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0화
위지불이는 그녀의 부모님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불안했다.
“무슨 얘길 하려고 제가 듣지도 못하게 하세요?”
“네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란다.”
위지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발걸음을 옮기지 않은 채 동수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무슨 일인데 제가 알면 안 돼요?”
그녀가 평소에 이렇게 치근덕거리면 동수여는 곧바로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지만, 지금은 남제화 앞이라 감히 그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위지불이를 달랬다.
“착하지? 우선 나가 있거라. 어미가 폐하께 용건을 다 말씀드리면 다시 들어오라고 하마.”
위지불이가 남제화를 힐끔 쳐다보니, 그가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사람들과 일단 친해지면 너무 허물없이 대하는 게 문제였다. 자리를 떠나기 전, 위지불이는 동수여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머니, 폐하께서 사위이긴 하지만, 동시에 남원의 황제예요. 말씀만 나누시고 절대로 손찌검하시면 안 돼요.”
그녀는 또 남제화에게 말했다.
“제가 손찌검을 자주 하는 건 다 어머니한테 배운 거예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동수여는 하마터면 죽일 년이라고 소리칠 뻔했다. 남제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고 그녀는 곧바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계집애는 맨날 농담만 늘어놓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동수여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틈에 소매로 시선을 가리고 위지불이를 노려봤다. 위지불이는 어머니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뻗대지 않고 곧바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긴장하는 사람은 남제화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첫인상이 바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위지 부부가 그와 단독으로 할 말이 있다고 말하자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동수여는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일은 반드시 남제화와 위지불이가 성혼하기 전에 말해야 했다. 단지, 동수여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위지하에게 먼저 말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위지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남제화는 이상한 분위기에 더욱더 긴장했다. 그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국공과 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편히 하십시오. 짐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아니까요.”
동수여는 위지하가 고개를 축 늘어뜨린 것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사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그녀가 나서야 했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자신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폐하, 알고 싶은 일이 있는데… 물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인,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폐하께서는 황제로 귀하신 몸이십니다. 후사에 관심이 많을 듯한데 어떠십니까?”
남제화는 동수여가 왜 이런 걸 묻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인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짐은 평생 불이 한 명에게만 장가갈 겁니다. 그녀의 아이가 장차 대통을 이어받을 겁니다.”
동수여는 그의 말을 듣고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불이가 폐하께서 후궁을 두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나요? 이 계집애는 너무 철이 없다니까요. 폐하께서는 황실의 가문이시니 후사가 아주 중요한 것을요. 만일 불이가 아이를 낳지 모, 못한다면 다른 분이 대신 폐하의 후계자를 낳아야 할 텐데… 그래도 동의하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이 일은 나중에 제가 불이와 얘길해 보겠습니다…….”
남제화는 예리하게 그녀의 말 속에 담긴 핵심을 포착했다. 그가 동수여를 보며 물었다.
“부인께서는 지금 불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동수여는 어색하게 설명했다.
“어쨌든 곧 황후가 될 텐데. 만약, 그러니까 저는 아주 만일의 상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줄곧 침묵하고 있던 위지하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만일은 무슨!”
동수여는 입술을 몇 번 꿈틀거렸지만, 남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묵인한 것이었다. 남제화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이가 왜 아이를 낳지 못하죠?”
동수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이는 팔자가 사나워서 어릴 때 큰 병을 앓았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때는 집에 돈이 없어서 큰 도시로 가 아이를 치료할 수 없어 그냥 촌에 있는 의원에서 치료했어요. 민간요법을 얼마나 썼는지, 병이 다급하면 아무 의사나 찾는다고… 결국 아이는 살았지만, 성대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저희 애는 그쪽 방면이 그리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아마, 아이를 낳, 낳을 수 없을 겁니다.”
남제화가 물었다.
“어느 방면이 비정상입니까?”
동수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일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그녀를 대신해 위지하가 입을 열었다. 남제화도 같은 남자이기에 그가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나을 것이다.
“불이는 달손님이 아직 없습니다.”
“…….”
그는 사실 당시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불편함까지 감수하며 어떻게 그리 오래 속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알고 보니, 그런 일들이 애초에 없었던 거다.
“폐하.”
동수여가 말했다.
“우리 부부는 이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성혼 후에 알게 되시면, 그건 황제를 기만하는 것이기에 성혼 전에 폐하께 미리 고하는 겁니다. 만약 폐하께서 이 사실로 인해 성혼을 취소하신다 해도 저희 부부는 어떤 원망도 하지 않을 겁니다.”
남제화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국공과 부인께서는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짐은 불이를 좋아합니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든 없든 저는 그녀를 황후로 맞이할 것입니다.”
* * *
백천범은 위지불이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어린 처자는 수려한 용모에 성격도 순수했고 또 약간 어리바리한 게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이런 여인이라면 자신의 사랑을 목숨 걸고 지킬 것이다. 오라버니가 이런 사람을 만난 건 정말 하늘의 복이었다.
위지불이는 백천범 앞에서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마디 물어야 겨우 한마디 대답했다. 백천범은 신분 때문에 그녀가 어려워한다는 걸 알고 가능한 한 천천히 가벼운 말투를 사용했다. 편안한 어감으로 그녀에게 몇 마디 농담도 건넸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백천범은 조금 의아했다. 자신은 상냥하고 친절한 황후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도 그녀 앞에서는 편안하게 대화를 하곤 했는데… 위지불이는 왜 이렇게 그녀를 무서워하는 걸까? 곁눈질로 옆을 보니 의문이 풀렸다. 위지불이는 얌전히 앉아 있는 묵용감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 웃으면서 위지불이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 궁전이 낯설어요. 불이, 저랑 같이 나가서 산책 좀 할까요?”
위지불이가 막 백천범을 데리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묵용감이 갑자기 일어서자 위지불이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때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는 여기 있으세요. 저는 불이와 나눌 말이 있어요. 황상께서 함께 계시면 대화하기 불편해요.”
묵용감은 눈살을 찌푸렸다.
“밖은 햇살이 너무 따가우니 나가지 않는 게 좋소.”
“궁궐 안에도 그늘진 가로수길이 있어서 괜찮아요.”
남들 앞에서 더는 말을 늘릴 수 없어 묵용감은 하는 수 없이 허락했다.
“그럼, 내가 아래층까지 데려다주겠소.”
위지불이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동월 황제가 아내를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황후 마마가 어디를 가든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장차 남제화가 그녀를 대할 때도 이럴까?
묵용감은 말을 지켰다. 백천범을 아래층까지 데려다주고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압박감이 사라지자 위지불이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는 백천범에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황후 마마께 정말 다정하시네요.”
백천범이 대답했다.
“오라버니도 다정하게 대해 주실 거예요.”
“폐하께서는 이미 다정하게 대해 주고 계세요.”
위지불이가 고백했다.
“황후 마마께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폐하께서 저를 아내로 맞이해 주신다니……. 몇 달, 아니 며칠이라도 폐하와 함께 살 수 있다면 전 그걸로 만족해요.”
백천범은 깜짝 놀라 물었다.
“불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고충에 중독됐어요.”
위지불이가 왼팔 소매를 걷어붙였다.
“바로 이 팔 안에 있어요.”
백천범은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고충에 당할 수 있어요? 오라버니가 해독해 주지 않으셨어요?”
위지불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도 해독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건 여제가 심은 고충이에요.”
백천범은 몸을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녀도 여제의 고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위지문우도 여제의 고충에 당해 죽음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제는 또 그의 후손에게 고충을 심은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감옥 안에 갇혀 있었는데도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다니!
“그녀가 당신에게 고충을 심은 이유는 뭐죠?”
“당연히 저를 이용해서 폐하를 협박하기 위해서죠. 폐하가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
백천범의 앞에서 위지불이는 여제에 대한 증오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여제는 정말 늙은 요괴예요. 자기 친아들까지도 조정하려 하다니!”
백천범는 속에서 말 못 할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여제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했지만, 십여 년의 감옥 생활을 통해 여제가 뉘우쳤기를 바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강산은 변한다지만, 인간의 본성은 바꾸기 어려웠다. 만약 그때 그녀가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오늘날에 와서 위지불이와 오라버니가 입은 화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백천범이 물었다.
“만나고 싶어요.”
위지불이는 황급히 막아섰다.
“황후 마마, 절대 안 됩니다. 여제는 이런 수법에 뛰어나요. 제게 고충을 심은 것도 순식간이었는걸요. 황후 마마께서는 절대 가시면 안 돼요. 게다가 만일 제가 황후 마마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걸 황상께서 아시면 절대 저를 용서치 않을 거예요.”
백천범은 위지불이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녀는 더는 궁궐을 둘러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요. 제가 오라버니와 상의해 볼게요.”
위지불이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 마마, 고충에 관한 일은 제 부모님께는 알리지 마세요.”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