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3화
명절을 맞이하면 더욱더 가족이 그리운데, 중추절은 특히 더 그랬다. 하늘에 높이 걸려 있는 밝은 달을 보면서 백천범은 아이들이 떠올랐다.
린아가 생각났고 청양과 성아가 그리웠다. 평소엔 아이들이 서로 다투는 걸 보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또 멀어지면 애간장을 태우는 법이었다.
그녀는 중추절만 지내고 돌아가겠다고 남제화와 작별을 고했다. 남제화는 당연히 그녀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닙닙아, 며칠만 더 묵었다가 돌아가거라. 다음에는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
백천범이 말했다.
“아니에요. 린아가 아직 어려서 홀로 국정을 돌보는 게 쉽지 않아요. 황상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거예요.”
국사가 걸린 문제라 남제화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할 수 없구나. 오라비가 여유가 생기면 닙닙을 보러 가마.”
백천범은 뭔가 떠올랐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참, 오라버니. 불이의 걸걸한 목소리는 치료할 수 없는 거예요?”
“그녀가 어렸을 때 큰 병을 앓은 적이 있는데, 약을 많이 먹어서 성대가 상했단다. 아마 치료는 힘들 거다.”
남제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목소리는 별일 아니지만, 다른 문제가 있단다. 아마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뭔데요?”
“그녀는 어쩌면 아이를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에?”
어미가 된 뒤로 백천범은 아이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녹하와 가동이 아이를 위해 벌인 황당한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치료가 안 돼요?”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하에 명의는 많으니 어쩌면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이 있을지도 모르지. 천천히 찾아봐야 할 듯하구나.”
백천범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눈앞이 번쩍 뜨였다.
“오라버니, 제가 의원 한 명을 소개해 줄게요. 지금 남원에 있어요.”
남제화가 미소를 지었다.
“남원에 친우도 있느냐?”
“위중청이라고 하는 의원이에요. 원래 궁에서 의정醫正을 했는데, 의술이 아주 뛰어나요. 이 년 전에 남원에 왔다는데…….”
남제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위 의정이 이 년 동안이나 남원에서 머물었다니… 무슨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냐?”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난치병에 심취해 있어요. 해마다 남원의 인구가 줄어드는 게 저주를 받은 거라는 소문이 있지만, 위 의정은 그게 어떤 질병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연유를 알아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사실이 밝혀지면 남원 백성들에게 정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찌푸려졌던 남제화의 미간이 살짝 펴졌다.
“위 의정이 정말 그 원인을 알아낸다면 우리 남원은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이니, 이 오라비가 사찰을 짓고 금으로 동상을 만들어서 남원의 후손들이 오래도록 그를 기억하게 만들 것이다.”
“위 의정이 남원에 온 지 벌써 이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이 일은 서두를 수 없는 일이지만, 그를 불러서 우선 불이를 진찰하게 해 보세요.”
위중청은 신분이 특수하기에 묵용감이 암위暗衛를 보내 그를 보호하며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그렇기에 그를 찾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날, 위중청이 입궁했다. 그는 먼저 동월의 황제와 황후를 만나 몇 마디 안부를 전한 후, 남제화와 함께 위지불이를 진찰하러 갔다.
위중청은 위지불이를 자세히 검사하고, 또 위지하 부부에게 그 당시 위지불이가 먹었던 약방을 물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고 약방도 이것저것 함부로 썼지만, 그 당시 위지불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위지하 부부는 전심전력으로 그 약방에 매달렸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 약방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시간의 노력 끝에 그들은 그 당시 위지불이가 사용했던 약방들을 대부분 기록해 냈다.
위중청은 그 약방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략적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남제화에게 말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는 예전에 냉한 기운의 약재를 너무 많이 쓴 나머지 한기가 몸에 들어서 자녀를 가지거나 태아를 품기 어려운 상태이십니다.”
남제화는 그의 말을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은 남원 궁중의 태의가 말한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간청했다.
“위 의원, 정말 방법이 없겠소?”
위중청이 잠시 침음을 삼키다 입을 열었다.
“일단 몇 가지 약방으로 황후 마마의 몸 상태를 조정해 보겠습니다. 만약 황후 마마 몸에 든 한기를 뺄 수 있다면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남제화의 눈에 기쁨이 번득였다.
“위 의원께서는 어서 처방을 써 주시오. 남원에는 진귀한 약초가 많으니 위 의원께서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하시오. 짐이 다 찾아오겠소.”
탁자로 다가간 위중청은 붓을 들고 아주 긴 약재 목록을 적어서 남제화에게 건넸다.
“이 약재들을 물 세 그릇이 한 그릇으로 줄어들 때까지 달여서 우선 한 달 정도 드셔 보십시오.”
백천범이 추천한 사람이니 남제화는 그를 신임했고, 위지불이도 위중청에 대한 첫인상이 좋아서 진찰금뿐만 아니라 금요패까지 하사하여 수시로 궁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했다.
* * *
백천범과 묵용감은 이튿날 바로 동월로 출발했다. 위지하 부부는 딸아이가 눈에 밟혔지만, 대저택과 농장이 걱정되어 결국 황제 일행과 함께 돌아갔다.
남제화와 위지불이는 궁문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위지하 부부는 딸아이를 끌어당겨 신신당부했다. 절대 성질을 부리지 말며 황제에게 걸핏하면 손찌검하는 버릇도 고치라고 말이다.
왔을 때 부둥켜안고 울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갈 때도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했다. 위지하는 일찌감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동수여가 살짝 눈을 붉혔지만, 위지불이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이와 반대로 저쪽 마차에선 백천범은 헤어짐에 눈시울을 붉혔다. 남제화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환히 웃는 얼굴로 백천범을 달랬다.
“닙닙, 오라비는 걱정하지 말거라. 십여 년 동안 멍청하게 허송세월을 보냈지만, 이젠 제대로 잘 지낼 거야. 불이도 곁에 있지 않느냐? 이 오라비는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낼 거란다.”
백천범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묵용감을 힐끔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오라버니, 불이 몸에 있는 고충 말이에요. 항상 염두에 두세요. 혹시라도 무슨 변고가 있다면 오라버니가 무슨 일을 해도 전 절대 오라버니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남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이 오라비가 맺고 끊음이 그리 명쾌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만일 그런 순간이 온다면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안단다.”
수수께끼 같은 대화였지만, 남매는 서로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백천범은 남제화의 어깨를 두드린 뒤, 마차에 몸을 실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달여가 지나갔다. 위지불이에게 있어서 지금의 생활과 혼례를 치르기 전의 생활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칭이 바뀌고 남제화와 더욱 친밀해진 것 말고, 다른 것들은 여전히 예전과 같았다.
애초에 단정하고 우아한 귀녀가 아니었으니 황후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늘 허리에 완도를 찬 채 궁내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렇게나 놀러 다니는 게 아니었다. 그건 황후 마마인 그녀의 새로운 임무, 시위통령侍衛統領이 할 일이었다.
이런 임무를 맡게 된 데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다섯 장로가 한 명밖에 안 남았다. 아무리 미련한 사람도 이런 결과에 의문이 들지 않겠는가? 그 장로들은 남원을 십여 년 이상 지배하면서 이미 곳곳에 자신의 세력을 침투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그들을 동시에 처리했으니 그들의 후손과 측근들은 뼈에 사무치도록 황제를 증오하는 게 당연지사. 혼례식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궁에서는 암살 시도가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죽으면 머리를 잃은 남원에 다시 장로제를 부활시키고 장로들의 후손들이 남원을 통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자객은 오히려 황제에게 생포되었다. 그때 위지불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소식을 들은 그녀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가 보기에 남원 황궁은 조금도 삼엄하지 않았다. 사실 예전에 그녀가 잠입할 때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궁에 허점이 너무 많기에 위지불이가 나서서 궁중의 시위 제도를 개편하겠다고 선언했다. 자객 훈련을 받았던지라 그녀는 자객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자객이 어떤 시간에 궁으로 잠입하길 좋아하는지, 어떤 경로를 이용하는지 등을 말이다.
남제화는 처음엔 허락하지 않았다. 어찌 황후가 시위대를 관장한단 말인가? 황후와 시위는 세월이 아무리 오래 흘러도 함께 논할 수 없는 동떨어진 관계였다. 그 누가 시위를 관장하든, 일국의 어머니인 황후에게는 절대 차례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정의 일을 처리하기에도 너무 바빠서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조차 줄일 지경이었다. 그는 그녀가 너무 심심할까 봐 걱정이었다. 거기다 그녀가 부리는 생떼를 견디지 못하고 허락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그녀는 시위통령으로 임명되었고, 또 특별히 황제의 친견을 의미하는 금패를 하사했다. 사실 금패까지 하사한 건 조금 과했다. 위지불이는 이미 황후가 아닌가. 감히 누가 황후에게 무례를 범할 수 있겠는가?
이건 남제화가 너무 마음을 쏟아서 오히려 객관성을 잃은 처사였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그녀에게 주어야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뒤에도 금도, 금요대, 금연갑 등을 하사했다. 그리하여 위지 황후가 맡은 시위통령은 금빛으로 번쩍거리며 시작되었다.
그녀는 시위대를 다시 편제하고 인원을 조정했다. 그리고 순찰하는 경로와 빈도수를 조정하고, 새로운 암구호까지 세 가지나 정했다. 전부 다 새롭게 바꾸었다. 지난번 행군 때, 그녀가 만든 수탉 암구호를 모두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확실히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정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엔 온갖 지혜를 짜내 궁리했다. 절대 황후의 체면을 잃어선 안 된다는 각오로!
그녀는 매일 친히 시위대가 순찰하는 경로를 걸으며 잘못을 수정하고 조정했다. 그러면서 궁중의 일부 구조도 조정했다. 시야를 쉽게 가릴 수 있는 가산假山을 옮기고, 굽이굽이 돌아야 하는 꽃길을 직선으로 곧게 바꿨다. 사람이 숨기 좋은 숲은 적당히 나무를 베어 시야를 확보했다. 그녀는 계속 공부工部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그녀의 빈틈없는 방비 덕분에 더는 자객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위지불이의 걱정은 끝도 없었다. 장로들의 근간은 너무 깊어 남제화가 일일이 뿌리 뽑기 어려웠다. 그녀는 특히 위 장로에 대해 안심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위 장로의 심사心思를 헤아릴 수 없었다.
지난번에 붙잡은 자객을 심문한 결과, 그는 화 장로의 문하임이 밝혀졌지만 위 장로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어쩌면 위 장로가 배후에서 다른 장로들의 후손들을 충동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니 그녀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