 일가견이 있고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기를 좋아해. 너무 늙지 않으셨을 때 보내 드리거라. 어쩌면 이번이 그의 마지막 전투일지도 모르니까. 이 어미는 그가 한을 남기지 않았으면 한다.”
백천범의 말을 듣고 묵용린은 충격을 받았다. 모후께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역시 하늘 아래에서 부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모후셨다.
자신은 신하와 자식 된 자로서 전쟁의 위험과 황제의 신분, 동월의 체면만 생각했을 뿐이다. 황제의 마음속 갈망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군신은 늙기 전 멋진 전투를 원했다. 모후 또한 그의 갈망을 이루어 주길 원했다. 그의 아들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부황이 전선에서 걱정 없이 전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묵용린도 속이 시원했다. 부황과 모후는 모두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는 그들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일어나 백천범을 향해 공손히 예를 취했다.
“소자, 모후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 *
황제가 친정을 떠나면 영구와 가동도 따라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두 사람은 황제가 분부를 내리기도 전에 일찌감치 출정 준비를 마쳤다. 가동은 녹하가 만들어 준 사슴 가죽 장화를 들고 우쭐댔다.
“이거 봐라, 우리 부인이 직접 만든 거다. 따뜻한 가죽으로 만든 장화라 북쪽에서 신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영구가 그를 흘기며 말했다.
“기홍은 소고기를 한 솥 조려서…….”
그 말에 가동이 입맛을 다셨다. 기홍이 만든 소고기 조림은 정말 맛이 좋았다. 그 맛을 알기에 가동의 배 속이 요동쳤다.
“아이고, 잘됐다. 나도 좀 가져갈게.”
영구가 말했다.
“우리 부인이 나 먹으라고 해 준 걸 왜 가져갑니까?”
가동이 말했다.
“뭐야, 한 솥을 해 줬다며! 너 혼자 다 먹을 수 있어?”
“먼 길을 가니 천천히 먹어야지요. 북쪽 국경에 가선 딱딱한 전병만 먹을 텐데… 부인의 음식을 아껴 먹을 겁니다.”
때마침 황제가 다가왔다. 가동이 곧장 고자질했다.
“황상! 기홍이 소고기 조림을 한 솥이나 싸 줬는데 영구가 저 혼자만 다 먹겠답니다!”
황제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짐 몫은 있을 것이다. 네 몫은 모르겠지만.”
가동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황상께선 영구를 너무 편애하십니다.”
“이번엔 편애하지 않으마. 네 몫이 없다면 저 녀석 몫도 없을 것이다.”
황제가 영구에게 말했다.
“소고기 조림은 모두 짐에게 넘겨라. 너희 둘 몫은 없다.”
황제의 말에 가동은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다. 반면 영구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져 갔다.
“황상, 저희를 데려가지 않으실 겁니까?”
“그래, 너흰 갈 필요 없다.”
묵용감이 말했다.
“이번엔 짐 혼자 간다. 둘 다 따라오지 말거라.”
“왜요!”
마음이 급해진 가동은 군신의 예도 잊고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다시 한번 소리쳐 보아라.”
그 눈빛에 가동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늘 냉정을 유지하는 영구였지만 이번만큼은 걱정이 앞섰다.
“황상,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신은 반드시 따라갈 것입니다. 신은 황상의 시위입니다. 황상께서 어딜 가시든 신은 꼭 황상 곁을 지켜야 합니다.”
묵용감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가 대인에게 나쁜 물이 든 것이냐? 너희를 두고 가는 건 응당 마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거늘. 짐이 떠나면 궁에 쌓인 일들은 누가 처리한단 말이냐? 너희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내 목숨보다 소중한 이들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기기 싫구나.”
황제의 말에 말문이 막힌 영구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럼 가 대인께 남으라고 하십시오. 신은 황상과 함께 가겠습니다.”
“짐의 가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묵용감이 말했다.
“가동 같은 덜렁이한테 맡겨 놓고 짐이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그래도 가동이 붙임성 하나는 좋지. 기세 왕성한 태자가 신하들과 언성을 높이면 가동이 수습해 주거라. 태자가 어릴 때부터 가동을 양부라 부르며 따른 덕에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저 녀석 말은 조금은 듣지 않느냐. 다른 건 짐도 바라지 않는다.”
가동은 황제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황제가 한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건 저를 깎아내린 건가? 아님 칭찬을 한 걸까?
“너희 둘은 각각 장점이 다르니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묵용감이 영구의 어깨를 토닥였다.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하자. 그저 몽달에 한번 다녀오는 것뿐이거늘. 그리 먼 길도 아니니 잠시 다녀오면 그만이다. 네가 직접 선발한 정예병들이 날 따를 것이니 다른 건 문제없다. 북쪽 국경에 있는 주둔군만 십만이다. 몽달을 치고도 남을 병력이지. 짐은 그들과 합류하면 돼.”
영구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십 대 때부터 묵용감을 따랐고,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인을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동고동락한 세월이 기니 그에게선 가족보다 더 끈끈한 유대감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묵용감의 출정을 지켜만 보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영구에게 묵용감의 안위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에게 황후와 태자, 공주와 황자를 모두 맡긴다 했다. 황제에겐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의 가족일 터. 이리 중요한 존재를 그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를 매우 신임한다는 방증이었다. 황제가 그를 믿고 가족을 맡긴다는데 그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가동도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간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을 살았어도 긴장을 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황제를 보호해야 하는 일급 시위였으므로. 그런데 황제는 시위를 두고 혼자서 전쟁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서서 황제를 보았다. 그게 그의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묵용감은 두 시위를 잘 다독여 돌려보냈다. 두 사람을 한참 동안 달래느라 목이 말랐던 그는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셨다. 방금 전 구구절절 떠들어 대며 두 사람을 타이른 일을 생각해 보니 참 우스웠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황제였다. 그가 명령을 내리면 아랫사람은 분부에 따르면 되는 것을.
역시 그에게도 두 시위의 존재는 다른 걸까. 그들의 충심이 남다른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으니 다른 신하들에게 하듯 딱딱하게 굴지 못했다. 또 그들은 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신하이기도 했다.
때마침 백천범이 들어왔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출발이 얼마 안 남았죠? 황상의 짐은 다 잘 챙겨 두었어요. 짬 날 때 빠진 게 없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
묵용감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상관없소. 그저 당신을 함께 넣어 갈 수 있다면 좋겠구려. 그리하면 이삼 리마다 집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을 테니.”
백천범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당신은 황제잖아요. 실없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묵용감은 찻잔을 내려 두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황제도 사람이오. 사람은 저마다 감정과 욕구가 있소. 짐에겐 부인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
백천범은 그의 품에 안겨 조용히 말했다.
“그럼 저랑 같이 가요.”
묵용감은 곧장 그녀를 놓고 마른기침을 했다.
“그저 말뿐이니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마시오. 분명 당신이 보고 싶을 테지만… 싸움이 끝나기 전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백천범은 푹신한 평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그럼 혼자 가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는 날, 난 배웅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소.”
묵용감이 그녀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당신이 배웅하면 병사들 앞에서 황제의 위엄을 잃을 것이오.”
백천범이 그의 어깨에 기대며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배웅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해요.”
묵용감은 그녀를 가볍게 감쌌다. 아직 떠나기 전인데도 괜스레 가슴이 시큰했다. 백천범을 남원에서 다시 찾아온 뒤, 두 사람은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인 것처럼 늘 붙어 다녔다.
동월의 역대 황실을 통틀어 그들 같은 황제와 황후는 아무도 없었다. 후궁 없는 황제의 모습도 처음이거니와 같은 처소를 쓰는 것도 그들이 유일했다. 그들은 마치 황가의 부부가 아닌 평범한 백성들처럼 생활했다.
그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데리고 함께 간다면 괴로움을 덜 수 있겠지. 하지만 그가 세운 계획이 있기에 그녀를 데려가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이번 일로 자신의 염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바람도 이루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