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9화
남원 황궁은 처음이었지만, 묵용감은 이곳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남원 황궁을 상세하게 그린 지도가 그의 남서방 비밀 서랍 안에 있었다. 그는 궁전과 누각의 위치, 궁도宮道의 배열 그리고 호위 순찰 병사들의 규칙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수풀을 지나고 다시 꽃이 가득 핀 화원을 지났다. 밤의 장막 아래 호위 대열이 그의 앞을 지나갔으나 아무도 그가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호위 병사들이 자리를 떠나자 그는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달빛마저 나무 그늘로 가려져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묵용감은 잠시 서서 어둠에 눈이 적응하길 기다렸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큰 나무 두세 그루를 돌아서 그가 땅 위에 있는 입구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연갑軟甲을 입은 호위병 서너 명이 날카로운 장창을 들고 나타났다. 우두머리인 듯한 병사는 그의 정체를 아는지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폐하, 여기는 황궁의 금지된 구역입니다.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
묵용감은 냉소를 지었다.
“짐이 누군지 아느냐? 남제화가 뭐라고 지시했느냐? 짐이 기어이 들어가겠다면, 그래도 막으라더냐?”
그 사람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꼭 들어가시겠다면 저희는 막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폐하께서 폐하께 전해 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이빨이 빠져도 여전히 호랑이다.”
묵용감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짐은 궁금하구나. 이빨이 빠진 호랑이가 어떤 모습인지. 분명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피식 웃더니 싸늘한 시선으로 명했다.
“어서 안내하지 못하겠느냐?”
병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는 관목에 가려져서 낮에도 발견하기 어려웠으니, 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안내하는 자가 없었다면 묵용감은 숲을 한참 더 헤매야 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멀리 등불이 흔들려 돌벽에 온갖 기괴한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조용하고 좁은 통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가 오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돌계단을 다 내려오자 통로가 조금 넓어지고 등불도 더 자주 나타났다. 호위병은 묵용감을 데리고 여러 개의 철문을 통과해 마침내 대청으로 들어왔다.
통로를 따라오면서 본 누추하고 황량한 광경에 묵용감은 조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대청에 들어서자 그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네 귀퉁이에 있는 굵은 기둥 위엔 커다란 유리 등불이 달려 있었다. 또한 커다란 야명주가 네 귀퉁이를 비추고 있어서 음산한 땅속 감옥이 궁전처럼 느껴졌다. 발밑에는 두꺼운 파사波斯(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밟을수록 그 부드러움에 빠져들었다. 벽 가까이에 세워진 고전 양식의 장식장에는 아름다운 도자기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대청 깊숙한 곳에는 계단이 있었는데, 궁궐의 형식을 그대로 본떠 주홍색으로 칠한 것이 마치 단폐처럼 생겼다. 단상 위에는 자단나무로 짠 보좌가 있었는데, 오색 보석으로 장식해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났다. 묵용감은 뒤를 돌아보니 그를 데리고 들어왔던 호위병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데, 높은 단상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 왜 이리 가까이 다가오지 않소?”
묵용감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한 사람이 자단나무 보좌에 앉아 있었다. 백천범과 닮은 여인. 하지만 백천범보다 화려한 외모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화려한 머리 장식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땅속에서 막 피어난 커다란 꽃처럼 보였다.
묵용감은 심신이 약간 흔들리는 걸 느끼고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앞으로 두 걸음 다가갔다.
“짐을 보고도 태황은 놀라지 않는 것 같소?”
“화아의 대혼이 있으니, 만약 닙닙이 오려고 한다면 당연히 폐하께서 함께 오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소. 이왕 이곳에 왔으니 폐하께서는 당연히 과인을 만나고 싶을 거라 짐작했지.”
“짐이 당신을 만나 보려고 한 이유는 천하를 뒤흔들던 남원 여제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을 뿐이오. 소문대로 대단한 신통력을 가졌는지, 정말로 요술을 부려 사람을 홀리는지 말이오.”
그는 피식 냉소를 짓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냉혹하고 몰인정하여 친자식도 장기판의 말처럼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을지 구경하러 왔소.”
여제의 눈빛이 약간 날카로워졌다.
“폐하께서도 천자의 핏줄이시니 잘 아실 거요. 천자의 혈통은 칠정육욕을 버리고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이 되어야만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태황이야말로 진정한 고독자가 되었소. 아들은 자신의 어미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고 딸은 어미를 인정하지 않으니.”
묵용감은 손을 내저으며 비꼬았다.
“설마 태황이 이루고자 하던 대업이 이런 것이오?”
“과인이 죽지 않는 한 기회는 언제라도 있소. 만약 폐하께서 오늘 과인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말이오.”
묵용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아가 비록 태황을 어미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오. 만약 태황이 짐의 손에 죽는다면 그녀의 마음에 응어리가 생길 수밖에 없소. 짐은 그녀를 힘들게 만들지 않을 것이오.”
여제는 긴장했던 어깨를 약간 떨어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묵용감은 사사로운 노여움도 반드시 갚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이전에 동월에 대란을 일으켰고, 그들 부부를 갈라놓았으며 혈육을 헤어지게 했다. 이 모든 원한이 그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천범이 있기에 그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묵용감은 화제를 전환했다.
“태황께서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짐이 죽이지 않아도 누군가 당신을 죽이러 올 것이오.”
여제는 뭔가 떠오른 듯 눈빛을 번뜩였지만 이내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과인은 그를 기다리고 있소.”
묵용감은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듣자 하니 태황의 고충이 그리 대단하다고? 지금 짐이 그대 앞에 있는데 왜 손을 쓰지 않는 거요?”
여제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과인을 죽이러 오신 게 아닌 이상, 과인도 흉수를 뻗지 않을 거요.”
사실 그녀는 이미 손을 썼다. 묵용감이 눈을 치켜뜨는 그 찰나에 바로. 다만 그의 심력이 너무 강하고 살기가 강렬해서 그녀의 수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충을 다루는 고수 중 고수였지만,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묵용감은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묵용감은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사실 그가 전혀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시선을 들었을 때, 그녀가 자신의 심신을 빨아들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미리 경계하고 있었고 거리도 멀어서 그녀의 수법이 통하지 않을 뿐이었다.
“짐이 여기 온 것은 태황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오.”
“말씀하시오.”
묵용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범아의 친아버지는 누구요?”
여제는 예상 밖의 물음에 당황했다. 곧게 세웠던 허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야 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고 새빨간 입술이 덜덜 떨면서 한참 동안 한 글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태황, 짐에게 알려 주시오. 범아의 친부가 누구요?”
묵용감은 목소리를 높여 그녀를 압박하며 다시 물었다. 여제는 무의식적으로 새끼손가락의 금빛 호갑투를 매만지며 시선을 땅바닥에 떨군 채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그걸 왜 물으시는 게요?”
“범아는 혈육의 정을 중히 여기지만, 당신이란 어미는 없는 것과 같으니, 짐이 대신 아버지를 찾아 주려고 하오. 그녀의 생부는 살아 있소?”
여제의 뺨이 움찔거렸다.
“과인도 모르겠소.”
“범아의 생부는 어디 사람이오? 성이 어떻게 되오? 출신은 어떻소?”
여제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몸을 곧게 폈다. 그녀는 갑자기 몇 살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들었을 때, 그녀의 이마 앞에는 깊은 주름이 몇 가닥이나 드러났다. 여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폐하도 모르는 게 더 낫소.”
* * *
비록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동수여는 남제화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마음속에 불안이 일었다. 남원 황제는 아주 준수한 용모로, 차갑고 근엄한 동월 황제보다 훨씬 더 멋있었다.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로 대하기에 성격도 좋아 보였다.
위지 부부에게도 예의 바른 모습으로 대하는 완벽한 사윗감이었다. 그는 출신이 고귀하지만, 거드름 피우지 않았고 겸허하며 우아한 태도에 말투까지 범상치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위지하를 끌어당기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남제화는 양손으로 두 사람을 일으켰다.
“국공과 부인께선 이렇게 예를 차릴 필요 없습니다. 얼른 상좌에 오르십시오.”
그들이 자리에 앉자 남제화는 몸을 굽혀 도리어 예를 취했다.
“사위가 장인과 장모께 인사드립니다.”
위지하 부부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답례하며 말했다.
“폐하, 이리 예를 차리시면 소인들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황송할 뿐입니다.”
위지불이는 한쪽에서 입을 가리고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어머니. 앉아서 말씀하세요.”
위지하 부부는 황송해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규범에 따르면, 천 리나 떨어진 동월까지 직접 가서 불이를 맞이하고 데려와야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로 장인과 장모께 번거로운 걸음을 하게 했으니 장인 장모께 용서를 구합니다.”
“아이고, 별말씀을…….”
위지하 부부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다가 남제화의 부드러운 손짓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제화는 그들이 몹시 긴장한 것을 보고 위지불이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남제화의 부드러운 웃음과 온화한 태도에 동수여도 천천히 긴장을 풀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위지하는 옆에서 이따금 몇 마디 덧붙였다.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면 세 사람 모두 활짝 웃었고, 웃음거리가 된 위지불이는 자연스레 큰소리로 반박했다. 대체 부모님은 저를 얼마나 미워하길래 남원까지 달려와 딸의 흑역사를 털어놓는 거람! 이래 가지고 어떻게 남원의 황후가 되겠냐고!
한참 동안 떠들고 웃다 보니 분위기도 점차 가벼워졌다. 동수여는 그제야 감히 남제화를 바라볼 수 있었다. 위지하의 손가락도 어느새 떨림을 멈추었다. 위지 부부는 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말투에는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남제화는 그들이 말로만 그러지 위지불이를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으로는 딸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가슴에는 진정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는 이러한 가족애가 너무 부러웠다. 처음에 이런 화제를 꺼낸 건 위지 부부의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배려한 거였지만, 지금은 자신이 따뜻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동수여와 위지하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내 동수여가 입을 열었다.
“불이, 넌 잠시 나가 있어라. 난 네 아버지와 단둘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