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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75)화 (874/1,192)

제875화

위지불이는 찡그렸던 미간을 펴고 칼을 공중에서 휘둘렀다. 칼날이 번쩍이더니 허공에 눈부신 검광이 두 줄 그어졌다.

남제화는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위지불이의 무공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알 수 없는 건 고충의 조종을 받을 때, 그녀의 잠재력이 얼마나 폭발할지였다. 절대로 방심할 수 없었다.

위지불이는 칼을 휘두르며 손맛을 시험해 보았다. 그녀는 칼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 순식간에 손을 뒤집어 남제화가 아니라 여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남제화는 그 칼이 저를 향할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무척 놀랐다. 여제도 당황한 나머지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정신을 차린 남제화가 쏜살같이 돌진해 손날로 여제의 뒷목을 내리쳐 그녀를 기절시켰다. 위지불이는 칼로 찌른 표적이 갑자기 없어진 것을 알고 사방을 살폈다. 남제화가 그 틈을 타 그녀가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 그는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불이, 깨어나. 불이, 제발 정신 차려. 불이…….”

위지불이는 버둥거리지 않고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한참 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무 꽉 껴안아서 숨도 못 쉬겠어요.”

남제화는 방금 들었던 응석 부리는 말투가 아니라는 걸 듣고 살짝 힘을 풀었다.

“불이, 괜찮은 것이오?”

“머리가 좀 어지러워요.”

위지불이는 왼팔을 들어 올리더니 넓은 소매를 걷었다. 팔뚝에는 콩알만 한 뾰루지가 길을 잃은 것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남제화가 얼른 손끝까지 기를 모은 뒤, 그녀의 팔을 눌렀다. 그러자 콩알만 한 고충이 살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남제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물었다.

“지금은 어떻소?”

“좀 나아졌어요.”

위지불이는 고개를 돌려 땅바닥에 쓰러진 여제와 완도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제가 왜 여기 있어요?”

남제화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든 위지불이는 의아해하며 남제화를 바라봤다.

“여제가 폐하를 암살하러 왔어요?”

“…….”

“이런 늙은 요물 같으니!”

위지불이는 분명히 칼을 들고 여제를 찌르려 했다. 남제화는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불이, 죽일 수 없소. 여제가 죽으면 당신도 죽는단 말이오.”

그녀는 여제에 대한 원한이 가슴 깊이 사무쳤다. 새로운 원한과 오랜 원한이 함께 치밀어 올랐다.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아 그녀는 남제화의 품 안에서 힘껏 발버둥을 쳤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자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해요!”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남제화는 그녀의 목에 자신의 머리를 파묻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어쩌란 말이오?”

그러자 위지불이의 팔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녀는 남제화의 허리를 두 팔로 감쌌다. 두 사람은 조용히 포옹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땅바닥에 쓰러진 여제가 정신을 차렸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위지불이는 갑자기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남제화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러오? 불이? 어디가 불편한 것이오?”

위지불이는 가슴을 손으로 붙잡은 채 땅바닥에 쓰러진 여제를 바라보았다. 남제화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고는 여제를 멀찍이 걷어찼다. 여제는 믿기지 않는 듯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이 벽에 세게 부딪혔다. 그녀는 컥 하고 기침했고, 목구멍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지다 이내 피가 흘러나왔다.

“화아, 네가 감히, 어미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남제화는 냉소했다.

“짐을 죽이려 했잖습니까? 반격하지 않으면 얼빠진 놈이죠? 그리고 짐이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불이는 짐의 한계선입니다. 그녀를 건드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십시오. 당신에게 손찌검은은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거두는 일도 서슴치 않을 것입니다.”

“화아, 과인은 너의 어미니라.”

“어미라고?”

남제화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당신의 양심에 묻겠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를 아들로 대한 적이 있습니까? 혈육의 정이란 당신의 눈에는 개똥보다 못합니까? 짐은 단지 당신의 이용 수단일 뿐. 짐은 그 당시 동월에 잠입해 당신을 위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게다가 닙닙을 데리고 남원으로 와서 부부가 헤어지게 만드는 데 일조하기까지…….”

여기까지 이야기한 남제화는 더 이상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가슴이 아파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죽여서 후환을 없애요.”

남제화는 잠시 침묵하다가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 여제를 데려가라 명했다. 위지불이는 물 한 잔을 남제화에게 건넸다.

“폐하, 그녀를 남겨 두시면 큰 근심이 될 거예요.”

“짐도 알고 있소.”

남제화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불이. 그녀는 짐의 어머니오. 내 손으로… 모친의 목숨을 거두는 건… 천벌 받을 짓이 아니오?”

위지불이는 말이 없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여제처럼 음흉한 여인에게서 남제화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걸까? 두 사람이 진짜 모자 사이는 맞는 걸까?

“폐하, 그녀가 폐하를 낳은 게 맞아요? 혹시 생모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남제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그게 무슨 헛소리요? 여제는 나와 닙닙의 생모가 맞고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소.”

위지불이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폐하와 황후 마마를 낳아 준 건 예뻐해 주려는 게 아니라 해코지하기 위해서예요. 세상에 이런 어미가 어디 있어요? 호랑이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식을 먹지는 않아요.”

남제화는 침묵한 채 찻잔 속에 든 찻물을 바라보았다. 위지불이는 문득 자신이 남제화의 아픈 곳을 찔렀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록 남제화가 여제를 증오하지만 그의 증오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 속에 수많은 감정과 고뇌가 뒤엉켜 있었다.

남제화와 여제의 사이가 뒤틀리기 전엔… 분명 그들 역시 서로에게 자애로운 어미와 효자가 아니었을까? 혈육의 정은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남제화처럼 정이 많은 사람은 어떠하랴. 그는 여제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시종일관 그녀를 어머니로 섬겼다. 위지불이는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폐하, 전 항상 폐하의 곁을 지키겠어요.”

평생… 그녀는 그를 배신하지도 않을 것이고 곁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남제화는 반대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그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오.”

이번에는 남제화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는 지하 감옥에 양초 두 개만 남겨 두었다. 바닥에 깔린 융단도 걷어내 축축하고 음침한 바닥이 드러났다. 정교한 장식품도 다 치워 버렸고, 여제에게 발찌를 채워서 활동 범위를 제한했다. 화려한 복장과 장신구도 모두 뺏었다. 하루 세 끼도 형편없는 음식들만 넣어 주었다. 이제야 정말 감옥에 있는 것 같았다.

여제는 화가 나서 벌벌 떨며 남제화를 노려보았다.

“네가 과인을 이렇게 대하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야!”

“정말 천벌을 받는다면 태황께서 먼저 받게 되겠지요.”

남제화는 그녀를 비웃었다.

“닙닙이 갈 때 짐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짐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짐을 탓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제는 깜짝 놀랐다.

“너희 남매는 모두 배은망덕한 것들이구나! 너희를 낳은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남제화가 말했다.

“다음 생엔 서로 만나지 않기를 바라야지요.”

그는 몸을 돌리고 나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제는 한참 동안이나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돌아서서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에 달린 쇠사슬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지하 감옥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 * *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서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위중청의 노력으로 위지불이의 목소리는 원래보다 훨씬 좋아졌다. 예전에는 성별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는데 지금은 목소리가 훨씬 다듬어졌다. 조금 낮고 부드러워서 훨씬 듣기 좋았다.

위지불이가 걱정하는 건 그녀의 몸이었다. 아직도 임신은커녕 달손님조차 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탕약을 마셨지만, 그녀에게 한 점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칼을 닦으며 앉아 있었다.

남제화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저렇게 계속 닦다가는 칼이 다 녹아 없어질 것이다. 위지불이가 한숨을 내쉬자 남제화가 물었다.

“무슨 한숨을 그리 내쉬는 것이오?”

위지불이는 눈을 깜박거렸다.

“제가 한숨을 내쉬었나요?”

“그럼, 내쉬었지.”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한숨을 쉬면서도 몰랐다니. 그는 그녀의 걱정거리가 무겁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위지불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남제화는 문서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오시오.”

“뭘 하려고요?”

위지불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짐이 대신 봐 주겠소. 도대체 무슨 일이 당신을 이리도 기분 나쁘게 하는지.”

위지불이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폐하께서 그런 것도 보실 수 있어요?”

남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한텐 불가능하지만 당신한테는 가능하지.”

위지불이는 반신반의하면서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폐하께서 한번 봐 보세요. 아무렇게나 말씀하시면 거짓말쟁이라고 할 거예요.”

남제화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러더니 제 품에 쏙 넣어 두었다.

“손금 보려는 거 아니었어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폐하, 아랫사람들이 폐하를 보면 비웃을 거라고요.”

“누가 감히!”

남제화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더 꽉 껴안았다.

“짐은 한 번 봐 주겠다고 했을 뿐, 손금을 봐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소.”

“그럼, 폐하께서는 뭘 봐 주시겠다는 거예요?”

남제화는 그녀의 머리를 제 가슴에 바짝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대는 아이의 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오. 짐의 말이 맞소?”

“폐하, 어떻게 알아맞히셨어요?”

남제화가 실소를 터트렸다. 알아맞힐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요즘 그녀가 그 일로 근심 어린 걸 곁에서 봐 오지 않았던가. 만약 위중청이 백천범의 소개로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그를 돌팔이 의사라고 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제화에게 투덜거린 적은 없었다. 곁에서 시중드는 몇몇 하인에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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