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1화
백천범이 정전으로 돌아오자 묵용감이 얼른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반갑지 않은 소리였다.
“황상께서는 잠시 혼자 좀 계세요. 전 오라버니께 볼일이 있어요.”
묵용감은 아내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성이 나서 코를 만지작거린 그는 그래도 그녀를 뒤따라갔다.
백천범은 그가 뒤에서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급히 서재로 뛰어 들어가서 문을 닫아 버렸다. 묵용감은 문밖에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위지불이라는 계집이 목을 길게 빼고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자 그 계집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백천범도 막 초왕부에 들어왔을 때, 멀리서 그가 보이기만 하면 바람같이 도망치곤 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결국 서재에 들어가지 않았다.
남제화는 백천범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약간 의아했다.
“닙닙아, 무슨 일이냐?”
“오라버니, 태황이 정말 불이에게 고충을 심었어요?”
남제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알게 됐구나.”
“왜 진작 저에게 알려 주지 않았어요?”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니? 괜히 근심만 하나 늘어나는 것을.”
“…내가 태황에게 부탁해 볼게요.”
“소용없어.”
남제화가 말했다.
“절대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다.”
“대체 무얼 원하는 건데요?”
남제화가 말했다.
“다 남원을 위한 거라고 말하지만, 결국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게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태황은 재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어. 사실 말하자면, 이 오라비도 잘못은 있단다. 그 당시 오라비가 실의에 빠져서 태황이 몰래 세력을 키우는 걸 알면서도 막지 않았지. 하지만 더 이상 이런 상황을 좌시하진 않을 거란다.
불이가 바로 나의 한계점이야. 그녀가 정말 불이에게 해가 될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이 오라비도 더는 혈육의 정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태황이 아무리 지독하게 굴어도 자기 목숨은 중히 여기지 않느냐. 목숨이 날아가는데 욕심을 부려 봐야 무엇 하겠느냐?”
백천범은 탄식하며 말했다.
“태황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도 종신형에 불과하니, 저와 오라버닌 독한 사람이 아니라 그녀처럼 몰인정할 수 없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되었다. 지난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꾸나.”
남제화는 백천범을 위로했다.
“넌 안심하거라. 불이는 내가 곁에 있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고충을 제거하지 않는 한 오라버니와 불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잖아요.”
“황궁에 머무는 것 자체가 이미 자유를 상실한 것이지. 이 오라비는 이미 습관이 되어서 괜찮다. 단지, 불이가 가엽지.”
백천범은 남원 황궁만이 아니라 하늘 아래 모든 황궁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이와 오라버니가 새장에 갇혀 있듯 그녀 또한 같은 신세가 아닌가? 부군이 그녀를 아껴 주고, 때때로 그녀를 데리고 궁 밖에 나가 놀아 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답답해 죽었을 것이다.
이때, 강암룡이 들어와 남제화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그러자 남제화의 표정이 순간 무너져 내렸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일단 알겠다.”
백천범이 물었다.
“또 무슨 일이에요? 오라버니.”
“그녀가 나에게 만나자고 하는구나.”
백천범은 그녀가 누군지 당연히 알아채고 물었다.
“오라버니, 갈 거예요?”
남제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어떤 소란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단다. 가 봐야지. 그래 봤자 몇 마디 대화일 뿐.”
백천범은 말했다.
“오라버니가 저 대신 말 좀 전해 주세요. 조금이라도 기대했던 제 잘못이니 앞으로 알아서 하시라고요.”
* * *
화려하고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남제화는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짐을 무슨 일로 불렀습니까?”
여제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과인은 닙닙을 만나고 싶구나.”
남제화는 피식 웃었다.
“닙닙을 만나서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묵용감도 왔습니다. 감히 닙닙에게 허튼짓을 한다면 그가 직접 당신의 목을 벨 겁니다.”
여제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거라. 그냥 딸아이를 보고 싶을 뿐인데 어째서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매도하느냐?”
“무슨 이유로 그녀를 만나겠다는 겁니까?”
“십여 년이나 못 봤으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한 것뿐이란다.”
남제화는 비웃음을 흘렸다.
“자기 손으로 그 애의 행복을 망쳤으면서 이제 와서 그 애를 다시 볼 낯이 있습니까?”
“그때는 과인도 어쩔 수 없었단다. 다행이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과인은 더욱더 뿌듯하구나.”
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닙닙은 아마 과인을 증오하겠지. 하지만 과인이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건 바로 닙닙이란다.”
난데없이 감상에 젖은 여제의 모습에 남제화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의 기억에 여제는 결코 봄을 슬퍼하거나 가을을 아파할 사람이 아니었다.
“화아.”
여제는 그에게 애원했다.
“이 어미가 네가 부탁하마. 닙닙을 좀 만나게 해 다오.”
“제가 막는 게 아니라 닙닙이 태황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참, 당신에게 전달해 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제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닙닙이 과인에게 말을 전달해 달라고 했단 말이냐? 뭐라고 하더냐?”
“조금이라도 기대를 걸었던 자기가 잘못이니, 앞으로 알아서 하시랍니다.”
여제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닙닙이 왜 그런 말을 했지?”
“닙닙은 당신이 불이에게 고충을 심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당신이 감옥에 갇혀서도 뉘우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닙닙은 아주 실망했습니다.”
여제는 시선을 떨구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닙닙은 과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황상도 과인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자식은 전생의 빚이라더니… 너희들은 모두 과인에게 빚을 받으러 온 것이로구나.”
남제화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그곳을 나왔다.
* * *
팔월 열이틀 날은 남원 황제의 대혼일이었다. 어젯밤, 위지불이는 너무 들떠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서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 궁녀들이 그녀를 깨웠다.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는데 말이다.
겨우 눈만 뜬 위지물이는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꽃잎을 띄운 물로 목욕을 하고 온몸에 훈향을 한 후, 거울 앞에 앉아서 실면도를 할 준비를 했다. 이건 남원의 전통 풍습이었다. 덕망 높은 노부인이 명주실을 꼬아서 얼굴에 있는 솜털을 뽑아 주었다.
위지불이는 밤을 거의 지새웠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순간 명주실이 뺨 위를 지나가자 그녀는 너무 아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실면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위 장로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위지불이가 이를 앙다무는 것을 보고 자신이 미래의 황후 마마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황송해하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려 하자 위지불이가 얼른 그녀를 붙들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까는 마음의 준비를 안 했어요. 이제는 어떤 느낌인지 아니까 괜찮아요. 얼른 해치우죠.”
위 부인은 그녀의 시원스러운 말에 미소를 지었다. 황후가 대하기 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 역시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실면도를 마무리했다.
실면도가 끝나자 궁녀들이 혼례복을 가져왔다. 남원의 예장禮裝은 동월처럼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얇고 가벼운 옷을 여러 겹 입어야 했다. 위지불이는 몸이 가늘어서 예닐곱 겹의 옷을 입어도 부해 보이지 않고 잘록한 허리는 여전히 한팔로 감을 수 있을 정도였다.
금색 실타래를 감아 만들어 가볍고 정교한 봉관鳳冠은 가운데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고 화려한 깃털로 둘레를 장식했다. 위지불이는 손으로 깃털을 살짝 쓰다듬으며 저도 모르게 아운소를 떠올렸다.
화려한 장신구들은 위지불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마에 붙인 물방울 모양의 황금 자개는 평소에 붙이던 얇은 조각과 달리 가운데가 볼록 솟아오른 게 손대중으로도 꽤 무게가 나갔다.
위지불이는 귀를 뚫지 않아 귀찌를 사용했는데, 긴 황금 수술이 늘어지고 아래쪽에는 비둘기 알 만한 크기의 투각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속이 비어 있는 장식이었다. 만약 속이 꽉 찬 장식이었다면 귀가 뜯길까 봐 걱정했을 것이다.
목에는 길이가 다른 황금 목걸이를 세 개나 걸쳤다. 긴 목걸이 안에 짧은 목걸이를 하나씩 겹쳐 거는 바람에 목이 길게 늘어지는 것 같았다. 두 팔에는 각각 열두 개의 황금 팔찌를 걸쳤는데, 가는 고리가 서로 부딪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열 손가락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손가락마다 황금 반지를 끼워서 양손을 들어 올리면 금빛으로 찬란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위지불이는 남원에서 금을 많이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많이 쓰는 건 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녀의 몸에 금산을 올려놓은 것 같았다. 무거워진 그녀 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듣기 싫을 리가 있겠는가? 자그마치 금에서 나는 소리인데!
동수여는 위지불이의 단장한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찬찬히 그녀를 살피던 동수여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물었다.
“이 장신구들은 혼인한 뒤에 너에게 주는 것이냐?”
위지불이는 대답했다.
“아마 그럴 거예요. 남원에는 금이 많이 나거든요. 폐하께서도 금광을 많이 가지고 계셔요.”
동수여는 바로 잇몸이 보이도록 웃었다.
“그럼, 잘 받아 두어라. 우리가 네 곁에 없으니 돈을 좀 가져야 네 몸을 보호할 수 있단다.”
위지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폐하께서 저를 푸대접하시겠어요? 저번에도 금화를 많이 줬는데, 얼마 안 썼어요. 이따가 어머니한테 다 갖다 줄게요.”
동수여가 말했다.
“이제는 집안도 예전과 달라졌단다. 가게와 농지도 생겨서 나와 네 아버지는 이미 돈방석에 앉은 상황이지. 이제는 돈이 없어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란다. 그러니 네 돈은 네가 잘 가지고 있거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급하게 써야 할 수도 있으니까.
이 어미의 말을 잘 새겨듣거라. 세상을 살아갈 때, 누구한테 의지하는 것보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중요하단다. 자기 돈이 있으면 허리에 힘 딱 주고 살 수 있어. 요즘 세상에 쌈짓돈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위지불이는 놀리듯 물었다.
“그럼, 아버지한테 쌈짓돈이 있어요?”
동수여는 눈을 부릅떴다.
“네 아비가 어딜 감히?”
위지불이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니, 이제 우리 집은 부자가 되었으니 동생 하나 더 낳으세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직 젊으시잖아요. 그 아이가 저 대신 곁에서 효도할 거예요.”
동수여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호통쳤다.
“얘가!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내 나이가 몇인데? 낳긴 뭘 낳아! 우리는 걱정하지 말거라. 황후 마마는 폐하의 친여동생이니 우리도 황가의 인척이 된단다. 황후 마마께서 우리를 보살펴 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