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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67)화 (866/1,192)

제867화

여제의 눈에 천천히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내가 그 애를 잘못 봤다. 나는 이 혼사에 동의할 수 없으니, 그 애는 혼사를 치르지 못할 것이다!”

“전하.”

은색 가면을 쓴 자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일이 더 있습니다. 방금 접한 소식인데… 동월의 황제와 황후가 남원에 온다고 합니다. 위지불이의 가족들도 함께 온다 합니다.”

여제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묵용감도 온다고?”

“예. 동월 황제가 온다 하였습니다.”

여제가 뒷짐을 지고 잠시 서성였다.

“그래, 닙닙이가 오는데 그자가 안 올 리 없지. 그자가 있으면 나 역시 쉽게 손을 쓰지 못하겠구나.”

그녀가 심란한 듯 한자리를 몇 바퀴 맴돌다 멈춰 섰다.

“되었다. 폐하가 그리 일편단심으로 위지불이와 혼사를 올리고 싶어 하니 뜻대로 해 줘야겠다. 그리 좋으면 위지불이를 아내로 맞으라지.”

은색 가면을 쓴 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면 뒤로 보이는 그의 눈망울이 번득였다.

“폐하,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여제가 냉소를 지었다.

“동월의 황제가 온다니 잠시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우선 물러가거라. 다른 소식이 있거든 곧장 찾아와 고하고.”

은색 가면을 쓴 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여제가 의자에 앉자 화려한 치맛자락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펼쳐졌다. 그녀는 공작 모양의 향로를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결국 남제화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백성보다 사랑을 선택했다. 이런 황제가 황권은 되찾아 무엇하겠는가? 남원은 조만간 그의 손에 망가지고 말 것이다!

* * *

대혼이 얼마 남지 않아 남제화와 위지불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남제화는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황제가 되겠다고 결심했기에 매일 시간 맞춰 조정을 찾았고, 퇴청 후에도 서재에서 상주문을 살폈다. 다시 보전에 올랐으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는 최대한 빨리 정무를 숙지해 빠르게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했다. 또 위 장로가 암암리에 그를 음해하려는 것은 아닌지도 계속 예의주시해야 했다. 대혼 준비 또한 틈틈이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예전에는 위지불이와 종일 붙어 다녔지만, 요즘은 너무 바빠서 밥을 먹을 때나 얼굴을 마주하곤 했다.

위지불이는 남원 궁정 귀부인의 예절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제화가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위지불이는 남제화의 체면을 세워 주고 싶었다. 하나같이 남제화가 그녀를 아내로 맞는 걸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저 출신이 낮으니 그리 단정하지 않은 것뿐인데……. 그녀는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을 꼭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예절을 배우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는 지구력이 있었기에 잘 견딜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무술을 배울 때, 기마 자세를 연습하던 경험까지 살려 이를 악물고 버티며 귀부인의 예의라는 걸 전부 다 익혔다. 매일 연습이 끝난 뒤에는 숨을 헐떡이기 일쑤였고 밥도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다. 남제화는 의아한 듯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예절을 배운다더니… 어찌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는 것 같소.”

위지불이가 밥을 크게 떠먹으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훈련하는 것보다 더 힘든걸요. 차라리…….”

옆을 지키던 나이 지긋한 마마嬷嬷가 조용히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

“마마,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땐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남제화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억누르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우거나 눈을 찡긋거리며 무언가 계속 표현했다. 그 모습에 남제화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마마가 다시 한번 그녀를 일깨웠지만, 남제화의 눈빛에 곧장 한쪽으로 물러났다. 남제화가 위지불이에게 음식을 덜어 주며 말했다.

“불이, 배우지 않는 게 좋겠소. 그런 성가신 규칙은 나도 지키기 귀찮소.”

위지불이는 눈을 찡긋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남제화가 말했다.

“그리 표현하지 말고 말을 하시오.”

위지불이는 시종을 드는 이들이 멀찍이 물러선 걸 확인한 뒤에야 작게 속삭였다.

“저도 그저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배우는 척만 하는 거예요.”

* * *

위지불이는 꿈결에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자고 있느냐? 햇살이 네 엉덩이를 비추고 있지 않느냐!”

그녀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침대 머리맡에 웬 부인이 화려한 동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익숙한 얼굴에 그녀는 눈을 힘껏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어떻게 제 꿈속에 다 오셨어요? 그런데 옷이 정말 예뻐요. 나중에 제가 한 벌 해서 동월로 보내 드릴게요. 어머니, 왜 이제야 제 꿈에 나타나신 거예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동수여는 딸의 잠꼬대가 우습다가도 마지막 한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놈의 딸은 사내아이처럼 천방지축이어서 이런 따뜻한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꿈속이라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지 평소라면 절대 꺼내지 않을 말이었다. 동수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도 아무렇게나 나뒹굴더니……. 시집갈 때가 되어서도 나아진 게 하나 없는 게야!”

위지불이는 눈을 비비며 다시 중얼거렸다.

“꿈이 현실 같네. 내가 시집간다는 걸 어머니가 어떻게 알지? 어머니가 알면 난 바로…….”

그러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마구 비벼댔다. 그러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수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진짜 어머니예요? 남원에 왔어요?”

동수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꿈인지 아닌지 네가 꼬집어 봐라.”

위지불이는 자신을 손등을 꼬집더니 입가를 씩 올리며 웃었다.

“아프네. 정말 꿈이 아니야.”

그녀는 동수여의 팔을 덥석 껴안았다.

“어머니, 어떻게 오신 거예요?”

“네가 시집간다고 하는데 어미가 안 올 수 있니?”

위지불이는 어린 원숭이처럼 흥분해 뛰어올랐다.

“누가 알려 줬어요?”

“물론 너한테 장가들려는 네 남자지.”

“아버지는요? 아버지도 오셨어요?”

“네 아버지도 오셨다. 지금 밖에 있어.”

위지불이는 아버지가 잔뜩 화가 나 있을 걸 생각하니 금세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혼내러 오셨죠?”

동수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겁이 나느냐? 집을 뛰쳐나갈 때는 왜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한 게야?”

위지불이는 헤헤거리며 웃었다.

“그때는 제가 철이 없었잖아요.”

“아이고, 지금은 다 컸다?”

동수여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래서 이제 시집까지 가시겠다? 안심하거라. 곧 황후가 될 텐데… 네 아버지가 감히 널 어떻게 혼내겠느냐?”

위지불이는 어머니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건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헷갈렸다. 위지불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황후가 되든 안 되든, 저는 아버지 딸이잖아요.”

“되었다. 얼굴도 봤고 할 말도 했으니 얼른 씻고 나오거라.”

동수여가 그녀를 꾸짖었다.

“곧 황후가 될 녀석이 눈곱은 왜 이리 많은지.”

위지불이는 그녀의 논리에 기가 막혀서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후는 자고 일어날 때 눈곱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남제화는 코도 곤 적이 있는데!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위지불이가 씻을 때도 동수여는 한시도 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위지불이는 거울 속으로 어머니를 힐끗 쳐다보더니 투덜거렸다.

“어머니, 왜 자꾸 저를 쳐다봐요?”

동수여는 궁녀들 앞에서 딸의 체면을 깎을 수 없어서 웃기만 했다. 위지불이의 머리 단장이 끝나고 시종들이 나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미는 아직도 잘 모르겠구나. 네가 경국지색도 아닌데 어찌 남원 황제의 마음에 들었을까?”

“그건…….”

위지불이는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아마 싸우면서 서로 정이 든 걸 거예요.”

동수여가 문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황제와 싸운 적이 있단 말이냐?”

“싸우기만 했게요? 그에게 독을 먹인 적도 있어요.”

동수여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남원 황제는 마음도 아주 넓구나.”

궁녀가 들어와서 지시를 청했다.

“마마, 아침밥은 어디에 차릴까요?”

“오늘은 내 방에 차려 줘요.”

위지불이가 동수여에게 물었다.

“어머니, 아침 드셨어요?”

동수여가 대답했다.

“우리가 막 궁에 들어왔을 때, 강 총관께서 아침을 차려 주겠다고 했는데 너와 함께 먹으려고 기다렸단다.”

“그럼, 아버지도 불러서 함께 먹어요.”

위지불이가 기쁘게 말했다.

“우리 세 식구, 오랫동안 함께 식사하지 못했잖아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위지하가 들어오자 위지불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너무 오래간만이라 위지하는 원래 감상에 젖어 자애로운 아버지의 면모를 드러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개와 고양이가 날뛰듯 정신없는 딸의 모습을 보자 그는 습관적으로 얼굴을 굳히고 그녀를 나무라려 했다. 순간, 동수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여긴 남원이에요. 당신이 남원 황후에게 불경하면 화를 자초하게 될 거예요.”

위지하의 기세가 금세 수그러들었다.

“…난 이 아이의 아비오!”

“선국후가先國後家, 나라가 먼저잖아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 아이에게 예를 취해야 해요.”

“…….”

위지불이는 얼른 중재에 나섰다.

“아니에요. 여기에서는 그런 규율 같은 거 안 지켜도 되어요. 제 부모인데요. 저만 부모님께 예를 다하면 되지. 부모님이 딸에게 예를 취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동수여도 일품 고명 부인이라는 품계를 받았으니 궁중 규율에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궁녀들이 들어와서 음식을 차리는 중이라 더는 말하지 않았다.

위지불이의 방은 제법 커서 긴 탁자를 놓아도 비좁지 않았다. 예쁜 그릇 위에는 정갈한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알록달록한 빛깔이 눈을 사로잡고 고소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위지불이는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부모님이 불편해할까 봐 손을 흔들어 아랫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위지하는 탁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며 감탄했다.

“아침에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차렸단 말이냐?”

동수여가 눈을 흘기며 그를 타박했다.

“여기가 여염집인 줄 아세요? 이건 황후의 아침밥이라고요. 아니지. 아침 진지라고 해야죠. 딸이 황후가 되면 당신은 바로 국장國丈이라고요! 세상 물정 모르는 티는 내지 마세요. 딸애 체면 깎이잖아요.”

위지하는 아내의 핀잔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어쨌다고 딸애 체면을 깎는다는 거요?”

그는 몸을 곧게 펴며 말했다.

“나를 좀 보시오. 국공 나리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소?”

위지불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 국공 나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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