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6화
남제화가 말했다.
“짐과 함께 들어가자꾸나. 짐이 네가 앉을 곳을 마련해 두었다.”
위지불이가 말했다.
“오늘은 문무백관들이 전부 다 오잖아요. 제가 들어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전 문 앞에 서 있을…….”
남제화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호위 노릇을 하더니 정말 호위인 줄 아는 것이냐? 이제부터 짐을 지킬 필요 없다. 짐이 널 지켜 줘야지.”
그는 위지불이를 끌고 보전 안으로 들어가더니 성대聖臺 왼편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 앉혔다. 자신은 단폐에 올라 금으로 번쩍이는 옥좌에 앉았다. 문무백관이 잇달아 들어와 두 줄로 나란히 서서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위지불이는 저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성대 아래에 앉아 그들이 예를 갖추는 걸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돌려 남제화를 바라보자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음 편히 앉아 있으라는 의미였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것은 아니었기에 번거로운 의식이 그리 많진 않았다. 남제화는 관원들에게 몇 가지 말을 전했다. 대략 장로제가 폐지되었고 이제 황제가 직접 정무를 보게 되었으니 문무백관들은 계속해서 조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서론을 마친 그는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위 장로의 얼굴을 가볍게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보전을 다시 열었으니… 짐이 내릴 성지가 있다.”
강암룡은 앞으로 나와 손에 들고 있던 비단을 펼쳐 목청껏 외쳤다.
“천명을 받들어 황제의 조서를 가로되, 위지가의 불이는 온화한 성정에 몸가짐이 단정하며 현숙하고 총명하여 큰 성심을 얻었다. 이에 위지가의 불이를 황후로 책립하여 천하의 어머니로 백성들을 보살필 것을 선언하는 바다.”
성지 낭독을 마치자 대전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문무백관은 서로 눈치만 살폈고 위 장로는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전혀 놀랍지 않은 듯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황후로 책립된 위지불이였다.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어리둥절해했다. 꼭 얼이 빠진 닭 같았다. 남제화가 황권을 되찾은 뒤 내리는 첫 성지가 황후 책립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강암룡은 성지를 들고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강암룡은 무릎을 꿇더니 두 손으로 성지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마마, 성지를 받으십시오.”
위지불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남제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담이 컸던 그녀지만, 이번에는 정말 겁이 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조심스레 성지를 받아들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성지를 받은 뒤엔 어찌해야 하는지 망설이는데 문무백관이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외쳤다.
“경하드립니다, 마마. 감축드립니다, 마마…….”
그들의 목소리는 파도가 치듯, 산이 무너지듯 그녀의 귓속에 잇달아 전해졌다.
“바보 같긴, 뭘 그리 멍하니 있는 것이오?”
언제 온 건지 남제화가 단폐를 내려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관원들의 축하를 받았다. 환호가 멈추자 그가 위지불이에게 말했다.
“그대는 먼저 돌아가시오. 짐은 조회를 마친 뒤 돌아갈 테니.”
잠시 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
“짐을 기다리고 계시오.”
그의 말에 위지불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문무백관들 앞에서 손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황후가 공개적으로 황제를 때리는 걸 본다면 그녀에 대한 인상이 크게 깎일 것이다.
그녀는 황후가 쓰는 봉련鳳輦을 타고 정전으로 돌아왔다. 정전에 들어서니 계단 아래 시종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그중 궁녀 두 명이 다가와 한 사람은 그녀의 팔을 부축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가 계단을 오를 때 무릎을 꿇고 신발을 벗겨 주었다. 계단 위에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든 꽃잎을 그녀에게 뿌려 주며 외쳤다.
“삼가 마마를 우러러 뵙습니다!”
위지불이는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걸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꽃을 뿌리면 치울 때 제법 성가시겠는걸.’
시종들은 평소에도 그녀에게 공손히 대해 주었지만,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은 아니었다. 한 무리의 시종들에게 둘러싸인 위지불이는 조금 어색했던 나머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문이 닫히자 고요가 찾아왔다. 그녀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성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성지를 펼쳐 자세히 살펴보았다.
금 비단 밑바탕에는 어두운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오돌토돌하게 수가 놓여 있었다. 공작새 위주에 꽃이 얼기설기 뒤엉킨 정교한 자수였다. 가운데에는 남제화의 어필이 적혀 있었는데, 검은 바탕에 금이 뿌려져 있었다. 향을 맡아 보니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났다.
그녀는 성지를 한 구절 한 구절 읽던 중, ‘온화한 성정에 몸가짐이 단정하다’는 부분을 읽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참 뻔뻔하기도 하지…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데. 현숙하고 총명하다는 말은… 뭐, 총명한 건 사실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남원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겠는가.
그녀는 성지를 손에서 떼지 못하고 한참이나 들여다본 뒤, 벽에 둔 커다란 상자에 넣었다. 상자 속 너저분한 물건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성지를 여기 두는 건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그마한 자물쇠가 달린 정교한 금빛 녹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 조심스레 성지를 넣은 위지불이는 녹나무 상자를 커다란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그제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흥분과 긴장된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무슨 일인지 얼굴은 자꾸만 붉게 달아올랐다. 성지가 내려졌으니 이제 그녀는 곧 정식으로 남제화에게 시집을 가겠지. 그리되면 정말 밤낮으로 남제화 곁을 지켜야 했다.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찻잔을 들어 다시 크게 한 모금 들이켜는데 바깥에서 시종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갑자기 숨이 막힌 그녀는 천지가 울릴 만큼 큰 소리로 기침하기 시작했다.
위지불이의 기침 소리를 들은 남제화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어찌 이리 기침을 하는 것이야?”
위지불이는 잇달아 기침한 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제화가 그녀를 놀렸다.
“아이고, 어찌 눈물까지 보이실까. 기쁨의 눈물이오?”
위지불이가 손을 휘둘러 그를 한 차례 때린 뒤,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폐하, 벌써 끝나셨어요?”
“그래, 급한 일이 없어서 바로 돌아왔지.”
위지불이가 그를 나무랐다.
“폐하, 황권을 되찾았으면 군왕답게 근면 성실한 모습을 보이셔야죠. 예전처럼 지내시면 안 돼요. 그리고 오늘 처음 보전에 드셨는데, 어떻게 황후 책립부터 언급하실 수 있어요? 분명 문무백관들이 쑥덕거리며 폐하의…….”
남제화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짐이 황권을 되찾은 건 황후를 세우기 위해서였소. 보전에 올랐으니 당연히 가장 먼저 성지를 내려야지. 일각도 더 기다릴 수 없으니까.”
위지불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폐하, 황권을 되찾으신 게 황후 책립 때문이었어요?”
“물론 그렇고말고. 그들이 그댈 황후로 세우는 데 반대하니, 황권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이제 누가 더 반대할 수 있겠소.”
위지불이는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남제화는 어리둥절한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동한 것이오, 황후?”
위지불이가 코를 훌쩍였다.
“폐하는… 너무 제멋대로예요.”
“그대를 위해 제멋대로 구는 게 뭐 어때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위지불이는 가슴이 두근거려 그의 품에 포근히 안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폐하.”
“응?”
“폐하께서 저 때문에 황권을 되찾으셨다고 해도, 황권은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요. 앞으로 좋은 군주가 되셔야 해요.”
“알겠소. 그대 말대로 하지. 내 꼭 성실하고 좋은 군주가 되겠소. 예전에 짐은 황권을 중시하지 않았소. 한데 전투에 승리하여 돌아오던 그날, 온 성에 백성들이 날 환영해 주지 않았소. 환호하는 백성들의 얼굴을 보는데 짐은 난생처음 어깨에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깨달았소.”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이었다.
“혼삿날도 이미 천감天監에 골라 두라고 분부했소. 나흘 뒤인 팔월 열이틀 날이오.”
위지불이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렇게 빨리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내게 시집을 오는데 준비할 게 뭐가 있단 말이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혼사 뒤 지금과 달라지는 건 딱 한 가지요. 밤에 짐과 함께 자야 한다는 것.”
위지불이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부릅떴다.
“폐하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어요? 폐하랑 말하기 싫어요.”
남제화는 그녀가 털을 곤두세우는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그대는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소. 그저 새 신부가 되기만 하면 되오.”
“시간이 촉박한데 괜찮을까요?”
“혼례복은 짐이 이미 준비해 두었고, 다른 것들도 거의 준비를 마쳤소. 짐은 이번에 몹시 근사하게 그대를 맞이할 것이오. 그리고…….”
그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또 뭐요?”
위지불이가 캐물었다.
“우선은 알려 주지 않을 것이오.”
남제화가 일부러 뜸을 들였다.
“어차피 금방 알게 될 터이니.”
* * *
화려한 지하 감옥 안, 여제는 야명주 아래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두 눈썹은 서로 붙을 듯 바짝 좁혀졌다. 바닥에는 은색 가면을 쓴 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 했는가? 폐하가 오늘 황후 책립에 대한 성지를 발표했다?”
“예.”
은색 가면을 쓴 자가 답했다.
“대혼 날짜도 정해졌습니다. 나흘 뒤인 팔월 열이틀 날입니다.”
여제는 몸을 비틀거리다 이내 기둥에 부딪혔다.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정에 반대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단 말인가?”
“장로제가 폐지되었으니 누가 감히 폐하께 맞서겠습니까? 반대하는 이가 없을 수밖에요.”
여제가 기둥에 기대 고개를 들어 올리고 긴긴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가 미쳤구나. 판을 짜서 장로들을 제거하기에 그 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백성들을 돌보려는 줄로만 알았다. 해서 막지 않았지. 한데 황권을 빼앗고 가장 먼저 하는 짓이 위지불이를 황후로 세우는 거였다니. 이제 보니 애당초 생각을 바꾼 게 아니었구나. 황권을 빼앗은 것도 그저 황후를 세우기 위해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었어.”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강산을 싫어하고 미인을 좋아하는 사랑꾼을 낳았구나…….”