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6화
그는 매일같이 국정을 챙기느라 바쁘지만, 위지불이에 관한 일에 소홀한 적은 없었다. 그녀에 관한 일에 그가 모르는 건 없었다. 며칠 고민하고 툭툭 털어 낼 줄 알았는데. 그녀의 고민이 길어지니 그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남제화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조급한 것 아니오? 어렸을 때부터 있던 병의 근원을 어찌 하루아침에 치료할 수 있겠소? 위중청이 말했지 않소, 이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치료해야 하는 병이라고.”
“벌써 일 년이 지났잖아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조금의 희망이라도 보여야죠.”
“희망이 어찌 안 보인단 말이오?”
남제화가 말했다.
“목소리가 좋아졌잖소. 그러니 위 의원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건 확실하지. 닙닙이도 태자를 유산할 뻔했는데, 위 의원이 태아를 살렸다고 했지. 그는 이쪽 방면에 경험이 많은 의원이오. 이제 겨우 일 년이 지났을 뿐이고 그대는 아직 젊으니 괜찮소.”
위지불이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폐하는 젊지 않잖아요.”
“…….”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여전히 짐이 늙은 게 싫은 것이군.”
“아니에요!”
위지불이는 서둘러 변명했다.
“동월 황제도 황후 마마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요.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요. 나이 많은 사람은 제 짝을 아낄 줄 안다고요.”
남제화는 그제야 피식 웃었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옛말이 정말 맞는 듯하오.”
위지불이는 그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가볍게 쳤다. 한참 뒤, 그녀가 또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자 남제화는 제 손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계속 한숨만 내쉬지 마시오. 짐은 듣기 싫소.”
위지불이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폐하, 이 년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 년 안에 제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 그땐 비를 맞이하세요.”
남제화는 미간을 찡그렸다.
“불이, 농담이 끝이 없군. 더하면 재미없소.”
“전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위지불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 일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제가 얼마나 오래 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폐하께 아이를 남겨야 해요. 그런데 만일 제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요? 폐하께서는 평범한 백성이 아니라 황제예요. 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왕이 없으면 안 되니 폐하께는 후계자가 있어야 해요. 그러니 남원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폐하께서는 비를 맞이해야 해요.”
남제화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오?”
“요즘 계속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도량이 작은 사람이라 폐하께서 지금 당장 비를 맞는 건 허용할 수 없어요. 폐하께서 혹 이 일을 강행하시면 저는 칼을 뽑을 거예요.”
남제화는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구려. 그런데 이 년은 너무 짧소. 짐 생각에는…….”
그가 시치미를 떼고 생각해 보는 척했다.
“아무래도 평생이 낫겠소.”
위지불이는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았지만 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말하려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일에 관해서는 짐도 이미 생각을 정했소. 아이가 있든 없든 평생 내 아내는 그대 하나뿐이오. 황태자의 일은 급할 것 없소. 종실에서 좋은 아이를 한두 명 찾아 그중에 고르면 된다오.”
위지불이는 그의 손가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을 순서대로 잡아당기더니 다시 엄지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몇 번 하다가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으세요?”
남제화는 그녀의 손을 힘껏 쥐었다.
“짐은 그대만 있으면 되오.”
“폐하께서 한이 남으실까 봐 두려워요.”
“짐이 평생 갖고 싶은 건 바로 당신이오. 지금 그대가 곁에 있는데, 짐이 아쉬운 게 뭐가 있겠소? 또한, 짐은 그대 말고 다른 여자는 싫소. 비를 맞이해 봤자 짐에게 방해만 될 것이오. 그러니 괜한 생각하지 마시오. 그대가 계속 풀죽어 있으면 짐의 마음도 편치 않소.
그대가 행복해야 짐도 행복하고 짐이 행복해야 열심히 정무를 보지 않겠소. 그래야 남원의 백성들도 행복해질 것이오. 남원 백성들을 위해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알겠소?”
“…….”
역시 황제는 황제였다. 어떻게 백성을 위해서라는 대의까지 나온단 말인가? 그녀의 우울이 황제에게 걱정을 끼친다면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의 비까지 생각한 게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제화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 생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원래부터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남제화의 말에 그녀의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더 이상 이 일로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 * *
위지불이는 보양식과 연고 등을 효과가 있든지 없든지 꾸준히 먹었다. 어쩌면 언젠가 하늘이 은혜를 내려 아기를 데려다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리고 난생처음 달손님이 온 날. 위지불이는 아랫배가 더부룩해져서 탈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뒷간에 가고 싶은 건 또 아니라서 그녀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불안해했다. 그런데 수갑水匣(물을 담은 작은 상자)를 열은 것처럼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훅 느껴졌다.
멍하니 서서 고개를 숙인 그녀는 옅은 색 치마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드는 걸 발견했다. 그 새빨간 핏빛은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치마를 물들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위지불이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붉은빛이 피라는 걸 알아차렸을 땐, 여제가 제게 손을 썼다고 생각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옆에 있던 궁녀도 그것을 보고 놀라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황후 마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빨리, 폐하를 불러요. 어서!”
위지불이는 죽기 전에 남제화를 볼 수 없을까 봐 궁녀를 연신 재촉했다. 남제화는 아직 조정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소식을 들은 그는 곧장 방으로 달려왔다. 위지불이는 그 자리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제화는 그녀의 치마를 물들인 핏자국을 보고 심호흡을 했다. 그는 그녀를 업어 보지도 못하고 덥석 안았다.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가 아프지는 않소?”
아픈 곳은 없었다. 처음에는 아랫배가 더부룩하고 불편했는데, 지금은 편안해졌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불편한 곳은 없어요.”
남제화는 그녀의 왼팔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숨은 잘 쉬어지오? 아픈 데는? 어지럽지도 않소?”
위지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 괜찮아요.”
그때, 어떤 궁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 달손님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정말인지 꿈속에 빠진 사람을 깨울 정도로 놀라운 한 마디였다. 남제화와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에서 기쁨을 확인했다.
“하면 어찌 그리 가만히 있는 것이냐! 빨리 준비하거라.”
남제화는 자기 옷이 더러워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지불이를 안아 들고 목욕간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삼 년 후, 위지불이는 통통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남제화는 아이의 이름을 남신호晨皓라 지었다. 일출의 빛이 천지를 밝게 비춘다는 뜻으로 그에게 무한한 희망을 기대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삼세지일三洗之日(아이가 태어난 사흘째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목욕날)에 태자가 되었으며 문무백관의 축하와 만민의 환호를 받았다. 이로써 남원에서는 처음으로 태자가 책봉되었다.
* * *
동월 경원 15년, 시월 금추. 궁궐에는 계수나무 꽃이 활짝 피어 금빛으로 찬란했고 짙은 향기가 금궁에 가득했다. 황제 묵용감은 용상에 앉아 창밖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창틀 위에 수십 가닥의 금빛이 쏟아졌다. 그 금빛 속에는 마치 금가루가 날리듯 먼지가 분분히 날렸다. 그는 제 아래 모여 있는 문무백관을 바라보다 좌측에 서 있는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 묵용린은 올해 나이가 열여섯 살로, 키는 아버지인 그와 비슷하지만 눈썹은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이목구비가 입체적으로 생겨서 눈두덩이가 움푹 들어갔고 속눈썹이 풍성했다. 특히 아래쪽 눈매는 붓으로 그린 듯 진해서 깊이 있어 보였다. 천하에 손꼽히는 미남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은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졌다.
그만 한 나이 때, 묵용감도 사람들이 ‘살신’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걸 생각해 보면 태자의 명성이 그보단 나았다. 부황을 도와 국정을 살피는 동안 백성들은 태자가 아직 젊지만, 재주가 뛰어나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대업을 충분히 이을 수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공무를 집행해 본 조정 관리들만이 태자의 냉정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알았다.
자기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묵용감이 보기에 묵용린은 타고난 제왕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황권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이 발랑고撥浪鼓(구슬이 달린 작은 북), 바람개비 등을 가지고 놀 때, 묵용린은 그림 조각을 맞추며 놀았다. 그가 조각 맞추기를 하던 그림은 주변 이웃 나라의 지도였다. 묵용감은 아직도 어린 태자가 조각 맞추기를 할 때 보였던 진지했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커다란 지도판을 한 조각도 틀리지 않고 맞추곤 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묵용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을 맞추고서야 싸늘했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묵용감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학평관을 보며 살짝 턱을 들었다. 학평관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할 일이 있으면 상주上奏하고 없으면 퇴조하라.”
우측 앞에 서 있던 효기驍騎대장군 한통韓通이 읍하며 예를 취했다.
“황상, 소신이 상주할 일이 있습니다.”
“말하게.”
“어제 받은 군보軍報에 따르면 백 장군이 귀경할 때를 틈타서 몽달이 유격대를 보내 국경의 작은 도시인 적사赤沙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성안에 저장한 식량을 빼앗고, 백성 수십 명을 납치해 갔습니다.”
묵용감은 눈썹을 찡그렸다.
“누구를 끌고 갔단 말인가?”
“청장년과 아낙네 그리고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군대를 파견하여 추격할 수 있겠나?”
“적사는 작은 성이라 주둔군이 많지 않습니다. 지원병을 기다리던 중에 몽달군이 이미 철수했다고 합니다.”
묵용감은 묵용린에게 물었다.
“태자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느냐?”
묵용린은 잠시 침음하더니 입을 열었다.
“끌고 갔다는 건 죽이지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추적하지 못했으니 사람을 보내 몽달에 잠입한 후, 우리 백성을 구해 오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